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해결사로 나선
임지순 포스텍 석학교수
조명이 꺼진 어둑한 복도에서도 물리학자 임지순(72)의 연구실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입구에 헝클어진 머리의 아인슈타인 사진이 담긴 높이 1m의 대형 액자가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 다른 아인슈타인이 보였다. 화학식과 수학 계산이 휘갈겨진 칠판, 논문 서류·전공 서적 더미가 쌓인 책상 사이로 1970년대 장발 스타일의 임지순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점심 먹고 잠깐 잡니다. 꿈에서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도는 모습을 보곤 탄소 화합물 벤젠의 구조를 밝혀낸 케쿨레처럼 자다가 횡재할 수도 있잖아요?” 세계적 석학은 낮잠의 명분도 아카데믹했다.
임지순은 1998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탄소나노튜브 연구로 노벨상급 과학자로 떠오른 스타 교수다. 경기고 전교 1등, 대입 예비고사 전국 1등, 서울대 본고사 전체 수석 ‘3관왕’으로 학창 시절부터 천재로 불린 인물. 학자가 된 뒤엔 더 넘사벽이다. 서울대 교수 임용 10년 만인 1996년, 40대에 학교에 5명만 있는 석좌교수가 됐다. 2011년엔 한탄 바이러스를 발견한 고(故) 이호왕 박사, 뇌과학자 신희섭 박사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로 세계 최대 학술단체인 미국과학학술원(NAS) 외국인 종신회원에 추대됐다.
NAS에 이름을 올린 한국 물리학자는 임지순이 유일하다. 자신의 논문을 타인이 인용하는 피인용 논문 횟수도 4300회가 넘어 노벨상 수상자들의 평균(5000건)에 근접하고 있다. 2016년엔 정년퇴직(65세)을 6개월 앞두고 포스텍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이 들어도 은퇴 걱정 없이 연구를 이어가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는 현재 포스텍 교수 중에서도 성과가 뛰어난 이들에게 부여하는 석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색 도전으로도 화제가 됐다. 정확히 2년 전, 2021년 지구의 날(4월 22일) 일론 머스크가 총상금 1억달러(약 1300억원)를 내걸고 시작한 4년짜리 장기 프로젝트 대회 ‘엑스프라이즈’에 지원서를 낸 것. 과제는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 문제를 해결하라’였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이나 2030이 주축이 된 젊은 공학자들이 주로 경쟁하는 이 링에 고희(古稀)의 나이에 실패할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온 셈이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올해 삼성 호암상 물리수학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임지순을 최근 서울에서 만났다. 문을 두드리자 낮잠에서 깬 그는 생수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믹스 커피를 탄 다음 후후 불면서 마셨다. “머스크 덕분에 오랜만에 흥미로운 연구도 하고, 신문에 얼굴도 나오겠네요. 하하.”
◇“과학자 100명보다 머스크 1명이 더 낫다”
-이론 물리학자가 기후변화 해결에 나선 게 놀랍다.
“자연과학을 하다 보니 일반인들이 체감할 일상 속 연구를 할 기회가 없었지만, 엑스프라이즈는 전공과 나이를 불문하고 지원할 수 있어 도전했다.”
-은퇴를 앞둔 나이인데.
“이 나이에 새로운 일을 벌이다니, 주책인 건 분명하다. 기후변화 연구팀은 나를 포함해 대학 교수가 6명인데 나 말고는 다 새파란 50대 이하다.(웃음)”
-어떤 기술을 개발 중인가.
“대기 중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가스를 포집하는 장비를 만들고 있다. 머스크는 1년에 1000t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인체에 무해하고 생산 비용이 저렴하면서 포집 성능이 좋은 신물질을 개발했다. 다른 팀과 차별점은 탄소를 모으기 위해 흔히 쓰는 질소 화합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질소는 산화가 되면 미세 먼지를 일으키는 주범이 되기 때문이다. 올해 국내에 포집 장비를 설치할 계획이다.”
기후변화 엑스프라이즈 대회는 세계에서 5000여 팀이 지원했다. 예선 심사를 거쳐 현재 임지순 교수 팀을 비롯해 287팀이 본선에 올라 있다. 최종 결과는 2년 뒤인 오는 2025년 지구의날에 발표된다. 1위에 5000만달러(약 660억원), 2~4위에 1000만달러(약 130억원)씩 준다. 노벨상뿐 아니라 월드컵 등 메이저 스포츠 대회 우승 상금보다 큰 규모다.
-성과는 나오고 있는지.
“일론 머스크가 지난해 9월 중간 점검에서 상위 15팀을 선정했는데 아쉽게 그 안에 들지는 못했다. 우리보다 오랫동안 온실가스 감축 연구를 한 미국, 유럽의 스타트업과 대학 연구팀이 워낙 쟁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승산이 있을까.
“이게 끝은 아니다. 조직위가 참가팀 모두에게 ‘단순한 중간 점검일 뿐 최종 심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얼마든지 역전을 노려볼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에게 환경 분야는 생소하지 않나.
“물리학자로서 내 업적은 전산고체물리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일이다. 특정 물질끼리 섞으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구조로 나오는지 물리적으로 예상하는 게 연구 분야인데 쉽게 말해 ‘신소재 설계사’다. 옷이나 자동차를 만들 때 시안대로 다 만들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떤 화합물이 안정적으로 만들어지는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빠르게 알아내는 기술이다. 내 전공 분야를 살려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신물질을 만든 것이라 자신 있다.”
-탄소나노튜브에 이산화탄소, 모두 탄소와 관련된 연구들이다.
“탄소는 많은 물질에 기본으로 들어가는 원소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재밌는 포인트다. 하하.”
-거액의 상금이 탐났나.
“내가 가진 나노 분야 지식을 사회 공헌에 쓸 수 있다는 점이 큰 동기였다. 학창 시절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학창 시절 시위를 자주 했던데.
“고3 때는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하다가 정학을 맞았고, 서울대 들어가서도 물리 책보다 사회과학 책을 더 많이 봤다. 1989년에 뜻을 함께하는 선후배들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을 출범시켰다. 겪어 보니 사람들과 자주 부대껴야 하는 사회 운동보다는 조용히 연구하는 게 내 천성이더라. 경실련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대회를 주최한 머스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나 같은 동아시아 변방의 70대 교수에게 동기를 부여해 연구에 뛰어들게 했으니까. 세계 최고 부호인 머스크는 1억달러라는 ‘푼돈’으로 전 세계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두 모은 셈이다. 그 속에서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세상을 바꾸는 건 정치인도 선동가도 아니고 머스크 같은 혁신가다. 때로는 나 같은 과학자 100명보다 좋은 질문과 길을 제시하는 혁신가 1명이 더 필요하다.”
◇“내가 천재? 진짜 천재 따로 있더라”
-원조 엄친아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입시 3관왕을 했다는 것 때문에 매번 인터뷰 기사에 나오지만 하나 정정할 게 있다. 내가 학창 시절 3관왕을 했지만 대학 졸업할 때는 수석이 아니었다.(웃음)”
-천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나도 한국에서 공부 꽤 했지만 미국에 가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벨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던 시절, 카이스트 총장을 지낸 로버트 러플린을 알게 됐다. 나보다 4~5년 선배인데 그 사람을 보며 ‘천재란 이런 사람이구나’를 절감했다.”
-무엇이 달랐나.
“러플린은 전기 저항에 대한 실험을 하다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자 기하학이라는 생뚱맞은 수학 개념을 적용해 문제를 해결했다. 처음엔 ‘뭐 저런 발상을 할까’ 속으로 무시했는데 그게 통했고 러플린은 나중에 그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다. 미국에는 러플린이나 머스크처럼 비상한 천재가 많다.”
-우리도 창의성 교육을 강조하는데.
“나를 포함해 한국 사람들은 혁신적인 걸 한다면서 교과서에 있는 내용인지부터 확인한다. 미국에서 만난 천재들은 책에 써져 있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엉뚱한 답을 내놓고 남들이 뭐라고 하건 밀고 나간다. 어릴 때부터 마음대로 생각하고 발표하게 하는 자유로운 교육 풍토 덕분인 것 같다. 한국 학교에선 답이 정해진 문제를 주고 벗어난 풀이를 하면 틀렸다고 혼내니까 이런 역발상의 기회마저 봉쇄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입시 구조가 바뀌어야 하는데 나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라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학부모, 교육 관계자가 많이 얽혀 있으니까. 연구계 문제도 심각하다.”
-어느 정도인가.
“한국 대학에선 기존 연구를 조금 개량하는 단기 연구가 대부분이다. 그래야 인정받는다. ‘이렇게 하니 성능이 10% 좋아졌다’는 식이다. 그런데 혁신적 연구는 수치화가 어렵다. 성공할 확률이 50% 이상인 혁신 연구라고 주장하는 것도 뒤집어 말하자면 별로 혁신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첫 시도로 어떻게 성공률을 알 수 있겠나.”
◇과학자도 전문직... “이공계 시대 다시 온다”
4월은 과학의 달, 4월 21일은 과학의날이다. 어린이들이 과학자의 꿈을 키우도록 전국에서 다양한 과학 체험이 열린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과학자를 장래 희망으로 꼽는 학생은 줄고 있다. 이공계의 위기다.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이 거의 안 보인다.
“1960·70년대에는 유튜브 같은 플랫폼도 없으니 과학자가 뭐 하는 직업인지 몰랐지만 멋져 보여서 많은 학생이 장래 희망으로 꼽았다. 인류가 달에 착륙하기 전이었는데도 우주비행사가 되겠다고 한 친구들도 있었다. 반면 요즘 부모들은 너무 현실적이라 자녀들에게 의사 해라, 변호사 해라 주입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실제로 공부 잘하는 학생은 의대나 로스쿨에 간다.
“어린 학생들을 만나면 과학자를 꿈꿔 보라고 말한다. 다시 이공계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인공지능(AI), 스마트폰, 멀티버스처럼 요즘 각광받는 분야는 모두 첨단 테크다. 지금은 한국도 연구자 처우가 좋은 편이고, 전공을 살려 창업을 하든, 특허 제품을 개발하든 가치를 창출할 길이 많다. 나 같은 노인도 물리학 공부하며 쌓은 지식으로 기후변화 막겠다고 겁 없이 나서고 있지 않은가. 과학자도 충분히 인생을 걸어볼 만한 전문직이다. 내가 평생을 하면서 얻은 결론이니 믿어도 좋다.(웃음)”
-과학자는 멋진 직업이라고 늘 강조했는데.
“교수라고 해서 꼭 청빈하고 검소한 이미지를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00년대 중반 국가 석학에 선정될 즈음엔 일부러 고급 세단을 타고 외국에 갈 땐 비즈니스석을 탔다. 내가 잘나가는 것처럼 보여야 후배 과학도들도 ‘나도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한국 물리학자 중 미과학한림원(NAS)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는데.
“직함이나 감투에 크게 신경을 안 쓰지만 NAS 입회는 남다르다. NAS에는 ‘더 북’이라고 부르는 회원 입회록이 있다. 1963년부터 지금까지도 매년 신입 회원이 서명할 만큼 무지막지하게 큰 책인데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서명도 있다. 입회식날 책에 사인하면서 협회 사람에게 ‘스티브 호킹은 어디에 서명했냐’고 물어봤는데 펼쳐서 보여주더라.”
-왜 호킹의 서명이 궁금했나.
“손을 못 움직였기 때문에 어떻게 서명했는지 너무 궁금했다. 호킹이 몇 개 지점을 찍어주면 옆사람이 그 점을 따라 선을 긋는 식으로 대신 사인했다고 하더라. 아마 눈으로 포인트를 찍었을 것이다.”
◇과학보다 괴담이 통하는 사회
임지순은 과거 미국산 쇠고기 파동, 천안함 사건 등 대형 사태가 터질 때마다 언론 인터뷰에서 ‘과학적 팩트에 기반해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는 괴담이 더 파괴력이 있다.
“우리는 근대 과학을 받아들인 역사가 짧아서인지 팩트에 기반해 판단하는 문화가 약하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 당시 내 가족, 자녀들에게도 국산이든 미국산이든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걸 설명했지만 워낙 광우병 광풍이 불던 때라 가족들도 잘 믿지 않더라. 천안함 사건도 그랬잖은가.”
-그때 이후로 우리 사회는 나아졌나.
“아직도 괴담을 맹신하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지난 정부가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근거 없는 주장으로 사회를 망가뜨리는 걸 보지 않았나. 어떤 문제가 터질 때 뉴트럴(중립적)한 해당 분야 전문가를 모셔 조사하게 하고 결과가 나오면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임지순은 과학자로 많은 상을 받았지만 호암상에 기대가 크다고 했다. 함께 상을 받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때문이었다. “아내가 조성진씨의 광팬입니다. 호암상 받는다고 하니 내가 선정된 사실보다 시상식에서 조성진을 만나 사진 찍을 생각에 더 들떠 있더라고요. 뭐, 아무튼 연구 잘해서 이런 호사를 누리니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하!”
최인준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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