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한줄명상]
“모든 것이 완전하다!”
#풍경1
스위스 로잔에는 법계사라는
법당이 있습니다.
그 절을 세운 이가
무진(無盡ㆍ73) 스님입니다.
푸른 눈을 가진
비구니 스님입니다.
무진 스님의 아버지는
영국 사람입니다.
저명한 식물학자이자
대학교수였습니다.
무진 스님의 어머니는
캐나다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진 스님의 국적은
영국과 캐나다입니다.
그런데도 무진 스님의 한국 사랑,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 불교에 대한 사랑은
참 대단하고,
또 각별합니다.
한국 불교의 무엇이
그를 그토록 매료시켰던 걸까요.
#풍경2
어린 시절, 무진 스님은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식물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ㆍ이라크ㆍ스위스ㆍ나이지리아ㆍ영국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글로벌 안목’을 익힌 셈입니다.
무진 스님의 국적은 영국과 캐나다이다. [중앙포토]
그는 스위스 제네바 대학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
그의 지도교수는
장 피아제(1896~1980)입니다.
‘아동의 인지발달이론’을 만든
세계적인 심리학자입니다.
피아제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무진 스님은 심리학 학사와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당시 파티에서 우연히
인도의 요가 수행자를 만났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심리학을 전공한 무진 스님은
‘마음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불교를 접한 건
학위를 마치고 싱가포르에 살 때였습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근처의 절에서 불교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불교는 ‘자유인’이 되는 길이구나.
그 길로 스리랑카로 가서
머리 깎고 출가를 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7세였습니다.
#풍경3
무진 스님의 부모는
따로 종교가 없었습니다.
스물일곱 살 딸이
스리랑카로 가서
느닷없이 출가를 하자
무척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심지어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인데 머리도 깎아야 하고,
옷 색깔도 마음에 안 든다.
이왕이면 좀 더 멋진
종교를 가지지 그러느냐.”
스리랑카의 출가자는
머리를 깎고
얇은 황색 가사를
어깨와 몸에 두를 뿐이니까요.
불교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의 눈에는
남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무진 스님은
스리랑카와 인도의 사원을 오가며
10년을 보냈습니다.
거기서 사마타와 위파사나 등
남방불교식 불교 수행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스리랑카에서
한국 스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성철 스님의 상좌인
원명 스님입니다.
무진은 원명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한국 불교는 무엇입니까?”
원명 스님이 영어로 답했습니다.
“Everything is perfect!
(모든 것이 완전하다)
그 말을 듣고
무진 스님은 ‘쇼크’를 받았습니다.
왜냐고요?
남방 불교에서는 ‘고(苦)’를
강조하거든요.
인간의 삶과 이 세상을
‘고해(苦海ㆍ고통의 바다)’라고
표현하니까요.
무진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방 불교는 무겁습니다.
‘모든 것은 고통이다.
Everything is suffering을
늘 되뇌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선(禪)불교는
그걸 훌쩍 뛰어넘더군요.
논리적인 접근을 뛰어넘는 겁니다.
칼로 우리의 ’생각‘을
단칼에 쳐버리는 겁니다.
논리로 접근하는 한,
우리는 고통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마침내 그는 스리랑카에서
한국으로 왔고,
성철 스님을 찾아가
‘마삼근(麻三斤)’이라는 화두를
받았습니다.
2년 후에는 석남사 인홍 스님에게서
비구니계를 받고,
한국의 선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무진(無盡)’이란 법명의
한국 스님이 된 겁니다.
성철 스님은 푸른 눈의 비구니인 무진 스님에게 '마삼근'이란 화두를 주었다. [중앙포토]
#풍경4
중국 호북성(湖北省)의 양주는
삼(麻)이 많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당나라 때 양주는 특산물인 삼을
나라에 세금으로 바쳤을 정도입니다.
당시 성인 남자 한 명이 바쳐야 할
최소한의 세금이 삼 세 근이었습니다.
동산(910~980) 선사가 양주의 동산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
동산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이 말을 듣고 동산 선사가 답했습니다.
“마삼근(麻三斤)이다!”
불가(佛家)에서 아주 유명한 화두인
‘마삼근’에 얽힌 선문답 일화입니다.
왜 ‘마삼근’이냐고요?
양주의 남자들이 내야 했던
삼 세 근의 세금,
그 부역의 의무는 각자의 몫입니다.
누구도 대신 내주지는 않습니다.
부처를 찾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산 넘고 물 건너
세상 어딘가로 가서 부처를 찾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부처를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처를 찾는 길도 내 안에 있고,
부처를 찾아가는 지도도 내 안에 있고,
부처를 찾아가는 사람도 나 자신입니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나의 마음 안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의 마삼근입니다.
다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나만의 마삼근입니다.
무진 스님은 한국의 선방에서
‘마삼근’이란 화두에 담긴
깨달음의 방아쇠를 찾고,
또 찾았을 터입니다.
#풍경5
남방 불교에도 길이 있고,
북방 불교에도 길이 있습니다.
다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길 위에서 무엇을 강조하느냐는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무진 스님이 접한
스리랑카의 남방 불교는
첫 출발점으로 ‘고(苦)’를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언젠가 무너진다.
그러니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이다.
나의 삶은 고통이고,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하고,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
고통이 소멸한 상태인
열반을 성취하고자 한다.
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진 스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원명 스님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 겁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다.
Everything is perfect!”
무슨 뜻일까요?
이 세상이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온전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세상이
‘불국토(佛國土)’라는 겁니다.
그럼 나는 누구일까요.
지금 불국토에 살고 있는
나와 당신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부처입니다.
여기가 불국토라면
나는 부처가 되는 겁니다.
부처라야 불국토에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한국 불교는
“지금 여기가 불국토이고,
바로 당신이 부처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남방 불교의 논리에 익숙해져 있던
무진 스님이 ‘쇼크’를 받을 만하지요.
남방 불교와 북방 불교가
본질적으로 다르진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출발점의 풍경이 다릅니다.
남방 불교의 스님들이 인도의 붓다 열반지 쿠시나가르에서서 성지 순례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남방 불교는
고통의 출발선에서 벗어나
해탈의 종착점으로 가고자 합니다.
한국의 선불교는
출발점 자체가 이미 완전한데,
너의 착각으로 인해
그걸 모르고 있다.
천국에 살면서
그걸 지옥으로 알고 있으니
너의 착각을 바꾸면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불국토를 고해의 바다로
오해하는 일.
아, 이게 정말 나의 착각이구나!
이걸 깨닫는 게
불교의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선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바로 부처이고,
있는 그대로
여기가 불국토임을
깨달으라고 말합니다.
#풍경5
무진 스님은 어머니가 남긴 유산과
동생이 보태준 돈으로
스위스 로잔에 법당을 세웠습니다.
스위스에서 싱가포르를 오가며
싱가포르 교도소에서
‘마음공부’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한줄명상
그만큼 한국 불교를 알리는 일에
열심이지만,
무진 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 신자가 안 되면 어때요.
상관없습니다.
그냥 불교의 수행법이
사람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니까
함께하는 거죠.
기독교인이면 또 어때요.
인연 따라가는 겁니다.”
역시,
그렇습니다.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호의 한줄명상’은 매주 수요일 연재〉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2.07.20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살 하나로, 한 무리 죽일 수 있지" 큰 스님의 도발, 무슨 일 (0) | 2022.08.03 |
---|---|
"이럴 때 하느님이 기도 들어주십니다" 故정진석 추기경의 답 (0) | 2022.07.27 |
'천하의 잡놈'이 부처로 보일 때까지…45년간 무식하게 찾아간 곳 (0) | 2022.07.06 |
훈수 둘 때 훨씬 잘 보이는 까닭, 남의 바둑판엔 이게 없다 (0) | 2022.06.15 |
17명의 인문학 고수들이 말한다, 이게 바로 행복의 비밀 (0) | 2022.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