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그 똥은 얼마인가?

해암도 2021. 4. 9. 10:56

예술인양 무책임하게 부려진 똥
상처 치유는커녕 세상 오염시켜
“위선적 광신자, 작가 성공 못해”
벚꽃만큼만 위안 주는 예술이길

 

 

 

“상처를 치유한다”는 말은 미술계의 대표적 상투어다. 그러나 진정 상처를 치유하는 미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의술(醫術)로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방문한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나는 이 유구한 안타까움을 또 한번 확인해야 했다. 우여곡절 코로나 사태로 두 차례 연기됐다가 3년 만에 열린 전시, 영혼을 주제 삼아 치유와 회복의 장(場)을 표방했으나 그 의미를 해하는 엉뚱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 성조기에 똥을 그려넣고 불태우는 지극히 반미(反美)적인 그림이었다. 개막식에 앞서 초청자들을 몰고 다니던 어느 좌파 단체 인사는 이 그림 앞에서 “미국이 통일을 방해했다”며 “똥 같은 놈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치유 대신 상처를 벌리는 민중미술의 케케묵은 구태(舊態)가 2021년의 비엔날레를 장식하고 있었다.

 

누구나 똥을 싸지만 그것이 변기로 내려가면 별 탈이 없다. 그러나 포장돼 진열장에 오르는 순간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미술 담당 기자로 일하며 겪는 직업병도 이와 관련이 크다. 수준 미달의 공산품이 공허한 수사(修辭)를 등에 업고 신경을 자극할 때마다 극심한 울화가 몰려오는 까닭이다.

 

작가가 똥을 싸놔도 일부 평론가와 큐레이터 등이 각자의 꿍꿍이대로 맥락과 의미를 부여해 띄우니 상수도가 맑을 틈이 없다. 이를 비웃듯 이탈리아 전위예술가 피에로 만초니(1933~1963)는 자신의 똥을 통조림 깡통에 넣어 밀봉한 뒤 ‘예술가의 똥’이라는 제목을 달아 1961년 발표한 적이 있다. 갓 싼 따끈따끈한 대변을 30g씩 나눠 담은 뒤 ‘신선 보존’ 라벨까지 붙였다. 이 똥은 2016년 경매에서 약 4억원에 팔렸다. 적어도 이 같은 도발은 흥미롭기라도 하다.

 

피에로 만초니 '예술가의 똥'. 이것은 똥을 활용한 대표적 전위예술로 평가받지만, 전위예술의 탈을 쓴 똥이 훨씬 많다.

 

 

“일단 유명해지면 당신이 똥을 싸도 사람들은 박수쳐 줄 것이다”라는 말은 미국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1928~1987)이 남긴 말로 잘못 알려져 있다. 출처는 오리무중이나, 최근 미술계 생태를 정확히 타격한다. 개념의 식민지가 된 현대 미술에서 완성도와 미추(美醜)의 구획은 이미 사라졌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호해지니 개나 소나 예술가 행세를 한다. 과잉 해설이 예술가를 게으르게 만들고, 기본기 대신 충격 요법과 잔꾀가 횡행한다. 미국 철학자 스탠리 카벨이 지적했듯 “사기의 가능성”이 판치는 것이다. 프랑스 비평의 날카로운 회의주의자 에밀 시오랑(1911~1995)은 일찍이 갈파했다. “위선적인 광신자는 어떤 분야에서든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이 믿음 없이는 미학을 논하는 일 자체가 곤욕이다.

 

악취 속에서도 꽃은 자란다. 이례적으로 이번 비엔날레에서 각광받은 작품도 ‘꽃’이었다. “알아서 멋지게 해석해줘” 식의 무책임한 출품작을 뒤로하고, 옛 광주국군병원(전시장)에 놓인 데이지꽃 5000송이에 시선이 쏠렸다. 문선희(42) 작가는 “데이지는 뿌리부터 꽃잎까지 약재로 쓰인다”고 말했다. 직접 땅에 씨 뿌리고 물 줘 길러낸 그 꽃으로 중환자실로 향하는 복도에 좁은 오솔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세심함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담담히 피어있는 꽃, 그러나 단순한 생화(生花)에 이토록 위안의 찬탄이 쏠린다면, 막대한 돈과 인력을 써가며 미술품을 제작하고 전시할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올해 광주비엔날레 예산은 97억원 수준이다.

침침한 미술관을 빠져나오자 흐드러진 벚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 아름다움의 분비물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작은 소리를 터뜨리며 몽상에 잠겼다. 이제야 겨우 치유받는다는듯이.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1.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