ART

위대한 예술가는 위대한 컬렉터다

해암도 2014. 6. 26. 04:39


▲ Fang mask, 루브르박물관, 피카소는 이런 아프리카 마스크를 많이 수집했다.
수년 전 한국의 노대가(老大家) K씨는 화가 나서 말했다. 요즘 젊은 화가들은 그림 팔아 큰돈이 생기면 외제승용차를 산다고! 그게 말이 되냐고 일갈했던 노대가는 유명한 골동품 수집가였다.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쉰이 넘어 겨우 그림이 팔리게 되자, 조선 목가구와 도자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고미술품을 사기 위해 골동가게에서 소품을 그려 그 자리에서 맞바꾼 적이 있다는 에피소드도 들린다. 이렇게 모은 소장품으로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던 그는 마침내 수백여 점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또 다른 예술작품의 소장가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아름다움에 미쳐 있기 때문에 타인의 작품이 얼마나 고귀하고 미학적인 것인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열망하듯이 그 작품을 소유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어쨌거나 예술가들은 기막힐 정도로 좋은 예술가와 위대한 작품을 단박에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자기들끼리는 누가 진짜 대가인지 척 보면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렘브란트는 진정한 컬렉터 화가였다. 그는 좋은 그림이 나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들여놓고 보았다. 그림뿐 아니라 골동품, 각종 무기, 소품과 책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렘브란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화상, 행상인, 의류상인들을 통해 끊임없이 물건을 구입했다. 통이 크다는 평판이 나 있던 렘브란트는 어떤 물건이든 경매에 부쳐지면 매우 높은 입찰가를 불러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높은 값을 부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1656년 재산 목록은 363개의 항목에 걸쳐 분류 기재되었다. 가구, 도자기, 유화, 드로잉, 골동품, 무기, 갑옷, 조각, 고대작품 등으로 범주화되었다. 유화와 판화로는 라파엘, 얀 반 아이크, 조르조네, 피테르 브뤼겔, 루카스 크라나흐, 루벤스, 야곱 요르단스 등 시대별 유명화가의 작품이 포함된다. 천하태평한 성격의 렘브란트의 낭비벽은 점점 더 심해져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산에 이르렀지만, 파산 후에도 돈이 생기면 그림을 사들였다. 그림 살 형편이 못 되면 경매장에서 티치아노와 같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초상화를 단박에 스케치해 오곤 했다. 이처럼 그는 파산과 고독 속에서도 끊임없이 ‘화가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물건들을 사 모았다. 렘브란트의 도를 넘어선 수집은 다른 화가들보다 훨씬 더 색다른 초상화를 제작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이런 행위가 자기 작업의 위신을 높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음은 물론 작업에 대한 재투자가 질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요화가회 출신인 고갱은 주식중개인 시절부터 그림을 사 모았다. 그가 제일 처음 구입한 그림은 세잔의 것이었다. 고갱은 열렬한 세잔 숭배자였다. 그가 얼마나 세잔의 작품을 애지중지했던지, 헤어져 사는 덴마크의 가족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세잔 그림만은 팔지 말라고 아내에게 신신당부했다. 물론 고갱은 세잔에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세잔의 회화 기법, 즉 윤곽선과 색채, 전통적 원근법의 파괴 등의 영향을 받았다.
   
▲ 렘브란트 하우스 뮤지엄에 재구성된 렘브란트의 소장품.
피카소는 또 어떤가!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피카소는 민속박물관에서 아프리카 원시인들이 만든 조각상을 보게 된다. 간결한 선, 단순하면서도 입체적인 모양, 강렬한 색채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이보다 더 완벽한 예술 표현 방식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피카소는 아프리카 가면을 닥치는 대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것을 모방하고 응용해 그리기도 하고, 조각을 하기도 했다. 바로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은 그가 얼마나 아프리카 가면에 심취했는지 보여준다. 이로써 피카소는 이전까지의 작업을 완전히 버리고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고 개척할 수 있었던 거다.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피카소는 한때 장물애비로 걸려 옥살이를 할 뻔했다. 1911년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가 도난을 당했을 때 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던 것! 얘기인즉슨 피카소의 친구였던 시인 아폴리네르의 비서가 루브르박물관에서 이베리아 두상을 빼내 피카소에게 전했던 일이 있었는데,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나자 놀란 그 조수는 ‘파리저널’에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자신의 비리와 함께 피카소에게도 장물을 나누어 주었던 사실을 공개하고 말았던 것이다. 놀란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그에게서 받았던 조각품을 센강에 버리려던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루브르박물관에 전해주러 갔던 적이 있었다. 피카소와 아폴리네르가 체포되었고, 대질신문을 했지만 뻔뻔스러운 피카소는 아폴리네르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거짓말했다.
   
   두 사람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긴 했지만,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건에 대한 피카소의 반응이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이 자신의 조국 이베리아에서 훔쳐간 것이며, 루브르는 장물을 전시한 것이 아니냐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것! 피카소는 작품이 사라진 것도 모를 만큼 거기에 관심이 없었던 프랑스의 박물관보다는 자신이 보관하는 것이 작품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앤디 워홀만 한 그림 수집광은 드물다. 그는 고가의 그림뿐만 아니라 온갖 잡동사니를 수집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워홀이 의료사고로 갑작스럽게 죽고 나자 그가 소유하고 있던 27개의 방에는 개봉도 하지 않은 상자와 쇼핑백, 수만 가지 보석과 액세서리, 피카소를 비롯한 대가들의 작품과 장식품들로 가득했다. 식당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장식품들로 가득 찼고, 기다란 테이블에는 값나가는 골동품이 즐비했다. 미국 인디언들이 사용하던 나바호 담요와 보석, 나무가면들도 있었다. 층계에까지 장식품들이 있었고, 침대 옆 테이블에는 보석들이 널려 있었다. 벽장 안에는 피카소를 비롯해 사이 톰블리, 재스퍼 존스, 로이 리히텐슈타인, 데이비드 호크니, 장 미셸 바스키아 등 예술가들의 작품이 가득했다. 워홀 컬렉션은 도자기 1659점, 팔찌 210점, 과자상자 175점을 포함하여 무려 1만점에 달했다. 이것들은 모두 열흘 동안 소더비 경매에 부쳐졌다. 롤스로이스 승용차에서부터 반쯤 쓰다 남은 향수까지 워홀의 유품들을 사기 위해 첫날에만 1만여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단돈 200달러를 갖고 뉴욕으로 온 지 38년 만에 그가 남긴 재산은 쇼킹한 수준이었다.
   
   이처럼 위대한 예술가들은 또 다른 예술가(작품)의 컬렉터들이다. 예술가들이 타인의 작품을 사들이고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언제나 탁월한 심미안과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술 컬렉팅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공부요, 투자인 셈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백남준 선생 역시 돌아가시고 나니 빈털터리였다는 풍문이다. 돈이 생기면 다시 새로운 작업에 온전히 재투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어떤가?!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유경희
   
   홍익대 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