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삶 자체가 현대사, 103세 김형석 교수가 찾아낸 ‘한국의 정신’

해암도 2023. 5. 5. 08:30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1일 오후 강원도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기증한 백자의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김형석 교수님 뵙고 나니 요즘 그분 건강이 어떤 것 같더냐”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조선일보의 새 기획 시리즈 ‘나의 현대사 보물’ 2회에 등장한 그를 제가 인터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활기 넘치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먼저 죽을지도 몰라요.”

 

김태길·안병욱 선생과 함께 한국의 1세대 철학자로 꼽히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1920년생으로 올해 만 103세입니다. 강원도 양구로 가서 그를 인터뷰하면서 절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100세 넘은 철학자의 인생은 그 자체로 역사, 현대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로부터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들은 사연과 동기동창 시인 윤동주 얘기들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한 인물이 역사가 됐고, 문화재가 됐고, 박물관이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령 정치적 입장이 그와 다른 사람이라도 이 점만큼은 존중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조선일보 2023년 4월 25일자 A18면 '나의 현대사 보물' 2회 김형석 교수 인터뷰.
 

“왜 강원도 양구에서 보자고 했느냐고요? 그러니까… 1960년대부터 30~40년 동안 나와 안병욱, 김태길 교수가 동년배로서 같은 철학 분야 길을 걸었죠. 그러면서 우리 정신문화를 위해 나름대로 역할을 했는데, 김태길 선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1990년대부턴 안병욱 교수와 둘이 활동을 했죠.”

“양구에 계신 분들이 우리 두 사람한테 그런 제의를 했어요. 모두 이북이 고향이신데 가까운 양구에 기념관을 짓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그래서 그렇게 됐죠. 양구 인문학박물관에 ‘안병욱 김형석 철학의 집’을 지었어요. 우리나라에 소설가나 음악가 기념관은 있어도 철학자 기념관은 없잖아요. 그리고 대체로 죽은 다음에 생기고 말이죠. 허허.”

 

“그게 인연이 돼서 양구에 있는 근현대사박물관에 내가 가지고 있던 도자기들을 기증했어요. 한 600점 될 거예요. 내가 도자기를 좋아한다니까 의외라는 분들이 많더군요. 서양철학자인데. 왜 그랬느냐 하면 말이죠.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회를 다녔고 서양철학을 공부했어요. 한국적인 것보다 서구적인 것의 영향을 더 받았죠. 어떻게 근대인(近代人)으로 서고 또 어떻게 현대인(現代人)이 되느냐가 나에겐 큰 과제였어요.”

“반면에 한국적인 것에 대해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1950년대부터 글 쓰고 책 쓰다 보니 그런 결핍이 더 크게 느껴졌어요. 사실 그건 일제 때부터 생긴 깨달음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동경(東京) 우에노 공원에 있는 도교도미술관 지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거기선 우리나라 국전(國展)에 해당하는 전시를 1년 내내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올라가 관람하게 되고, 또 전시하는 화가들이 식당에 내려와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주는 거예요.”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죠. 난 동양화는 잘 모르지만 이 그림들은 세계 어디에 내놓더라도 ‘일본화(日本畵)’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일본적인 특성이 느껴졌던 겁니다. 그럼 ‘한국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귀국해서 일부러 전시회장을 다니면서 우리나라 예술품을 관심 깊게 봤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아 물론 지금이야 그렇지 않습니다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회화가 대부분 중국의 전통을 벗어나는 도정(道程)에 있었어요. 잘 구별이 가지 않더란 말입니다.

 

좀더 한국적인 그림이 없나 찾아봤더니 문인화(文人畵)가 있었어요. 전통적 회화보다는 그게 훨씬 한국적이었죠. 그러나 민화(民畵)를 보니 아, 이건 완전히 한국적인 그림이더란 말입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는 그런 것 말이죠.”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1일 오후 강원도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기증한 백자의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그러다 도자기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도자기야 신라 때 이전 토기는 물론 한국적인 것이었죠. 고려 청자는 원래 중국에서 온 것인데 그걸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중국 청자는 대개 똑 같은 색깔이었는데 고려에 와서는 유약을 바르고 상감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죠. 이제 조선왕조에 들어서면 완전히 한국적인 것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백자(白磁)의 전통은 20세기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 말이 있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내가 이게 말이 되는지 좀 생각해 봤어요. 그럼 가장 일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고, 가장 에스키모적인 것이 세계적인가요? 뭔가 맞지 않는 말이죠.”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장 세계적인 것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라고요.”

“한국 도자기는 가장 인간적이라는 얘깁니다. 첫째, 가장 자연적이고, 둘째, 생활적이고, 셋째, 사람의 감정과 생활미(美)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갔더니 세계 도자기들이 다 모여 있는데 피부색만큼이나 서로 달랐습니다. 그중 소박하고 단순한 우리 도자기가 확 눈에 들어와요.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봤어요. 바로 인간미였어요. 아, 그래서 내가 우리 도자기를 사랑하게 됐구나, 이걸 깨달았죠.”

 

“백자를 보러 인사동 청계천을 무척 많이 다녔습니다. 1950년대만 해도 조선백자는 별로 비싸지 않았어요. 문화재로 쳐주지도 않았죠. 서민들이 쓰다가 버림받은 물건이었다고나 할까요. 이제는 당당한 문화재가 됐습니다. 백자를 만져보면 하나하나 촉감이 다 달라요. 마치 인생처럼 말이죠. 사발, 병, 항아리, 분청사기, 철화백자… 두드려 보면 소리도 다 다릅니다. 어떤 것은 며칠 동안 잘 때도 베개 근처에 두고 본 것도 있습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1일 오후 강원도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기증한 백자의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중국의 화폭이 아무리 커도 빈 자리가 없어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예술품엔 하늘과 바다와 빈 공간이 있죠. 샌프란시스코에서 골동품점을 하는 영국 부부가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중국 도자기는 중후하고 일본 도자기는 아기자기한데, 자기들은 60년 동안 도자기를 봤어도 단순하고 소박한 한국 도자기가 제일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일본 것은 재미는 있는데 정(情)이 없다고…”

 

“따지고 보면 셰익스피어나 도스토옙스키도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위대했던 겁니다.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가장 인간적인 보편성 속에서 한국적인 특수성을 창조하는 것을 보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제 나름대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깨닫고 나니 내 수필을 내가 봐도 도자기의 생활미 같은 것이 눈에 보이게 됐어요.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수필문학 작가가 첫째는 피천득 선생이고 그 다음이 나라고 들었습니다.”

 

“왜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에 기증했느냐고요? 골동품은 아는 사람에게 가야 보람이 있는 겁니다. 가족이라도 그 가치를 잘 모른다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의 김형석 교수 기증 백자들. /박상훈 기자
 

“지금도 낡은 국어대사전을 펴드는 이유는, 스물다섯 살 때 해방이 됐는데 그런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나는 일본어와 영어 문법은 공부했지만 한국어 문법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구나. 나는 우리말 어휘가 부족하구나. 그래서 지금도 모르는 어휘는, 말뜻이 확실하지 않은 단어는 절대 그냥 쓰지 않고 반드시 사전을 찾아봅니다. 내 숭실중 동창 윤동주는 절대 보지 못했을 이 사전을 소중하게 들춰봅니다. 그걸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