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스님의 상좌 동명스님, 스승의 ‘生前 장례식’ 6일 부안 내소사에서 재현
生死於是 是無生死
<생사어시 시무생사·죽고 사는 것은 마음에서 나왔으나, 이것에는 생사가 없다>
선교(禪敎)를 겸비해 불교계 안팎에서 존경을 받던 해안 스님(1901∼1974)이 전북 부안군 내소사에서 자신의 장례를 치른 것. 해안 스님의 제자 10여 명이 스승이 탄 꽃상여를 멨다. 이 상여는 지장암에서 출발해 일주문을 돌아 다시 부도전으로 향했다. 내소사와 약 1km의 상여길 주변에는 보기 드문 광경을 보려는 100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행렬이 멈추고 상여 밖으로 나온 해안 스님은 군중을 향해 “대나무 매듭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육십 평생을 매듭 짓겠다”며 “이제 시시비비를 가리며 지냈던 모든 일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절을 가득 메운 군중 사이에서 어린 사미승이 드라마 같은 장면들을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지켜보고 있었다. 해안 스님의 어린 제자로 지금은 서울 성북구 전등사의 주지가 된 동명 스님(64)이다.
―왜 장례 장면을 재현하나.
“나이 들면서 세속의 부자(父子)처럼 어릴 적부터 키워주고 수행자의 삶을 이끌어준 은사 스님이 너무 그립다. 은사의 삶을 제대로 알리고 싶어 2년 전부터 BTN불교TV 제작진을 도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은사의 삶에서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그 장면이 빠질 수는 없다.”
―은사 역할을 맡아 꽃상여를 타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 처음에는 배우를 쓰려고 했는데 스님들이 상여를 메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은사 역할을 맡기로 했다. 외람된 일이다.”
―스님들 중 살아 자신의 장례를 치른 사례가 있나.
“중국은 모르겠고 국내에서는 이런 사례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해안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
“제자들을 무릎에 앉히고 수행자의 삶을 가르쳐 준 아버지 같은 분이다. 그때 무릎에서 배운 게 지금도 남아 있다.”
―은사는 17세 때 백양사 조실 학명 스님의 인가(認可)를 받아 가장 젊은 나이에 깨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일 안에 깨쳐야 한다’는 말도 하셨다. 이른바 돈오점수(頓悟漸修·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점진적 수행단계가 필요함)’, ‘돈오돈수(頓悟頓修·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수행이 더 필요하지 않음) 중 어느 편에 있었다고 보나.
“생전 그 논쟁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신 기억이 난다. 은사의 가르침은 불법(佛法)이 스님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직업과 성(性)에 관계없이 열심히 수행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평신도 모임인 불교전등회를 왕성하게 지도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은사의 옛 사진과 시를 보여주던 동명 스님은 “은사가 돌아가시기 전 비에 뭐 새기고 지저분하게 요란 떨지 말라고 당부했다”며 “심지어 쓸 글도 정해주셨다”고 말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실제 탄허 스님이 쓴 해안 스님의 부도(浮屠) 앞 비석에는 장식이나 장황한 기록 없이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라고 적혀 있다.
―기억에 남는 가르침이 있다면….
“비석 뒷면에 적힌 글이다.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 죽고 사는 것은 이것(마음)에서 나왔으나, 이것에는 생사가 없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014-04-04
<생사어시 시무생사·죽고 사는 것은 마음에서 나왔으나, 이것에는 생사가 없다>
1961년 해안 스님이 전북 부안군 내소사에서 자신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제자 10여 명이 스님의 꽃상여를 메고 있다. 동명 스님 제공
1961년 3월 한국 불교사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선교(禪敎)를 겸비해 불교계 안팎에서 존경을 받던 해안 스님(1901∼1974)이 전북 부안군 내소사에서 자신의 장례를 치른 것. 해안 스님의 제자 10여 명이 스승이 탄 꽃상여를 멨다. 이 상여는 지장암에서 출발해 일주문을 돌아 다시 부도전으로 향했다. 내소사와 약 1km의 상여길 주변에는 보기 드문 광경을 보려는 100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행렬이 멈추고 상여 밖으로 나온 해안 스님은 군중을 향해 “대나무 매듭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육십 평생을 매듭 짓겠다”며 “이제 시시비비를 가리며 지냈던 모든 일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절을 가득 메운 군중 사이에서 어린 사미승이 드라마 같은 장면들을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지켜보고 있었다. 해안 스님의 어린 제자로 지금은 서울 성북구 전등사의 주지가 된 동명 스님(64)이다.
전등사 주지 동명 스님이 은사 해안 스님의 사진 앞에 섰다. 조계종에서 효(孝) 상좌로 알려진 동명 스님은 “이분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며 “죽기 전 은사의 진면목을 세상에 제대로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53년이 흘러 이제 당시 스승의 나이를 넘어선 동명 스님이 스승의 장례를 재현한다. 지난달 25일 전등사를 찾아 해안 스님의 생존 장례식 사연과 이를 재현하는 제자의 사연을 들었다. 장례 장면은 6일 내소사에서 촬영된다.―왜 장례 장면을 재현하나.
“나이 들면서 세속의 부자(父子)처럼 어릴 적부터 키워주고 수행자의 삶을 이끌어준 은사 스님이 너무 그립다. 은사의 삶을 제대로 알리고 싶어 2년 전부터 BTN불교TV 제작진을 도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은사의 삶에서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그 장면이 빠질 수는 없다.”
―은사 역할을 맡아 꽃상여를 타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 처음에는 배우를 쓰려고 했는데 스님들이 상여를 메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은사 역할을 맡기로 했다. 외람된 일이다.”
―스님들 중 살아 자신의 장례를 치른 사례가 있나.
“중국은 모르겠고 국내에서는 이런 사례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해안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
“제자들을 무릎에 앉히고 수행자의 삶을 가르쳐 준 아버지 같은 분이다. 그때 무릎에서 배운 게 지금도 남아 있다.”
―은사는 17세 때 백양사 조실 학명 스님의 인가(認可)를 받아 가장 젊은 나이에 깨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일 안에 깨쳐야 한다’는 말도 하셨다. 이른바 돈오점수(頓悟漸修·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점진적 수행단계가 필요함)’, ‘돈오돈수(頓悟頓修·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수행이 더 필요하지 않음) 중 어느 편에 있었다고 보나.
“생전 그 논쟁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신 기억이 난다. 은사의 가르침은 불법(佛法)이 스님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직업과 성(性)에 관계없이 열심히 수행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평신도 모임인 불교전등회를 왕성하게 지도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은사의 옛 사진과 시를 보여주던 동명 스님은 “은사가 돌아가시기 전 비에 뭐 새기고 지저분하게 요란 떨지 말라고 당부했다”며 “심지어 쓸 글도 정해주셨다”고 말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실제 탄허 스님이 쓴 해안 스님의 부도(浮屠) 앞 비석에는 장식이나 장황한 기록 없이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라고 적혀 있다.
―기억에 남는 가르침이 있다면….
“비석 뒷면에 적힌 글이다.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 죽고 사는 것은 이것(마음)에서 나왔으나, 이것에는 생사가 없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01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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