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적혈구 수치가 아주 낮아요. 정상 범위의 3분의 1 수준이야.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인 셈이지. 언제 심장마비가 올지 몰라요. 그래도….”
이어령 교수와 오랜만의 인터뷰는 그렇게 힘겹게 성사됐다. 그가 아주 많이 아프다. 3년 전쯤 대장암 선고를 받고 점점 악화되더니 지난해 6월엔 복막으로 전이됐다. 선생은 항암 치료를 내내 거부하고 있다. 당신의 몸으로 쳐들어와버린 암세포와 공존하면서 생이 명멸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어 했다. 의연하고 품위 있게.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어령 교수는 우리 사회 곳곳에 굵직한 지문을 많이도 새겨왔다. 그 지문은 물리적·정신적 유산을 망라한다. 초대 문화부 장관,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괄기획위원 등을 역임하면서는 물리적 지문을, 언론사 논설위원, 대학교수, 문학비평가, 문명학자로서는 주로 정신적 유산을 남겨왔다.
나는 운 좋게도 그의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꽤 오래도록 들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는 교양과목 ‘한국인과 정보사회’ ‘한국문화의 뉴 패러다임’을, 대학원에서는 전공과목 ‘기호학의 이해’ 등을 수강했고, 언론인이 된 후에는 5년간 100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했다. 이 결과물은 《이어령, 80년 생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100시간의 인터뷰는 인터뷰라기보다 사사(師事)에 가까웠다. 세상을 보는 눈을 다시 배우는. 선생은 “나처럼 생각하면 누구나 나처럼 될 수 있다”며 80여 년 동안 해온 창조적 사고의 비밀을 털어놓았는데, 그가 펼쳐 보이는 말랑말랑한 생각들은 나에겐 단단한 죽비보다 매서웠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수시로 던지며 견고한 틀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자네는 자네로 살고 있나?”
“지금 하는 그 생각, 진짜 네 머리로 하는 것 맞아?”
“하루를 살아도 자기 머리로 살아야 해.”
“어제와 똑같은 삶은 용서할 수 없어. 관습적 삶을 반복하는 건 삶이 아니라네.”
나는 나로 서서히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전에는 몰랐다. 내가 나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내가 나로 살아 있는 느낌은, 말하자면 시대와 사회가 부여한 단단한 훈(訓)의 알껍질을 빠지직, 하고 깨고 나와야 가져보는 생생한 박동감이었다. 늘 보던 풀과 꽃, 새와 나무, 아이의 웃음과 노인의 걸음걸이에 그토록 다채로운 몸짓과 표정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념과 사상, 뉴스와 뜬소문을 넘어 존재하는 실체적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이 새롭게 보일 때마다 나는 종종 눈물이 났다. 감격과 후회, 감사와 환희가 뒤섞인 눈물이리라.
이어령 교수는 대화 도중 자주 쉬었다. 적혈구 수치가 떨어지면 혈액 내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 쉽게 피로감을 느끼고 숨이 찬다고 했다. 나는 한마디 한마디 마음을 졸이며 묻고, 들었다. 두 갈래의 마음이 부딪혔다. 한편에서는 아픈 선생을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깨달음의 언어를 하나라도 더 듣고 싶다는 욕심.
200호 특집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많이 감사드려요.
“내가 일찌감치 약속했잖아.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축하해줘야지.”
특집호 인터뷰의 주제가 ‘나다움을 묻다’입니다.
선생님은 늘 자기 머리로 사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지요.
나답게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건가요.
“한국말의 ‘답다’는 ‘다외다’라는 고어에서 왔어요. ‘되다’라는 뜻이지. 충담사의 〈안민가〉라는 작품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군(君)은 군이, 신(臣)은 신이, 민(民)은 민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국민은 국민다워야 한다는 뜻이지. 이건 뭐 옛날 얘기니까 신하의 역할과 개념이 지금과 많이 달랐지만 말이야. 군주라고 다 군주가 아니고, 신하라고 다 신하가 아니라는 거지. 마찬가지로 선생답다는 건 선생이 되는 것이에요.”
나답다는 건 결국 내가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나답다는 건 하나의 목표예요. ‘나다워’라는 건 현실이 아니라 ‘이런 내가 되고 싶어’라는 지향점이야. 꿈과 이상, 정체성을 가지고 내가 되어가는 존재, 그게 결국 인간이에요. 나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사람이고, 무언가가 되어가는 존재야.”
선생님이 언젠가 말씀하신 존재론과 생성론이 생각납니다.
“지금 하려는 얘기가 그 얘기예요. 먼저 문제 하나 낼까? 봄여름가을겨울은 있는 거예요, 되는 거예요?”
음… 헷갈립니다. ‘있는 것’ 아닐까요?
“어허~.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봄이 있어야지, 없지 않나. 봄이 되고 여름이 된다고 하지, 봄이 있고 여름이 있다고 해요? 아니지. 자네 답은 틀렸어. 봄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겨울이 되는 거지. 반면에 산과 강은 존재해. 늘 그곳에 있잖아. 정리하자면 ‘있다’는 존재론이고 ‘되다’는 생성론이야.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만들어진 것은 이미 ‘있는’ 거야. 다이아몬드도 제왕의 의자도 다 ‘존재’하는 것이지. 반면 변화하면서 무언가가 ‘되는’ 것은 생성론이야. 생성론을 떠올리니 저 유명한 서정주의 시 〈내가 돌이 되면〉이 생각나는군.
‘내가 돌이 되면 / 돌은 연꽃이 되고 / 연꽃은 호수가 되고 / 내가 호수가 되면 / 호수는 연꽃이 되고 / 연꽃은 돌이 되고’
자연 속에서 인간은 끝없이 변하는 존재라는 거지. 그러니까 뭔가가 된다는 건 변하는 것이지, 결정론이 아니야.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이 맥락이에요. 자기를 규정하지 않았으면 해요. ‘나는 김씨다, 아이큐가 몇이다. 어디 다닌다’ 식으로 명사형의 존재론으로 표현해버리면 미래가 없어. 대신 내가 뭔가가 된다는 생성론으로 생각하면 좋겠어요.”
나다움이라는 건 결국 존재론이 아닌 생성론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는군요.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구먼. 나를 이미 결정해놓으면 나다움이라는 건 없는 거야.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설정해놓고, 내가 되려고 하는 나가 곧 나야. 그게 곧 나다움이고. 나다움에는 죽을 때까지 도달할 수 없어요. 내가 나답다는 건,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데 ‘나’라는 절대를 만들어놓고 끝없이 도달하려 하고 ‘~다워’지려고 하는 것이지. 그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절대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어. 내가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절대적인 ‘나’에 자신을 비춰보면 전부 절망하고 포기하고 말지.”
끝끝내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끝없이 도전하는 존재라.
시시포스의 신화가 떠오르면서 한편으로는 애달프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끝없이 추구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자체가 안도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인간은 도전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 존재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평생 살아도 내가 될 수 없어. 나에 가까워지는 내가 있을 뿐. 어느 정도 가까워졌는가가 척도가 된다고 할 때, ‘근사하다’는 말만큼 멋진 찬사가 없지.”
그렇다면 선생님은 이어령다움, 혹은 이어령에 얼마나 근사하게 와 있는지요.
“내가 생각하는 이아무개다움(그는 자신을 이렇게 지칭한다)이란 끝없이 질문하는 존재야. 모르는 나, 호기심이 있는 나, 알고자 하는 나가 있을 뿐이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던 중 ‘하늘이 왜 검나요?’ 하고 훈장님께 따져 묻다가 쫓겨난 일화도 생각납니다.
“맞아.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어른들한테 구박도 많이 받고 혼났지. 혼나면서도 나는 그런 반응에 굴하지 않았어요. 지적 호기심이 워낙 커서 혼나는 걸 각오하면서도 그걸 꼭 물어봐야 했거든.”
요즘 선생님의 질문의 대상은 뭔가요.
“죽음이지. 죽음은 누구나 무서워해요. 죽음이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 그 죽음이 무서우면서도 나는 죽음에 대해 질문하고 있어요. ‘죽음이라는 게 대체 뭐지?’ ‘내가 암이라고?’ ‘암이 뭔데?’ 하면서 죽음이라는 대상에 대해 호기심을 품고 마지막으로 지적 탐험을 하고 있어요. 89세인 2021년에 내 책이 두 권 나왔잖아. 김민희 기자가 쓴 《이어령, 80년 생각》과 김지수 기자가 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이게 나예요. 나는 죽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어. 그게 이어령다움인 거지.”
참…. 의연하십니다.
“그런데 말이야, 자신이 없어. 죽음 앞에서 무너질까 봐. 이어령답지 않은 죽음을 맞이할까 봐…. 지금까지는 의연했는데 막상 죽음 앞에서 공포에 떨까 봐, 그게 불안해요.”
선생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한창 이어갔다. 많이 외롭다는 말도 했다. 여기에서 외로움은 그간의 외로움과는 맥락이 달랐다. 이제까지 이어령 교수가 피력해온 외로움은 천재의 외로움에 가깝다. 섬광같이 피어오른 발상을 현실화한 창조물들을 알아봐주고, 의미를 부여하고,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데서 연유한 외로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실체적 외로움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내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과연 사랑과 존경과 공감으로 맺어진 관계일까?”라는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리고 간혹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이들이 건네는 진심 어린 슬픔이 큰 위안이 된다고 했다.
자신이 없다니, 외롭다니, 무섭다니…. 그간 보아온 선생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런 선생이 낯설었다. 한편으로는 당혹감도 피어올랐다. 그 당혹감의 실체를 한참 동안 들여다봐야 했다. 그건 ‘이어령다움’이 깨질 것에 대한 염려였다. 내 세계에서 쌓아온 이어령다움은 의연함과 품위, 자존심과 명예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촛불처럼 팔락거리지 않고, 저 멀리 등대처럼 흔들리지 않고 내가, 우리가, 이웃이, 인류가 지향해야 할 시대의 가치를 제시하는 궁극의 어른이길 바랐다.
추상적 죽음이 아닌 물리적 죽음을 말하는 선생은 낯설었다. 존재론적 죽음이 아닌 실체적 죽음을 말하는 선생은 이제껏 못 보던 모습이었다. 나는 속상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질문의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선생은 궁극의 어른 모드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78억 지구인 중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면서 나다움을 지키라고 강조했지요.
나다움을 지키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그건 말이야, 벽돌담과 돌담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지. 벽돌은 부서지면 어때요? 똑같은 규격의 벽돌로 대체할 수 있지. 하지만 돌멩이는 달라. 아무리 찌그러진 돌이라도 이 세상에는 그것과 똑같은 게 없어요. 돌이 하나 없어지면 이 지구에서 그런 돌이 하나 사라지는 거야. 나답게 산다는 건 내가 늘 얘기하는 ‘온리 원’,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고 산다는 거예요. 남과 구별됨으로써 자기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지.”
문명의 속도전 한복판에서 헉헉거리다 보면 타인의 기준을 좇기 쉽습니다만.
“내가 나다워지려면 끝없이 너라는 대상, 즉 나 아닌 다른 대상을 생각하게 돼요.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래서 나다워진다는 건 이미 너를 의식한다는 거예요. 너를 알고 있어야 나답지, 너를 모르는데 어떻게 나다울 수 있겠어요. 남자다우려면 여자를 먼저 알아야 하지. 그래서 타인을 의식하는 건 나다운 삶을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한 부분이에요. 다만 자신만의 뭔가를 구축하려는 태도가 필요해요. 현실주의자가 아닌 구축주의자의 시선이 필요하지.”
구축주의라.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한테 각설탕을 줘봐요. 그걸 먹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가지고 노는 아이가 있지. 가지고 놀더라도 수직으로 쌓는 아이, 동그랗게 쌓는 아이 다 달라요. 각설탕 하나는 모양도 똑같고 맛도 똑같은데, 그걸 가지고 놀게 되면 전부 다른 모양의 각설탕 레고가 탄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식주와 돈, 권력을 추구하는 건 ‘그’다운 게 아니야. 누구나 다 돈 좋아하고 권세 좋아하고 뻐기고 싶어 하니까. 나답게 사는 사람은 각설탕을 먹지 않아요. 그걸로 구축해나가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모양으로 쌓아가는 거예요. 구축주의는 리얼리즘이 아니야. 리얼리즘 세계에서는 똑같아. 배고프면 도둑질하고, 약자를 보면 강자가 지배하려 들지.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는 살기 위해 같은 짓을 하지만, 평화로운 시대에는 그렇지 않아요. 각자가 다 다른 삶의 양태를 가지게 되지. 그러니까 현실주의 시선으로 보느냐, 구축주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역사 기술이 달라져요.”
점점 우리 사회가 선진화되고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나다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될까요?
“물론 많아지지.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서는 똑같아. 비상시국이니 행동들이 엇비슷하지. 내가 살기 위해 또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 쓰고, 백신 주사 맞고, 정해진 인원만 만나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 사회가 되고, 거리두기를 하고. 각자의 나다움을 추구하기 힘들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나다움과 나이와의 상관관계는요?
나이 들수록 자기다움에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는지요.
“의식적으로 나다워지는 건 없어요. 걸음걸이만 봐도 그렇지. 똑같이 걷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 먼 데서 다가와도 걸음걸이만으로 누구인지 식별할 수 있지. 그걸 그 사람이 의식하고 걸어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손은 이렇게 흔들면서’ 식으로? 아니잖아. 무의식적으로 걷는 거예요. 무의식 속에 자기가 드러나는 것이지. 그러니까 나답다는 것도 의식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나다워지지 않아. 그저 일상생활에서 끝없이 꿈꾸고 실천하고 부딪히면서 나다워지는 것이지. 그래서 사막에 있는 선인장은 사막에 있어야 선인장다워지는 거예요. 그걸 정원에 가져와서 물을 줘봐. 다 죽잖아. 선인장의 선인장다움은 뜨거운 사막에서 사는 거야. 남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해도 그게 그에게는 행복인 게야. 그러니까 두려울 게 없지. 나다움의 세계는 나만의 세계예요. 남들이 어떻게 보든 자기만의 최적의 세계. 권력 욕심 없는 사람을 왕 시켜봐. 그처럼 불행한 일이 없어요.”
한국인과의 상관관계도 궁금합니다.
한국인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힘이 약한 편인가요?
“그렇지 않아. 한국 사람이 의심이 많잖아. 한국 환자들처럼 의사 말 안 듣는 사람도 드물다고 하지. 무조건 의심하고 보는 게 한국인이야. 개성이 강하고 각자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민족이야. 모든 면에는 장단점이 있듯,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우선 단점부터 보자고. 한국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잘 안 따라요. 그래서 팔로워십이 약하지. 우리가 지금 나다워져라, 온리 원이 되라고 하는 것도 팔로워십 가르치는 게 아니야. 개인주의를 가르치는 것이지. 하지만 장점도 많아요. 각자가 자기의 개성을 지키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처럼 사는 게 옳은 것이기 때문에 세계인을 사로잡은 BTS(방탄소년단)도 나오고, 글로벌 군무가 된 싸이의 말춤도 나온 거예요. 결국 이런 개성과 나다움이 우리 사회의 발전 요인이 된 것이지. 한국인의 약점이라고 생각한 것이 긍정적으로 발현한 거예요.”
오늘 또 하나의 한국인의 긍정 DNA를 읽어냈군요.
“그 서로 다름의 개성으로 우리는 아름다운 돌담을 쌓아야 해요. 시골의 돌담을 봐요. 하나가 쏙 나왔으면 다른 하나가 쑥 들어가서 서로 맞물리며 튼튼한 구조를 이루잖아. 똑같은 벽돌로 쌓으면 벽돌담밖에 안 돼요. 러시아나 중국처럼 전체주의로 흐르는 것이지. 내가 나다워야, 개성이 있어야, 차이가 있어야 우리는 똑같은 벽돌로 쌓은 벽돌담이 아니라 서로의 개성과 개성이 어우러져서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돌담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각자의 나다움을 인정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한국식 커뮤니티를 완성할 수 있어요.”
들쭉날쭉한 돌들이 맞물린 시골의 낮은 돌담을 떠올리며 ‘이어령다움’을 생각해본다. 죽음 앞에서 죽음을 질문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육체의 고통 앞에서도 인간의 고매함을 끝끝내 지켜내고자 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 삶의 경지를 언어라는 존재의 집에 가두기엔 한없이 좁으리라. 다만 이것만은 알 것 같다. 가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 눈빛의 의미. 그것은 거대한 난해함 앞에 선 절망이 아니었다. 한없는 호기심으로 아이처럼 빛나는 영롱함이었다. “내 삶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삶이었어”라던 선생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김선아 http://topclass.chosun.com 2022년 01월호
2021,12,27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