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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의 신비전'을 창시한 해부학자… 천재인가 쇼맨인가

해암도 2026. 8. 8. 18:14

 

 

귄터 폰 하겐스 Gunther von Hagens 1945.1.10~2026.7.24

 

시신에서 물과 지방 빼내고 플라스틱 채워 ‘썩지 않는 인체’ 만들어
‘인체의 신비’ 전시로 42개국에서 5000만명 넘는 관객 불러 모아
“이 전시를 통해 여러분의 인간다움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몸속이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은 늘 구경거리의 이유가 됐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 대학 도시에는 ‘해부 극장(anatomy theater)’이 유행했습니다. 이탈리아 파도바와 볼로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계단식 관람석을 갖춘 원형극장이 세워졌습니다. 겨울이 되면 이곳에서 사형수의 시신을 갈랐습니다. 시신의 부패가 늦게 일어나는 추운 계절을 골랐던 겁니다. 입장료를 내면 누구나 그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해부는 학문이긴 했지만 동시에 흥행의 영역이었습니다.

 

단순한 구경거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활약했던 해부학자 프레데리크 뤼스(Frederik Ruysch·1638~1731)였습니다. 그는 평생 31번 대중 앞에서 해부를 시연했습니다. 시신의 혈관에 붉게 물들인 밀랍을 주입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표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기 집을 개조한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에 이 표본을 늘어놓고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태아의 뼈로 작은 무대를 짓고 그 위에 인간 장기로 만든 나무와 풀을 심은 전시물도 있었습니다. 시신의 손에 하루살이를 올려놓아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하는 기괴한 철학도 보여줬습니다. 뤼스는 관객을 향해 라틴어로 외쳤습니다. “와서 보라(Venite et Videte).”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훗날 이 컬렉션 전체를 3만 길더라는 거금에 모두 사들였습니다. 과학과 서커스, 경건함과 엽기의 경계가 모호한 풍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체 쇼의 전통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유랑 서커스 극단은 밀랍으로 만든 해부 인형을 싣고 장터를 돌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윤리에 대한 기준이 바뀌고, 시신을 쉽게 구하기 어려워지자 이런 모습은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인체 전시가 역사책에나 나오는 기록으로 여겨지던 20세기 말, 검은 중절모를 눌러 쓴 한 남자가 이 전통을 되살렸습니다.

 

시신에서 수분을 제거한 뒤 그 자리에 밀랍 대신 플라스틱을 채우는 방법을 찾아낸 이 남자는 피부를 벗긴 시신을 춤추고 달리는 모습으로 만들어 대중을 모았습니다. 무려 5000만명이 이 남자가 꾸민 전시를 봤습니다. 찬사와 혐오를 동시에 몰고 다녔던 이 사람이 바로 오늘 사이언스타의 주인공 해부학자 귄터 폰 하겐스(Gunther von Hagens·1945.1.10~2026.7.24)입니다. 42국을 돌며 열린 그의 전시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순회 전시’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를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별명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죽음의 의사(Dr. Death)’입니다.

 

‘귀여운 것’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

 

폰 하겐스는 1945년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귄터 게르하르트 리프헨(Gunther Gerhard Liebchen)이었습니다. 리프헨은 독일어로 ‘귀여운 것’ 또는 ‘연인’을 뜻하는 옛날식 애칭입니다. 아버지는 나치 친위대(SS)의 요리사였습니다. 폰 하겐스가 태어난 며칠 뒤, 부모는 갓난아이를 빨래 바구니에 담아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옛 소련군이 코앞까지 밀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훗날 동독이 되는 그라이츠에 정착했습니다.

 

폰 하겐스는 여섯 살 때 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습니다.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혈우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진단조차 하지 못하던 병이었습니다. 병원에서 6개월을 보내며 소년은 하얀 가운과 소독약 냄새에 매력을 느끼며 의학에 빠져들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간호사로 일하며 예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젊은 폰 하겐스는 동독의 공산 체제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1969년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다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다음 해 서독 정부가 그의 몸값을 치르고 데려왔습니다. 당시 서독은 동독의 정치범을 이런 식으로 데려와 정착시키곤 했습니다. 1973년 뤼베크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마쳤고, 2년 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마취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5년에는 코르넬리아 폰 하겐스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의 성(姓)을 자기 성으로 삼았습니다. ‘귀여운 것’이라는 본명이 촌스럽다며 마음에 들지 않아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1989년 헤어졌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폰 하겐스’로 살았습니다.

 
 

정육점에서 떠오른 아이디어

 

지루한 마취과 의사 생활을 하며 하이델베르크 대학 병리해부학 연구소의 조교로 일하던 중 폰 하겐스는 인생을 바꾼 장면을 마주합니다. 연구소의 표본들이 플라스틱 덩어리 속에 통째로 굳은 채 들어 있었던 겁니다. 젊은 폰 하겐스는 표본에서 어색함을 느꼈습니다. “왜 플라스틱을 표본 ‘바깥’에만 부었을까. 표본 ‘안’을 플라스틱으로 채우면 어떨까. 물기를 플라스틱으로 바꾸면 조직이 안에서부터 단단하게 굳지 않을까. 더 잘 관찰할 수 있을 텐데.”

 

폰 하겐스는 정육점에서 결정적 영감을 받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얇게 저미는 슬라이서를 보면서, 사람의 장기도 원하는 두께로 잘라 관찰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폰 하겐스가 생각해 낸 시신 처리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시신을 얼려 부패를 막습니다. 이어 아세톤 같은 용액에 담가 몸속 수분과 지방을 녹여 빼냅니다. 그 빈자리에 액체 플라스틱을 밀어 넣은 뒤 열과 빛, 가스로 굳힙니다. 스펀지에 스며든 물을 전부 빼내고 그 자리에 굳는 수지를 채워 넣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는 이 방법에 ‘플라스티네이션(plastination)’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3년 만에 첫 전신 표본을 만들다

 

수많은 실패를 거쳐 1977년 1월 10일, 그의 서른두 번째 생일에 첫 표본이 완성됐습니다. 첫 작품은 사람의 신장이었습니다. 폰 하겐스는 1978년 이 플라스티네이션 기술의 특허를 냈습니다.

 

신장 하나를 굳히는 것과 사람 몸 전체를 채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폰 하겐스의 동료였던 클라우스 티데만은 실험실에서 발생한 심각한 사고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두꺼운 강판을 용접해 만든 진공 챔버에 5㎝ 두께 안전 유리를 덮었는데, 압력이 의도치 않게 낮아지자 유리가 폭발하면서 실험실을 유리 조각으로 뒤덮었다는 겁니다. 온전한 전신 표본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1500시간 넘게 걸립니다. 인건비만 따져도 표본 하나에 약 5만달러(약 7000만원)가 듭니다. 이것도 노하우가 쌓인 다음에야 가능해진 수치입니다.

 

폰 하겐스는 1992년 첫 전시 표본을 완성할 때까지 13년을 매달렸습니다. 이듬해인 1993년, 그는 하이델베르크에 ‘플라스티네이션 연구소(IfP)’를 세웠습니다.

 

“나를 표본으로 만들어 달라” 몰려든 사람들

 

플라스티네이션의 가장 큰 문제는 시신 조달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의과대학을 통해 시신을 구했습니다. 폰 하겐스는 여기서 기발한 시도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대 해부학과의 시신 기증 프로그램에 등록한 3000명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 시신을 표본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공개하는 새 프로그램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놀랍게도 절반이 넘는 사람이 동의했습니다.

 

폰 하겐스의 이름이 유명해지자 “내 몸을 공익을 위해 남기고 싶다”는 기증자가 수천 명씩 몰렸습니다. 묻히거나 화장되는 대신, 영원히 사람들 앞에 남겠다는 이들이었습니다.

 

1995년 9월 15일 도쿄 국립과학박물관에서 폰 하겐스의 첫 전시가 열렸습니다. 일본해부학회 100회 총회를 기념하는 행사였습니다. 전시 이름은 ‘바디 월드(Body Worlds)’, 독일어로는 ‘쾨르퍼벨텐(Körperwelten)’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인체의 신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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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를 두는 표본.

42국 5000만명… 폭발적인 반응

 

폰 하겐스가 만들어낸 전시장의 표본들은 박물관 유리 박스 안에 얌전히 누워 있지 않았습니다. 피부를 벗겨 근육과 뼈, 신경을 그대로 드러낸 채 춤을 추고, 달리고, 체스를 두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기수(Horseman)’는 피부가 벗겨진 사람이 역시 피부를 벗긴 말 위에 올라 앞발을 들고 있는 자세였습니다. 폰 하겐스는 항상 이 전시가 단순히 엽기적인 쇼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해부학은 너무 오랫동안 엘리트만의 학문이었다. 이 전시는 해부학의 민주화이다.” 의사와 의대생만 볼 수 있었던 사람의 몸속을 모두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자신이었다는 겁니다.

 

관객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첫 전시 이후 42국을 돌며 5000만명 넘게 다녀갔습니다. 이 사업은 폰 하겐스에게 엄청난 부(富)를 안겨 주었습니다. 포브스는 1999년부터 2006년까지 그가 바디 월드를 통해 약 4000만달러(현재 환율로 약 550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고 분석했습니다.

 

티켓과 함께 인체 모양 열쇠고리, 티셔츠 같은 기념품도 팔았습니다. 폰 하겐스는 그 돈 대부분을 연구소와 표본 제작 시설에 다시 쏟아부었다고 밝혔습니다. 2006년에는 독일 동부 구벤에 세계 최대 표본 제작 시설 ‘플라스티나리움(Plastinarium)’을 세웠습니다.

 

한국에서만 170만 관객 모아

 

한국도 해부쇼 전시의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2002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인체의 신비전’이 열렸습니다. 성인 입장료 1만원, 중고생 6000원, 초등학생 5000원이었습니다. 약 170만명이 다녀가며, 그해 국내 최다 관객을 모은 전시가 됐습니다. 술과 담배로 새까맣게 변한 폐와 간에 충격을 받은 어른, “자신은 절대 술·담배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초등학생의 발언이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2011~2012년에는 ‘생명의 순환’이라는 부제를 달고 정식 라이선스 전시가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 사이 ‘짝퉁’ 전시가 여러 차례 열렸을 만큼, 전시의 영향력은 컸습니다.

 

런던 한복판에서 공개 부검 시연

 

폰 하겐스는 화제의 중심에서 주목받는 걸 좋아했습니다. 2002년 11월, 그는 런던 동부의 한 갤러리에서 72세 남성의 시신을 공개 부검했습니다. 영국에서 공개 부검이 이뤄진 것은 약 170년 만이었습니다. 관객 수백 명이 표를 사서 지켜봤습니다. 영국 정부는 “불법 소지가 있다”고 경고했지만, 폰 하겐스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현장에서 지켜보기만 했고, 부검 장면은 채널 4를 통해 방송까지 됐습니다.

 

의료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영국 의사협회 윤리 책임자 마이클 윌크스는 이 부검을 두고 “품위 없고 무례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인간 심리의 관음적이고 자극적인 측면에 호소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폰 하겐스는 “대성공”이라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는 공개 부검이 표현의 자유이자 검열과의 싸움이라고 여겼습니다. 2009년 베를린에서는 남녀 시신이 성행위를 하는 자세의 표본까지 선보였습니다.

 

폰 하겐스가 자신과 관련된 논란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같았습니다. “논란이 있다는 건 내 직업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토론을 불러일으킨다는 증거이다.”

 

‘죽음의 의사’라는 그림자

 

전시가 성공할수록 비판도 커졌습니다. 무엇보다 시신을 전시한다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피부조차 없는 시신으로 가득 찬 전시장은 ‘과학’이라는 포장을 걷어내면 공포 영화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이 표본을 훼손하거나, 담요로 덮어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프랑스 법원은 인권 단체의 요청으로 전시 중단을 명령했고, 전시를 강행할 경우 하루 2만유로의 벌금을 내라고 판결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 반발이 거셌습니다. 나치의 인체 실험과 시신 훼손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독일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자들은 그를 아우슈비츠의 인체 실험 의사 요제프 멩겔레에 비유하며 ‘죽음의 의사’라 불렀습니다. 늘 검은 중절모를 쓴 폰 하겐스의 모습이 영화 ‘레이더스’에 나오는 나치 요원을 닮았다는 조롱도 따라다녔습니다.

 

사형수의 시신을 썼다는 의혹

 

가장 심각한 논란은 시신의 출처였습니다. 폰 하겐스는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 다롄에 대규모 표본 제작 시설을 운영했습니다. 이 시설에서 처형된 사형수 시신을 구매해 표본으로 사용한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폰 하겐스는 이를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 전시된 표본 일부에서 사형 집행 흔적이 발견되면서 의혹은 사실이 됐습니다. 다만 폰 하겐스가 시신 출처를 알았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폰 하겐스는 문제가 된 시신과 표본을 모두 화장한 뒤 중국에서 나온 시신을 쓰지 못하도록 지침을 바꿨습니다. 기증 시신 접수 절차도 엄격히 재정립했다고 밝혔습니다.

 

표본 거래도 논란이 됐습니다. 구벤의 플라스티나리움에서 일부 표본이 판매되면서 이곳은 ‘죽음의 수퍼마켓’으로 불렸습니다. 실제 흡연자의 폐는 3600유로, 고환은 360유로에 거래됐습니다.

 

영국 사회학자이자 장애인 활동가 톰 셰익스피어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폰 하겐스는 과학이라는 포장 아래 관음적 관객에게서 수백만 달러를 긁어모으는 흥행꾼일 뿐”이라고 썼습니다.

 

“죽어서도 여러분을 맞이하겠습니다”

 

말년의 폰 하겐스는 인생을 정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2008년 그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손의 감각이 하루가 다르게 무뎌졌습니다. 전시 기획은 두 번째 부인이자 큐레이터인 안젤리나 월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이후 폰 하겐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시신을 플라스티네이션으로 만들어 구벤 전시관 입구에 세우겠다. 검은 중절모를 쓰고 관객에게 악수를 청하는 자세로 말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손님들을 맞이하고 싶다.”

 

그의 상징이 된 검은 중절모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폰 하겐스는 이 중절모가 렘브란트의 1632년작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혔습니다. 그림 속에서 시신의 팔 근육을 펼쳐 보이는 튈프 박사도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400년 전 해부학의 스승에게 바친 존경이었던 셈입니다. 시신을 구경거리로 삼는다는 비난을 평생 받았지만, 폰 하겐스는 자신이 해부학의 계보 위에 새겨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를 사기꾼이라 부른 사람도, 천재라 부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전시장을 나온 관객들이 자기 몸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됐다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겐스는 생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인간이라는 종의 한 구성원으로 알아보게 된다. 이 전시를 통해 여러분의 인간다움이 분명해진다.”

 

렘브란트의 1632년작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