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기본 소득은 인간 존재에 대한 왜곡”
‘자본주의의 미래’ 저자 폴 콜리어의 한탄
“굉장했던 과거에서 이토록 악화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한국의 경제 개발 역사를 되짚던 개발 경제 석학 폴 콜리어(Paul collier·72) 옥스퍼드대 교수가 안타까운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개발도상국에서 수십년 만에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국가 한국이 현재는 불황에 시달리는 다른 국가처럼 ‘악몽(nightmare)’ 같은 시기를 겪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현행 자본주의의 실패’ 후폭풍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낮은 출산율, 청년 취업난, 포퓰리즘(대중영합) 정책의 득세, 커지는 빈부격차와 사회 갈등을 대표적인 실패의 증거로 꼽은 그는 이를 ‘자본주의가 궤도를 이탈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자본주의가 더 이상 대중을 빈곤에서 구해내지 못하는, 이른바 ‘고장 난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채택해 경제적 발전을 이뤄온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며 “짧은 기간 압축 성장을 해온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병폐가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 해서 콜리어 교수는 자본주의를 무찔러야 할 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다시 관리해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IMF와 세계은행, 하버드대, 파리정치대를 거쳤고 옥스퍼드대 블라바트닉 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빈곤의 경제학’ ‘자본주의의 미래’ 등 저서를 통해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의 빈곤 문제를 연구하며 ‘따뜻한 자본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런 공로로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포린폴리시가 선정하는 ‘세계의 사상가 100인’에 꼽히기도 했다. 지난 11월 TV조선이 개최한 글로벌리더스포럼에 참석했던 그를 최근 화상통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공동체 무너지자 자본주의 고장 나”
콜리어 교수는 자본주의의 실패는 곧 공동체의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가족과 기업, 국가 단위 모두 공동체보단 개인 쪽으로 중심이 쏠리며 자본주의가 고장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좌·우파 정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으며 이념주의자나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가 가세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게 콜리어 교수의 진단이다.
-저서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묘사한 실패 사례가 현 한국 상황과 매우 비슷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높은 청년 실업률, 현금 지원을 앞세운 포퓰리즘의 유행, 가족 붕괴로 인한 세계 최저 출산율 등입니다.
“맞습니다. 한국은 지난 70년 사이 가난을 벗어나 OECD 회원국으로 성장한 유일의 국가입니다. 역사적으로 사회가 뭉치고 단합해 함께 일하면서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참 역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얘기하신 그대로 한국은 심각한 방식으로 잘못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비극적입니다.”
그는 21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잘 작동할 수 있었던 건 시민들이 공유 정체성을 바탕으로 호혜적 의무를 발휘해 함께 생산성을 끌어올린 덕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과거 한국 사회는 매우 친(親)사회적(pro social)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북한이라는 큰 위협 아래에서도 사람들은 번영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갖고 상호 노력해 실용적 전략 아래 뭉쳤습니다. 단합했기 때문에 실수하더라도 실수에서 배워 계속 나아갈 수 있었죠.”
그는 “그러나 지금은 다른 이웃 국가들처럼 그저 악몽이 됐다”고 했다. “이전과 달리 굉장히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단기적으로, 또 이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사회는 마법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한 책임감을 갖춘 이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실용적으로 생각하는 이들 덕에 나아갑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개인주의적 성향 심화에 따른 자본주의의 후퇴는 한국이 단기간 압축 성장을 한 탓인가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내가 사는 영국, 미국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학력자와 나머지, 수도권 주민과 나머지, 고숙련 노동자와 나머지로 사람들이 갈라지고 있으며 이 ‘나머지’는 버려진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불행히도 한국 역시 어느 정도 성장한 뒤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실패로 발생한 ‘격차’를 줄이기 위해 과세 방식을 바꾸고 특정 계층에 대한 선별 복지를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또 학군 범위를 넓혀 목적에 따라 운영하는 공립 학교를 설립하자는 식의 구체적 대안도 제시한다. 정부는 실용주의와 함께 ‘사회적 모성주의’를 기반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무기로 ‘나를 따르라’는 식의 ‘사회적 가부장주의’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 소득은 인간 존재에 대한 왜곡”
한국 사회에서 최근 화두로 떠오른 ‘기본 소득’과 관련해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기본 소득은 전 국민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돈을 지급하는 일종의 ‘무상 월급’이다. 단기 실험을 한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정식 도입한 곳이 없어 타당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는다.
-기본 소득이 사회적 모성주의에 어울리는 정책인가요.
“전 기본 소득에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전체가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자들에게 재화가 이전돼야 합니다. 사회 어느 지점에서, 인생 어느 단계에서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줘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어린 아이 3명을 키우는 젊은 여성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는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일정 기간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런 때 이들에게 지원을 해야 합니다. 특정 계층, 혹은 전체 시민이 기본 소득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상당히 모욕적인 발상입니다.”
-어떤 점이 모욕적인가요.
“자신이 주도권을 갖고 사회의 앞날에 생산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줘야 하죠. 주체성(agency)을 잃게 되면 스스로 생계를 꾸리고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자존감도 사라집니다.”
콜리어 교수는 특히 “기본 소득은 인간을 단순 소비자로만 정의한다는 점에서 끔찍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생산 의욕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다. “사교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창의력을 가진 인간을 단순 소비자로만 대하는 건 존재 의미를 단순화시킵니다. 제가 기본 소득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기분을 좋게 해준답시고 ‘소비를 조금 더 해봐’라고 하는 행위는 인간 존재에 대한 희롱(travesty) 같은 것입니다.”
그는 저서에서 인간이 노동(생산)을 하는 건 단순히 돈을 버는 것 뿐 아니라 내면의 자아를 실현하는 행위라고 했다. 노동의 목적을 발견했을 때 자존감을 고양하고,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고장 난 자본주의’ 사회에선 경제적 형편이 좋은 일부만 목적 의식을 갖고 일한다. 바로 이 ‘목적을 갖고 일하느냐’의 격차가 커진 게 가장 중요한 실패라고 그는 강조했다. “기본 소득 제도는 인간을 공동의 목적에 기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순 소비자로 격하시킵니다.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을 존중하는 길입니다.”
-일각에선 기본 소득 제도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최소한의 삶(소비)을 가능케 해 경제가 원활해진다는 논리인데요.
“사람들이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게 해주는 것, 또한 살기 원하는 지역에 생산적인 고용을 회복시켜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그는 소득 불평등을 재분배로만 대처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복지 지출 비용이 늘 뿐 아니라 삶의 목적을 상실하는 핵심 결핍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논리다. 다른 이들에게 생산성을 의존하는 인간이 늘어날수록 격차는 돌이키기 어려워진다. 대신 그는 선별 복지를 강조했다. “특히 가족을 지원한다는 아이디어가 좋습니다. 육아하는 사람이 여자든 남자든 동등한 조항으로 지원을 강화한다면 결혼이란 제도가 예전보다 훨씬 협력적인 결합으로 받아들여질 겁니다. 공공 정책은 이런 데 쓰여야 합니다.”
◇“가상 화폐는 무가치…코로나도 도덕 의무가 중요”
그가 강조하는 노동을 통한 목적성 발견, 자존감 고양, 생산성 향상 등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가상 화폐다. 회사원이 가상 화폐 거래 앱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일해서 뭐하냐”는 얘기가 회식 자리의 안주가 된 지 오래다. 콜리어 교수는 “정말 억제돼야 할 비극”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가상 화폐가 노동의 가치를 위협하는 사회가 됐습니다.
“공공 정책이 ‘안 돼’라고 말해줘야 할 때입니다. 가상 화폐는 기술적으로 폰지 사기나 다름 없습니다. 대부분 초기 단계 투자자들이 가치 절상의 혜택을 받고 있지만, 실제론 근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거대한 양의 이산화탄소까지 발생시키죠. 터무니없이 지속 불가능하고 무가치합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거품이 터질 때까지 빠르게 돈을 벌 겁니다. 그리고 곧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겁니다. 100년 뒤, 누군가 도지 코인이든 뭐든 갖고 있을까요? 물론 아니죠.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튤립 붐이 일었던 것처럼 그저 나중에 역사책 한편에 실리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특히 10대에게 해악이 큽니다.”
집값 상승도 한국과 세계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꼽힌다. 콜리어 교수는 대도시의 자산 가치 상승분을 ‘집적 이득’이라 부르며 과세 제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업이나 여러 계층의 노동자가 대도시에 모임으로써 집단적으로 창출한 초과 이득을 토지주(건물주)와 고숙련 노동자들이 대부분 가져가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과세하는 게 윤리적이며 효율적인 분배라는 것이다. “내가 교수로 버는 돈에는 45% 정도 세금이 붙지만 내 런던 집의 가치 상승분에 대해선 세금이 없습니다. 나는 가치를 높이는 데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집 가진 사람들은 좋아할 얘기가 아닙니다.”
콜리어 교수가 ‘자본주의의 미래’를 발표한 건 2018년이다. 이후 지난해 1월 코로나가 팬데믹으로 발전하면서 전 세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코로나 디바이드’라는 현상이 일어나 빈부 격차가 심화하고 양극화의 범위는 국가 단위로 확장됐다.
-‘백신 자국 우선주의’ 같은 국가 이기주의 역시 자본주의 붕괴의 결과인가요.
“그렇습니다. 백신 생산 기술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교육 기관의 경우 모든 정보를 공유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지만, 아스트라제네카 등 기업들은 인센티브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백신이 모든 곳에 빨리 도착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집니다.”
콜리어 교수는 “그래서 공공 정책(국가)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가 기업에 돈을 지불해서라도 기술 공유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제 사회는 실용성을 실현하기보다 ‘보여주기’에 집중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이 백신을 실어 어디론가 보냈다? 그건 국제 관계 무대에서 잘 보이려고 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자본주의의 위기가 더 심화된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시해온 대안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팬데믹이 자본주의 실패를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광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회가 됐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대표적 개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코로나는 전보다 훨씬 양극화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반대 사례는 덴마크를 들 수 있습니다. 덴마크 정부는 ‘호혜 의무’를 내세워 국민들에게 ‘우리는 이 병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염성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모두가 서로를 보호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덕적 의무를 강조한 거죠. 그 결과 코로나를 비교적 잘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백신 접종의 필요성을 ‘과학 정보’로만 설명한 국가들 역시 백신 접종률 향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도덕이나 공동체 정신 외 ‘합리성’만 강조한 나머지 정부를 믿지 않는 많은 이들의 접종 거부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공동체 회복’이다. 자본주의의 치료를 위해서든 전염병 대응을 위해서든 다수가 공유하는 도덕적 의무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해법도 비슷했다. “명백히 고칠 수 있는 문제를 망쳐온 건 아쉽지만, 그저 예전처럼 고치면 되는 일입니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제공할 것이 많은, 멋지고 창의적인 나라입니다.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를 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에 그랬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이태동 기자 오명언 인턴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1.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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