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레시피’ 펴낸 장하준
“메뚜기도 한철이라…(웃음).”
말은 싱겁게 했지만, 장하준(60)은 책 홍보에 진심이었다. 10년 만에 낸 새 책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Edible Economics)’를 들고 런던에서 날아온 그는 한 달간 전국을 돌며 독자와 만났다. 마늘, 고추, 멸치 등 식재료를 차용했을 뿐, 이전 저술과 논지가 별반 다르지 않은 책을 낸 것에 대해 장하준은 “경제 문맹 퇴치”를 위해서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 때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부친 장재식 일화가 흥미롭다.
◇문재인 ‘소주성’ 평가하고 싶지 않다
-지난해 6월 케임브리지대서 런던대로 옮겼더라.
“강의 부담 작고 연봉도 많이 준대서.”
-그래도 ‘켐대’라는 명예가….
“그것도 뭐, 30년 넘게 하면 별로 감동스럽지 않다(웃음).”
-SOAS 런던대던데.
“스쿨 오브 오리엔탈 & 아프리칸 스터디(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라고 원래 식민지 관리들 교육기관으로 만든 건데, 지금은 반식민지 좌파 지식인들이 주를 이룬다. 거기 가니까 내가 굉장한 우파가 됐다. 사실 좌파도 아니지만.”
-그럼 어느 편인가.
“정의의 편?(웃음) 우리나라처럼 진영 논리 심한 곳에선 자기네가 생각하는 것에서 하나라도 어긋나면 쟤는 사회주의자, 쟤는 파쇼라 공격한다.”
-장하준은 좌우가 다 싫어하더라. 박정희 산업 정책을 높이 평가해서, 시장 만능을 혐오해서.
“경제학에 9개의 주요 학파가 있지만 어느 하나로 분석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나는 좌로는 마르크스부터 우로는 하이에크까지 여러 이론을 혼종 교배한다.”
-그래서 ‘칵테일주의자’인가.
“정파가 왜 중요한가? ‘복지국가’도 처음엔 보수정치의 원조랄 수 있는 비스마르크가 만든 거다. 공공의료보험, 연금제도를 발명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정책도 한국에선 박정희 대통령이 했다고 우파 독재정책이라고 비판하는데, 1960~70년대 영국에선 노동당이 주도해 좌파정책으로 인식돼 있다. 정책은 나라와 시대에 맞게 만들어지고 좌우가 갈리는 것도 아닌데, 자기들 나라에서 좌가 했으면 좌파정책, 우가 했으면 우파정책으로 낙인 찍는다.”
-문재인 정부때 정책실장 장하성과 사촌이라 ‘소주성’을 장하준이 설계했다고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하! 솔직히 난 소주성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임금 주도 성장이란 이론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자영업자가 많으니까 이름을 소득 주도 성장으로 붙인 것 같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한 건지 잘 모르겠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다.”
-장하성 실장이 주도한 소액주주운동에도 비판적이었다.
“개별 주주에게 주인의식을 기대하기 힘들다. 소액주주운동으로 개미들의 권한이 강화되지도 않았다. 외국 펀드의 목소리만 커졌지. 사회운동의 이상만으로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
-부친은 DJ 정부 때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실용성을 늘 강조하셨다. 경제학자들이 무슨무슨 모델을 만들어서 미래를 예측해오는데 정책 입안자 처지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게 많더라고. 국세청에도 오래 계셨는데, 교수들한테 용역 줘서 세수 추계를 해오라고 했더니 25년 경력의 하급 주사(主事)들이 연필 꽁다리 빨면서 대강 감으로 써 온 숫자보다 못하더란다. 고상한 말로 암묵지(Tacit knowledge). 이론만 믿지 말고 경험에서 나온 지식을 중시하란 말씀이었다.”
-장하준도 책상물림 경제학자가 돼가는 건 아닌지.
“음… 난 정책 연구자라 젊은 시절부터 국제기구, 각국 공무원들, 기업인들과 만나며 현장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상아탑 안에서 화석화한 것 같진 않다(웃음).”
◇한 세대가 코인과 부동산에 올인하는 나라
-경제문맹 퇴치를 위해 책을 쓴다고 했지만 MZ세대로 불리는 요즘 젊은이들은 경제 빠꼼이들이다. 유튜브에는 부동산, 주식 투자 노하우를 알려주는 채널들이 넘쳐난다.
“한편으론 좋고 한편으론 슬픈 얘기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융을 통해 경제 흐름을 주시하고 이해하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한 세대가 코인과 부동산에 올인하는 경우는 없다.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 나라들처럼 어떤 사람은 기술고등학교 다니다 벤츠에 취직해서 기름밥을 먹어도 2억, 3억 버는 길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인 서울이나 대기업 취직에 실패하면 죄다 바닥으로 내몰리니 코인에 올인한다.”
-현대차 생산직 공모 열기로 블루칼라에 대한 인식이 바뀌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케임브리지 있을 때 박사과정에 들어온 독일 학생을 만났는데 나이가 많았다. 10여 년 공장 다니다 경영에 흥미를 느껴 뒤늦게 대학에 갔는데 경제학이 더 재미있어서 박사과정까지 오게 됐단다. 이렇게 다양한 길이 있어야 과열 경쟁이 없어지고 사람들이 행복해진다. 딱 한 가지 게임만 있으면 상위 10% 빼고는 다 불행하다. 그런데 길이 10가지, 100가지가 있으면 비록 거기서도 줄세우기는 하겠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그만큼 늘어난다.”
-그걸 국가가 도와줘야 한다는 건가.
“입시 등 교육과정도 나라가 정하고, 정부가 어떤 산업 정책을 추진하느냐에 따라 좋은 직업에 대한 개념도 바뀐다. 1950~60년대만 해도 다들 문과만 가려고 했다. 정부가 산업화를 해야 하니 문과 정원 억제하고 이과를 밀었다. 이과가 죽도록 싫지 않으면 장학금 받고 일자리도 많은 이과로 갔다. 얼마든지 정책으로 조율이 가능하다.”
-산업 정책과 국가의 역할을 늘 강조한다.
“현대 IT 경제를 만든 게 미국 정부다. 반도체도 미국 해군에서 돈 대서 개발했다. 캘리포니아가 영화 산업으로 큰 것 같지만 실은 국방 산업으로 성장했다. LA와 샌디에이고가 주요 군항이었고 자연히 항공기, 전자 산업 연구 기업이 생겨났다. 거기서 나온 게 실리콘밸리다. 정부가 판을 깔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SVB 파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곳곳에
-코로나 팬데믹 초창기였던 2020년엔 미래를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했더라.
“그때까지 인류 역사상 제일 빨리 개발한 백신 기간이 4년이었다. 코로나 백신은 1년으로 단축돼 그나마 타격이 줄었다. 세계 많은 국가들이 GDP의 10%, 12%의 재정을 투입한 것도 도움이 됐다. 영국 같은 시장주의 나라에서도 기업에서 직원을 해고하지 않으면 월급의 80%를 정부가 내줬다. 물론 코로나의 대가는 엄청났다. 영국은 20만명 가까이 코로나로 사망했고, 미국은 하루에 6000~7000명까지 사망자가 나왔다. 9·11때 죽은 사람이 3000여명이니 하루에 9·11이 두번씩 일어난 셈이다. 아직도 미국과 영국에선 수백만 명이 롱코비드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번 책 ‘고추’라는 챕터에서는 팬데믹을 통해 돌봄노동의 중요성을 인류가 절감했다고 썼다.
“한국은 방역을 잘해서 록다운까지는 안 갔지만, 영국은 슈퍼마켓과 약국을 빼고는 모두 문을 닫았다.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장보기도 힘든 노인들은 꼼짝없이 죽게 생겼으니 동네 젊은이들이 자원해서 문 두드리고 다니며 필요한 생필품을 사다드렸다. 가족과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솔직히 교수나 금융인이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그러나 택배기사를 포함한 블루칼라들이 없으면 큰 문제가 생긴다. 시장에만 맡겨서는 재난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인간 사회에 뭐가 중요하고 필요한지 우선순위를 다시 매기게 한 시기였다.”
-엔데믹이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인플레이션으로 세계 경제가 위기다.
“현재 위기는 2008년 금융 위기 때로 거슬러 가야 한다. 제도를 개혁하지 않고 이자율 0%로 위기를 틀어막은 대가다. 이자율 0%라는 건 프로야구팀에서 1할 치는 선수나 3할 치는 선수나 연봉을 똑같이 주겠다는 것이다. 가격 기능을 마비시킨 거다. 이자율을 0%대로 해놓고 돈을 쫙 푸니 1% 수익 내는 놈이나 5% 수익 내는 놈이나 똑같이 취급된다. 근데 갑자기 이자율이 5%로 뛰니까 5% 이하로 수익 내던 것이 다 부실이 된 거다. 인플레는 막아야 하니 이자율을 빨리 올렸는데, 그러자 부실이 막 드러나기 시작한 거다.”
-최근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도 그 여파일까.
“SVB는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다는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자율이 확 오르니 채권 가격이 떨어지고 은행 부실로 이어졌다. 안전하다고 사놓은 자산마저 구멍이 뻥뻥 나고 있는 거다. 나는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묻혀 있는 상태라고 본다. 일각에서는 계약기간 만기가 대량으로 몰려오는 2024년에 상업용 부동산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008년에 금융 개혁을 어떻게 해야 했나.
“1929년 대공황 때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돈을 풀어 인프라에 투자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건 제도 개혁이었다. 투자은행·상업은행을 분리하고, 증권거래위원회(SEC)를 만들어서 시장을 규제하고, 예금보험을 만들고 사회보장을 도입했다. 그런데 2008년엔 은행들이 자기자본 비율 올리고 파생 상품을 규제하는 정도만 했다. 0%대 이자율과 양적 완화로 떠받쳤다. 자산에 엄청난 거품이 낀 것이다.”
-금융의 단기화도 위기를 심화한다고 했다.
“팬데믹 때 영국과 미국은 경제가 곤두박질쳤다. GDP(국민총생산)가 10%씩 마이너스 성장하는데 주식시장은 연일 상종가를 쳤다. 이러니 기업들이 단기주의 경영을 하고, 1년 안에 성과를 못 내면 주식을 팔아치우는 주주들 힘이 세졌다. 자사주를 매입해서라도 돈을 벌게 해달라고 하니 기업의 장기 투자가 어려워졌다.”
-정부가 제도 개혁을 통해 컨트롤 할 수 있나?
“자사주 매입은 어느 정도 금지할 수 있다. 미국은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동안 기업이 자사주 매입을 할 수 없게 했다. 장기적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도 마련해야 한다. 이번 책 ‘향신료’ 챕터에도 썼는데, 테뉴어 보팅(Tenure Voting)이라고 주식을 오래 갖고 있으면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가 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주식을 1년 이상 갖고 있으면 표가 하나 더 생긴다. 나는 거기서 그칠 게 아니라 매년 1표씩 더 주고, 10년을 보유하면 5표를 더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장기투자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세진다. 이렇듯 제조업 등 실물경제에 대한 장기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당신의 주장은 제조업 대신 서비스업을 키우고, 주주 권리를 확대해야 한다는 최근의 트렌드와는 완전히 반대다.
“제조업의 중요성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관광이나 은행산업으로 상징되는 스위스가 실제로는 1인당 제조업 생산량 1위 국가다. 제조업을 대체한다고 하는 서비스업들 대부분도 제조업에 기대서 발전한다. 투자 안 하고 산업정책 안 하면 제조업이 약해진다고 내가 20년 가까이 얘기해왔다. 결국 조선, 철강 주도권은 중국에 빼앗기고 있고, 반도체도 얼마 안 남았다. 산업구조 고도화도 안 되고 일자리도 줄고 고용은 불안한데 복지제도도 취약하니 실직과 은퇴가 재앙이 된다.”
◇복지국가 스웨덴엔 최저임금이 없다
-모든 저술에서 시종일관 복지를 강조하더라. 장하준은 복지 만능주의자인가.
“팬데믹 거치며 GDP 대비 복지 지출이 15%까지 늘었지만 OECD 평균인 21%엔 미치지 못한다. 복지에 인색한 미국도 최근 23%로 급증했다. 이걸 늘리지 않으면 사회가 어려워진다. 재기 기회도 없고, 노동시장도 불안해지고. 복지를 잘하면 비정규직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우리나라 임시 계약직 비율이 28.3%로 OECD 1위다. 근데 네덜란드가 27.4%로 우리만큼 높은데도 거기선 비정규직이 문제 되지 않는다. 복지가 받쳐줘서 실직하더라도 굶어 죽지 않으니까.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위해서라도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
-증세를 해야 한다는 뜻인가.
“오른쪽 주머니는 나 혼자 쓰고 왼쪽 주머니는 같이 쓰는 돈이라고 하자. 복지는 오른쪽 주머니 돈을 왼쪽으로 옮겨서 교육 보험, 노후 보험 같은 걸 공동 구매하자는 거다. 조세는 부담이 아니다. 우리가 제공받는 공공 서비스에 대한 구독료지. 세금 낮은 게 좋으면 왜 전 세계 부자들과 기업들이 소득세율 10%, 법인세율 10%인 파라과이로 가지 않나.”
-그래도 우리 국민은 한정된 재원을 필요한 사람한테 주는 선별적 복지를 선호한다.
“똑같이 세금 내고 급식을 먹는 게 아니다. 이건희 회장 손자는 돈을 더 내고 먹는 셈이다. 오히려 중산층은 세금은 낼 대로 내고 복지 혜택은 하나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저소득층을 이등시민 취급한다.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가 진정한 사회복지다.”
-저출생 문제는 수백조 복지예산을 들이고도 실패했다.
“출생률은 단순히 돈만의 문제가 아니다. 싱가포르는 국민소득이 우리 두 배인데도 출생률이 낮다. 스웨덴은 우리보다 소득도 높고 여성도 고학력이고 노동시장 참여율도 훨씬 높은데 출생률이 1.7명 안팎이다. 보육과 교육 환경이 살벌하지 않고, 성평등문화가 정착돼 경력단절 걱정이 없으며, 노동시간이 짧다. 우리나라 노동시간이 1년 1915시간으로 스웨덴보다 400여시간이 많다. 노동·교육·복지가 다 어우러진 전방위적 정책이 돼야 성공한다.”
-69시간 근무제가 논란이 됐다. 장기 휴가를 독려한다는 취지를 야당이 ‘69시간 일하라’로 왜곡한 측면이 있다.
“모든 제도는 형식상으로 괜찮은 것과 실제로 괜찮은 것이 다르다. 예를 들어 스웨덴엔 최저임금이 없다. 노조가 강하고 합리적인 그런 식의 부당한 고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조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여전히 상관들 눈치 보며 일하는 문화라 장기 휴가 같은 게 정부가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기업 특성에 따라 노동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해야지, 국가가 52시간으로 일괄 규정하는 게 말이 되나.
“윤 대통령도 말씀하셨지만 여러 연구에서 한 주에 60시간 이상 일하면 과로사 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한계를 정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운전 잘하는 사람은 시속 100킬로로 달려도 된다. 평균적으로 그게 안 되니 50킬로로 제한하는 거다. 유연성을 도입하고 싶다면 52시간이든 55시간이든 기준을 정해놓고 이러이런 경우엔 노동을 더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예외 규정을 두면 된다. 자동차로 치면 신차 시범을 위해서라거나 자동차 경주를 할 땐 250, 300킬로로도 달리지 않나. 그런데 거기 맞추기 위해 모든 길의 속도 제한을 250으로 만들면 사고가 난다는 얘기다.”
-법인세 등의 감세와 재정 긴축을 내세운 윤 정부 경제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감세를 통해 기업 활동을 진작한다는 건 학술적으로 근거가 없는 얘기다. 중요한 건 정부가 걷어가는 만큼 서비스를 제공하느냐 하는 문제다. 기업들은 이만큼 세금을 내니 이런 걸 개선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재정 긴축도 마찬가지다. 결국 복지, 교육 분야부터 줄일 텐데 저출생, 노인 빈곤, 자살률만 심해질 것이다.”
-1분에 1억씩 나랏빚이 늘고 있다지 않나.
“재정관료들의 지나친 강박이다. 한국은 보수적인 OECD도 적극 재정을 권장할 만큼 정부 재정이 건전한 나라다. GDP 대비 국가 부채가 40%대로 스웨덴, 덴마크와 큰 차이 안 난다. 케인스가 말했듯 정부가 돈을 쓰면 재정은 적자여도 경기는 회복되고, 세수가 늘 수 있다. 밖에서는 한국을 굉장히 멋있고 잘 사는 나라로 여기는데 우리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매우 낮다. 생산성을 높이되 노동시간을 줄이고, 공공 소비를 늘리는 방식으로 정책 방향을 바꿔야 한다.”
-미·중 반도체 싸움에서 대한민국은 어떻게 운신해야 할까.
“현재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과거 미국과 소련의 대립과는 완전히 다르다. 미국과 소련은 아주 몇가지 빼고는 서로 무역도 안하고 기술도 연결이 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미국과 중국은 허리에서 붙어 있는 샴쌍둥이와 같다. 미국에서 중국 소비재를 수입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 지난 30~40년간 공을 들여서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기업이 중국에 투자해 아이폰도 만들고 헤드폰도 만들고 운동화도 만들었는데 갑자기 그걸 어떻게 옮기나. 중국 또한 보유한 미국 국채만 13%라 관계를 절연할 수 없다. 다만 미국으로서는 군사 패권이 중요하니 초고급 반도체에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찍어 누르려는 거다.”
-결국 줄타기인가?
“어느 한쪽에 붙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중국은 우리나라 제1 무역 파트너이고, 미국은 군사동맹이자 제2의 경제파트너다. 일본은 GDP 대비 무역 의존도가 25% 안팎이라 수틀리면 중국과 안 놀아도 되지만, 60%가 넘는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나는 중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지만 현실이 이런데 한쪽에 치우쳐 버리면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된다. 결국 실리 외교로 풀어야 하지 않겠나. 중국에 가면 네가 최고라 하고, 미국 가면 네가 최고라 하고, 하하!”
☞장하준
1963년생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임용됐고, 2022년 SOAS 런던대로 옮겼다.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학자에게 주는 군나르 뮈르달 상, 경제학 지평을 넓힌 학자에게 주는 바실리 레온티예프 상을 최연소 수상했다. 전 세계 100만부 이상 팔린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비롯해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 17권의 책을 썼다. 과학철학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동생이다.
김윤덕 선임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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