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젊다 여겨 머뭇거렸던 유서 쓰려다
“사망 시 1억” 보험부터 하나 더 들었네
오늘에야 겨우 용기 내 마지막 말 남기려네
“여보, 일단 집은 팔지 마시오
與 이기면 10억은 뛸 테니 종부세 준비하오”
“아들아, 노트북과 블로그를 네게 주마
막장경제 시신정치 썩은 586, 네가 멸해다오”
난생처음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을 때도, 그저 생각에만 머물렀을 뿐이다. 유서를 써야겠다는 것이 말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유서는 꼭 죽기 직전에 써야만 하는 게 아니라며, 홀로 앉아 담담히 마지막 말들을 준비하며, 때론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삶에 대한 연민과 주지 못한 마음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죽음이 삶을 일깨운다는 역설 앞에서 나는 아직 젊다는 이유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의 유서는 결국 훗날을 기약하게 된다.
다시 유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다름 아닌 사고로 목숨을 잃은 입사 동기의 비보를 접한 뒤였다. 나는 남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했고 그 뒤에 가린 나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쓰지 못한 유서를 떠올렸을 때, 이젠 정말 써야 할 때가 온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책상 앞에 앉아 종이와 펜을 꺼내 드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 아닌가. ‘무슨 말을 남길 것인가’ 하는 나의 고뇌가 ‘무엇을, 얼마만큼 남길 것인가’라는 번잡한 상념으로 변한 것이다.
결국 펜을 집어던진 나는 그 길로 보험을 하나 더 가입하고 만다. 보장된 죽음이 남은 삶을 지켜줄 거라는 정설이 보험 약관에 담겨 있었다. 사마천이 환생한들 보험 약관을 능가하는 명문을 쓸 수 있을까? 어느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느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던 그의 말을 기억한다. 사망 시 1억원이라는 글귀에 탄복한 나는 어느새 태산같이 무거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유서는 결국 쓰지 못했다.
이제 오늘, 겨우 용기 내 자리에 앉은 나는 내 마지막 말을 이곳에 남긴다. 이유는 별거 없다. 지난 4회에 걸친 조선일보 칼럼과 출간 작업을 위해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나다. 게다가 풀리지 않는 글을 위해 많은 알코올과 카페인을 습관적으로 섭취해왔으니 심혈관계가 비로소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나는 나의 얄팍하고 가녀린 혈관들로 이 모든 화학물질에 맞설 재간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새롭게 추가한 심혈관 질환 보험과 더불어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이곳에 유서를 남긴다. 이 또한 사망 시 1억원이니, 나의 유서는 그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날아올라 무겁게 이 지면으로 내려앉으리.
/일러스트=이철원
여보. 이 유서는 200자 원고지 14장으로 한정이 돼 있으니 나는 바로 말하겠소. 일단 집은 팔지 마시오.
내가 항상 당신에게 말해왔던 부동산 매매의 원칙이 있소. 진보 정권 때는 집값이 오르고 보수 정권 때는 집값이 내린다는 부동산 투자 제1의 법칙이오. 그러니 당신은 이번 대선의 추이를 잘 지켜보다가 민주당의 승리가 확실시되면 보유로 가닥을 잡고, 야당이 승리하는 순간 정확히 1년 6개월 후 매도 일자를 잡으시오. 더 싼값에, 더 좋은 지역으로 이사할 수 있는 기회이니 내 말을 꼭 명심하시오.
아 참,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나 민주당의 박용진이라는 양반이 당선되거든 마찬가지로 집을 파시오. 그 양반은 그나마 제정신에 가까운 사람이오. 그러나 만일 민주당의 다른 유력 주자가 당선되거든 당장 가서 벤츠 AMG GT 라인을 한 대 계약해도 좋소. 그의 주택 정책을 보아하니, 집값이 지금보다 10억은 더 뛸 것이니 마땅히 종부세를 준비하고 양도세 비과세에 대비하시오.
그리고 아들아. 네가 이 글을 보게 되었을 때 이미 나는 진공 유골함 속 분말이 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가 슬퍼할 겨를이 없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죽거든 가장 먼저 네 어머니에게 달려가 내 노트북을 건네받아라. 그리고 내 블로그의 아이디와 비번 역시 함께 인계받거라. 네가 곧 진인 조은산이다.
이제 나는 너에게 진보와 보수로 갈린 이 시대의 극명한 정치 현실을 물려줘야 하는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죄스럽고 비통하다. 그러나 네가 알아야 할 건, 모든 사물의 이치가 그렇듯 음양이 공존하고 천지가 마주하며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것처럼, 이 나라의 진보와 보수 역시 개처럼 싸우면서도 함께 굴러가며 부대끼는 공존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아. 진보와 보수로 맞물린 상생의 톱니바퀴, 그사이에 끼어든 썩은 나무토막에 불과한 저 586 운동권 세력을 너는 나를 대신해 멸해다오. 민주화 운동에 기생해 사회주의 사상을 실현하려는 저들은 진보도 아니고 뭣도 아닌, 된장에 스며든 똥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포털 뉴스 사회 코너에서 ‘전태일과 귀족 노조’를, 경제에서 ‘이명박과 문재인의 집값’을, 외교에서 ‘평양냉면과 영변 핵 시설 재가동’을, 정치에서 ‘노무현 정신과 민주당’을 검색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니, 너는 나를 대신해 시장경제가 아닌 막장 경제로, 시민 정치가 아닌 시신 정치로 이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저들을 반드시 멸해다오. 맑시즘에 물든 저들의 붉은 뇌수가 맑은 시즙이 되어 흘러내렸을 때, 진보의 가치는 비로소 진일보하게 될 테니.
마지막으로 아들아. 자기 전에 양치 꼭 위아래 백 번씩하고 길 건널 때 꼭 차 잘 살필 것이며, 네 엄마 잘 챙기거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네 아비는 참이슬 오리지널로 내장을 축이고 있음이 부끄럽다. 이게 내 마지막 말들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까지 썼을 때, 문자 한 통이 알림음을 토하며 휴대폰에 현출됐고 그것은 이번 달 대출 원리금이 무사히 입금됐다는 금융기관의 치하문이었다. 문득, 남은 상환 기간을 살피던 나는 27년 7개월이라는 까마득한 세월에 놀라 급히 홍삼 한 팩과 종합 비타민제를 한입에 쏟아 넣었으니 아, 내가 일으킨 건 대출이 아닌 삶에 대한 투지였던가.
하여 2021년 9월 3일 새벽, 대출마저 막힌 세상에 스스로 안도하며 진인 조은산이 이 유서를 쓰다.
논객 조은산·국민청원 '시무 7조' 필자 조선일보 입력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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