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할 말 있다] [7] 103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
103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이제 이념논쟁 끝내고 실용주의로 가야할 때"라며 "미래를 위해 열린 진보·열린 보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검찰총장 윤석열은 2021년 3월 초 사퇴했다. 보름여 칩거한 뒤에 첫 외부 일정으로 김형석(103) 연세대 명예교수 자택을 방문했다. 김 교수는 정치 입문을 고민하던 그에게 여러 조언을 건넸고, 그는 이듬해 3월 제20대 대선에서 당선돼 대통령이 됐다. 김 교수는 윤 대통령의 지난 18개월간의 국정을 어떻게 지켜봤을까. 10월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졌습니다.
“득표 격차가 예상보다 컸지만 짐작했던 결과예요. 중요한 건 내년 총선이고, 그때까지 무엇이 달라지느냐가 중요할 테니까 더 이상 그 선거 결과를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그만두고 첫 일정으로 교수님을 찾아뵀습니다.
“검찰총장 사퇴 후 날 만나고 싶다고 전화로 연락이 왔어요. 처음엔 별로 도움 될 게 없다고 생각해 거절했는데, ‘꼭 뵙고 싶다’ 하길래 수락했죠. 부친(고 윤기중 교수)과 연세대에서 같이 재직했던 인연도 있고요.”
前 정부 통계 조작, 팩트 잃은 사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릇이 크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해준 말이 첫째, 당신을 향한 국민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으니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지금보다도 더 보람 있게 살아봐라. 둘째, 당신의 ‘마음 그릇’이 비어 있다면 정치해도 괜찮다. 셋째, 정치를 한다면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라.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그 조언들을 지금도 유념한다고 보십니까.
“윤 대통령은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취임했어요. 문재인 정부에서 공무원들이 통계 조작했던 사실이 최근 드러났는데 정말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마약 문제도 심각한데 지난 정부 5년간 손도 안 댄 거 같고요. 나라가 겉보기와 달리 병든 상태에서 중책을 맡았어요. 국가가 분열된 상태에서 대통령직에 올랐기 때문에 지금 많이 힘들 거예요.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전 정부가 남긴 사회의 질병들을 잘 고쳤으면 합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민주화 이후 법조계와 운동권 인사들이 정계를 양분했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운동권들은 싸워 쟁취하는 데만 도사일 뿐 전혀 공부를 안 했습니다. 법조계 인사들은 공부도 많이 한 편이니 운동권보다야 낫지요. 하지만 법조계의 단점은 국제적인 감각이 뒤떨어진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 회복에도 적극 나서더군요.”
-윤 대통령의 외교 노선을 긍정 평가하십니까.
“대통령으로서 제일 잘한 일 중에 하나가 일본과 관계 개선하며 자유주의 진영으로 돌아온 거예요. 제 초등학교 선배가 김일성입니다. 광복 후 평양에서 아침을 같이 한 적 있는데, 그에게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이냐 물으니 ‘친일파 척결’부터 내세우더군요. 그게 지금의 북한을 만든 비극이죠. 지난 정권에서 비슷한 행보를 보이길래 답답했는데, 이제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한국도 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친일 논란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저는 일제강점기를 겪어본 사람입니다. 너무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일본 놈에게 원수를 어떻게 갚나’ 별렀어요. 그 생각을 바꿔준 게 도산 안창호 선생이십니다. 그분이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정직하게 살면서 국민 각자가 성숙한 인격을 갖춰 일본을 극복하자’고 가르치셨어요. 요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하마스 전쟁을 보며 악으로는 악을 되갚을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합니다.”
-국민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사회는 사실, 그러니까 ‘팩트’를 잃어버렸어요. 국가가 통계를 조작하다니 말 다한 것 아닙니까. 이 정부는 사실 그대로의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감 있게 각계각층과 대화하며 국정을 이끌었으면 좋겠어요. 투쟁하려 하지 말고 겸허히 국민에게 다가간다면 진심이 통할 겁니다.”
인사, 외부 추천 받고 청년 등용을
-윤 대통령은 ‘빈 그릇’을 잘 채워가고 있습니까.
“한국이 군사독재 정권을 거쳐 법치주의 민주국가로는 성장했는데, 상식과 질서가 사회 기반이 되는 서구 선진국과 같은 반열엔 오르지 못했다고 봅니다. 진보와 보수가 공존해야 하는데 윤 대통령이 잘 품었으면 좋겠어요.”
-인사(人事)를 두고서 비판이 많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을 예로 들고 싶어요. 그분이 정권을 잡았을 때 군사독재라 우려가 컸는데, 경제와 교육 등 본인이 모르는 분야엔 각계 전문가들을 여러 번 찾아가 ‘도와달라’고 호소하며 사람을 모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비슷했고요. 지금 윤 대통령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가 ‘인사난’ 같은데, 등용의 폭을 넓히고 젊은 사람들도 많이 썼으면 좋겠어요. 외부에서 적극 추천을 받고, 검증도 철저하게 하고요.”
-지지율이 왜 떨어질까요.
“앞으로 이념 논쟁을 끝내고 실리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대화가 실용주의입니다.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에 힘쓰고, 내치는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힘을 내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됩니다. 이념 논쟁은 집을 바닥부터가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지으려 드는 거예요. 현실을 직시하고 땅에서부터 지어야죠. 그게 민생입니다.”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까요.
“최근 인요한씨가 ‘생각은 달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했던데, 동의합니다. 생각은 당연히 다 다르죠. 그런 다른 생각들을 어떻게 합하는가에서 지도력이 나옵니다. 그런데 생각이 다른 것은 괜찮지만, 목적이 다른 사람과는 함께 일 못 해요.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문제에 봉착해 있어요. 나라를 흔들려는 극단의 좌파와는 함께 가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랏일을 못 하게 국민들도 투표로 심판해줘야 해요.”
-야당에 먼저 손 내밀어야 합니까.
“아직은 이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 정권을 무너뜨리고 나는 법적 처벌을 피해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지금 야당과의 긴장 관계엔 이재명 대표의 책임이 있습니다. 100년을 살아보니 때가 해결해주는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큽니다.”
애국심보다 이기심이 앞설 때 실패
-지금 대통령이 다시 찾아온다면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된 대통령으로 남아라. 제가 북한의 공산치하를 직접 겪어봐서 아는데, 좌파엔 진실이 없어요. 언론까지 통제해 진실을 조작해서라도 이기려는 게 좌파예요. 그러나 진실의 힘이 결국 이깁니다. 대통령이 진실된 태도로 일하면 자연스레 사회 통합이 되고 나중에 제대로 평가받습니다. ‘내로남불’만은 결코 없는 정부가 되어라, 그 말을 해주겠어요.”
-대한민국의 13명 대통령을 전부 지켜보셨습니다.
“103년을 살며 이승만 대통령부터 다 봤는데, 공통점은 ‘애국심’보다 ‘이기심’이 앞설 때 실패했어요. 이승만 대통령도 자유민주주의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독재로 끝났고, 박정희 대통령도 집권 후반 유신헌법으로 민심을 잃었고요. 정치는 국민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박수받고 싶어서 무언가 할 때는 이미 병든 거예요.”
☞김형석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이 초등학교 선배, 시인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 같은 반 친구였고, 김수환 추기경과 일본 조치(上智)대에서 동문수학했다. 학창 시절 직접 강연을 들은 도산 안창호를 인생의 사표로 삼는다. 스물다섯 살에 평양에서 광복을 맞아 공산주의를 경험하다 월남했고 서른 살에 6·25전쟁, 40대엔 4·19를 목격했다. 연세대 교수로 퇴직한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 ‘백년을 살아보니’ 등 베스트셀러를 출간했고 요즘도 왕성하게 집필과 강연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1년 3월 검찰총장직을 사퇴한 뒤 보름여 칩거하다 첫 외부 일정으로 그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양지혜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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