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뿌리 깊은 ‘K투기’

해암도 2021. 4. 25. 08:39

 

 

 

 

 

게티이미지뱅크·그래픽=김성규

 

 

1890년대 일본 미곡상들이 인천에 ‘미두 취인소(米豆取引所)’라는 쌀 선물거래소를 만들었다. 10% 보증금만으로 대량 매매가 가능해 ‘대박’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하루 거래량이 100만석을 웃돌면서 일본 선물시장을 추월했다. 하지만 조선인 투자자는 대부분 패가망신했다. 일본 선물가격을 기준가격으로 삼았는데, 일본 시세를 전보를 통해 미리 알아낸 일본인들이 시장을 농락했다. “논밭은 동양척식회사에 뺏기고, 조선인 돈은 미두(米豆) 바람에 다 날아간다”는 말이 떠돌았다.

 

▶100년 뒤 1996년에 문을 연 주식 선물 시장이 투기판 계보를 이어받는다. ‘압구정 미꾸라지' ‘목포 세발낙지' 별칭을 가진 고수들의 대박 성공담이 화제가 됐다. 2011년엔 하루 선물 거래액이 45조원대로 치솟으며 세계 1등이 됐다. 쪽박 사례가 빈발하며 사회문제가 되자 정부가 거래 보증금 기준을 올리는 등 시장 진입 장벽을 높이는 조치를 취했다.

 

 

▶손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국 개미들의 고수익 추구 성향은 여전하다. 4월 들어 국내 증시에선 코스피 지수 하락분의 2배 수익이 나도록 설계된 ‘코스피200지수 선물인버스2X’가 개인 순매수 1위 종목을 차지하고 있다. 올 1분기 중 서학 개미들은 미 증시의 대표적 투기 종목인 게임스톱, 이항홀딩스 주식을 각각 52억, 14억달러어치나 거래했다.

 

▶증시가 한동안 주춤거리자 개미들의 주 활동 무대가 가상 화폐 시장으로 옮아갔다. 국내 1위 가상 화폐 거래소의 하루 거래 규모(122억달러)는 미국 1위 거래소의 3배, 일본의 24배에 달한다. 거래 가상 화폐 수(178개)도 미국의 3배, 일본의 35배다. 4대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571개 가상 화폐 중 124개는 한국인이 만든 ‘김치 코인’이다. 가상 화폐 투자자가 511만명에 달하고 2030세대가 45%를 차지한다.

 

▶코인 광풍은 투자 행태에도 스며든 ‘빨리 빨리’ 문화와 기댈 곳을 잃은 2030세대의 슬픈 자화상이 뒤섞인 사회 병리이다. ‘더 큰 바보’를 기대하는, 폭탄 돌리기식 투기는 패가망신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워런 버핏은 투자 원칙으로 “첫째, 돈을 잃지 마라, 둘째, 첫째 원칙을 잊지 마라”고 조언한다.

 

그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은 “투자란 철저한 분석으로 원금을 보존하면서 만족할 만한 수익을 얻는 것이며,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모든 행위는 투기”라고 했다. 코인 광풍은 누가 봐도 악성 투기다. 세계 금융사에 ‘K투기’라는 신조어가 등장할까 겁난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     입력 2021.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