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hoto 맑은소리 |
그는 자신을 받아준 도림 선사 곁에서 16년 동안 시봉했다. 스승의 손발이 되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시봉했다. 주변에서도 초현통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16년이 지나도록 스승님은 공부에 대해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초현통은 눈물을 흘리며 도림 선사에게 말했다.
“이제 저는 떠나겠습니다.”
“어디로 가려고 하나?”
“다른 곳에 가서 불법(佛法)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래? 그런 것이라면 여기에도 있지.”
그렇게 말하면서 도림 선사는 자기가 앉은 담요를 슬쩍 들었다. 그 순간 초현통은 확철대오(廓徹大悟·철저하게 크게 깨달음)했다. 초현통은 그 이후에도 스승님을 더욱 정성껏 모셔 ‘포모시자(布毛侍者)’라는 별명이 붙었다. ‘담요시자’라는 뜻이다.
화두선(話頭禪)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화두선은 ‘화두를 수단으로 해서 마음을 닦아가는 수행법’이다. 염불선(念佛禪)에 대칭해 간화선(看話禪)이라고도 부른다. 여러 해 동안 화두를 잡고 참선에 진력해 왔지만 혼자 하는 공부다 보니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다. 답답했다. 이럴 때 누군가 곁에서 한마디만 거들어준다면 큰 진척이 있을 것 같았다. 스승의 지도가 절실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지난 10월 18일 경북 봉화에 있는 사찰 축서사에 갈 기회가 생겼다. 축서사는 무여(無如) 큰스님이 지키고 있는 곳이다. 금곡 무여 큰스님은 이 시대에 몇 남지 않은 도인 중의 한 분이다. 늘 가보고 싶었지만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았다. 출가 직후 20년 전국을 돌며 화두참선에 매달린 무여 스님은 숱한 일화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몸을 들어 옮겨도 모를 정도로 며칠씩 삼매경에 빠진 이야기며, 무여 스님의 혜안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이들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인까지 스님에게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문수산 깊숙이 들어앉은 축서사로 찾아든다.
축서사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문수산 해발 800m 고지에 있었다. 주변 경관은 수려했고 정갈하게 정돈된 경내는 선기(禪氣)가 가득했다. 아무리 복잡한 세상사에 얽혀 있는 사람이라도 절에 들어서면 쉽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파른 산자락에 트럭 6000대 분량의 흙을 채우고 땅을 다졌다는 축서사는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도피안(到彼岸)인 듯 아름다운 절이었다.
가람 내의 전각과 탑과 석등은 정교하고 정성스러웠다. 주인의 손길이 담겨 있었다. 조선 중기에 건립된 보광전에는 신라시대 때 조성된 석조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목조 광배가 아름다운 불상이다. 보광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단아하면서도 날렵하다. 그 옆에 서서 산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면 인간세상에서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슬픔이 구름에 뒤덮인다. 넉넉한 인심과 맑은 기운이 서린 축서사에서의 하룻밤은 그것만으로도 다친 마음이 회복되는 치유의 시간이다.
무여 스님과의 대화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이뤄졌다. 아침 여덟 시. 시자스님의 안내를 받아 큰스님을 뵙고 삼배를 올리자마자 궁금한 것을 여쭸다. 스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벌써 대기하는 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스님은 사람이 다 부처인데 번뇌 망상 때문에 본래 면목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참 나’를 찾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불교에서는 ‘나’라고 하는 실체를 부정한다. 어떻게 ‘참 나’라는 게 있을 수가 있는 건지….”
“그건 피상적인 생각이에요. 어떤 행위나 모습에서 일체가 무상하기도 하지만 무상에서 초탈한 그런 것이 있어요. 생사를 따르지 않는 세계예요. 아주 맑고 깨끗한 그 세계는 형체를 갖추지도 않고 말로 할 수도 없고 글로 쓸 수도 없는 아주 오묘한 세계예요. 그것이 본성이고 우리를 다스리는 근본이에요. 근본적인 원인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있고, 그것이 바로 불교 가르침의 진수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을 찾는 것이 일생에서 가장 깊은 것을 체험해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해요. 그런 마음 상태, 그런 정신 상태가 되지 않으면 생각 자체를 바르게 할 수가 없어요.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자기관리가 돼서 지극히 안정된 상태에서 생각을 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되어야 해요. 그래야 자기 일도 올곧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스님은 “그래서 화두를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두를 챙기려면 마음이 고요해야 해요. 마음이 고요하지 않은 것을 고요하게 하는 것도 화두지만 고요하기 이전에 마음을 일단 안정시켜서 화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안정이 된 그런 상태에서 ‘이 뭐꼬?’, 어째 ‘마삼근(麻三斤·욕심은 항우 같고 그래서 천근만근 무게를 지고 살지만 인간의 무게라는 것은 실로 마 세 근 정도로 가볍다는 뜻. 불교에서 자주 쓰이는 화두)’이라고 했을까,
거기까지 빠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어야 정말 공부가 돼요. 공부가 되면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평화스러워요. 일절 잡스러운 생각이 안 나요. 그런 상태에서 직장 일이나 어떤 중요한 일이라도 빠질 수밖에 없고 전념해서 성취를 할 수가 있어요. 어려울수록 괴로울수록 빠질 줄 알아야 해요. 그게 지혜고 그게 바로 큰일이에요. 그런 지혜로 살면 어떤 일이든지 크게 성공하기가 어렵지 않아요. 어떤 경우라도 화두는 여여(如如)하게 잡아갈 수 있어야 해요. 그렇게 하려면 훈련이 필요해요. 또 화두 참구를 못했더라도 기본적으로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그런 지혜를 가져야 해요. 그래야 인생을 남다르게 살아갈 수 있어요.”
“스님은 화두를 잡을 때 의정(疑情·의심)을 일으키라고 하셨다. 그런데 전문적인 수행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여러 가지 복잡한 고민들을 하면서 ‘마삼근’이나 ‘이 뭐꼬?’ 같은 그 화두를 한결같이 끌고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화두를 끌고 갈 수 있는지, 또 마음을 어떻게 해야 다스릴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화두를 잘할 수 있는 근본은, 화두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에요. 그것이 의정이에요. 의심을 일으키되 염불하듯 ‘이 뭐꼬?’ ‘이 뭐꼬?’라거나, ‘마삼근’ ‘마삼근’해서는 안 돼요. 어째서 마삼근이라고 했을까? 불법(佛法)의 적실한 뜻은 무엇인가? 불법의 대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해요. 당나라 때 동산수초(洞山守初·910~990) 스님이 삼(麻)을 만지고 있는데 한 청년이 와서 ‘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삼을 만지고 계시던 스님이 ‘삼세근(麻三斤)일세!’라고 대답했어요. 부처가 뭐냐 물었는데 삼세근이라고 했어요. 동문서답이지요.
그런데 이 화두는 참선자가 깨칠 때까지 해결해야 하는 특별한 시험문제예요. 그 안에는 큰 뜻이 있어요. 삼세근이야말로 참으로 적당하고 참으로 알맞은 대답이에요. 삼세근이 대단한 답이라는 것을 알려면 깨치는 수밖에 없어요. 깨치려면 의심을 해서 깨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어째서 삼세근이라고 했을까, 의심을 그냥 보통 일으키지 말고 좀 강하고 진하게 내야 해요. 진하게 내되 의심이 끊이지 않고 들게 해야 해요. 의심이 끊기거나 해이해지면 또 바로 챙겨야 해요. 간절하게 하되 성심성의껏, 쉼 없이 하는 것이 화두 참구의 기본 요령이에요.”
그렇다면 화두만 놓치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런 의심이 들 때쯤 해서 스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그렇지요. 하나를 깨치면 전부를 해결하고, 하나를 정복하면 일체를 다 정복할 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화두는 일체 세상만사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예요. 비유해서 말하자면, 산에 오를 때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올라갈 때는 앞밖에 안 보여요. 올라갈 때는 앞만 보고 올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뭐 옆도 뒤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어요. 그렇더라도 그렇게 고생하면서 올라가서 정상에만 딱 서면 사통팔방이라 안 보이는 게 없어요. 멀고 가깝고 잘나고 못나고 모든 것이 눈에 다 들어오는 거예요. 깨달음에 도달하는 거지요.”
화두가 좋은 줄 알지만 세속에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화두만 잡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피 말리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들에게 화두는 어떤 의미일까.
“화두의 궁극적인 뜻을 알아야 해요. 화두야말로 아주 절실하고 절박한 길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기가 조금 어렵겠지만, 부처님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자기를 깨치는 일이라고 하셨어요. 생사(生死)가 대사(大事)입니다. 생사문제의 해결이 수행의 완성이고 선의 시작과 끝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그럭저럭 사는 것을 큰일이라고 하지만 정말 먹을 것 없던 시절에도 부처님이나 중국의 수많은 선지자들은 다 한결같이 바로 이 공부를 깨치는 것 이상의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 그런 분들은 상당수가 공부를 해보니까 할 일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우리는 참으로 해야 할 일, 반드시 해야 하고 꼭 해야 할 일은 이것뿐이라는 큰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간절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주 절실한 것이 이 공부라는 거예요.”
스님이 가르쳐준 화두 참구의 요령은 ‘오로지 집중’이었다. “공부할 때는 휴대폰도 받지 말고 일절 다른 생각도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거기에 집중해야 해요. 짧은 시간을 해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해요. 그렇게 하면 상당히 큰 효과를 거둘 수가 있어요. 화두삼매에 들 정도가 되면 마음이 고요하고 아주 편안해요. 그럴 때 직장일이나 다른 중요한 일들을 해도 모두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돼요. 공부든 일이든 훨씬 효과적이고 생산성이 높아지게 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가 있어요.
스티브 잡스가 불교적 수행법을 익혔다고 해요. 배낭 메고 무전여행하고 인도에 가서 불교 수행법을 배웠다고 해요. 수행법은 집중법이에요. 한곳에 빠지는 것. 일절 잡스러운 생각을 안 하고 오직 빠지고 빠져서 일체 고요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에요. 빠지고 빠지면 삼류가 또 세계 최고가 되는 거예요. 참선해서 들어가는 깊은 경지는 세상의 보통 학문이나 어떤 것에 빠지는 그런 것과는 비교가 안 돼요. 그만큼 깊게 빠질 수가 있어요.”
화두를 하면서 염불이나 주력(주문을 외우는 것)을 함께 해야 할까. 혹은 화두는 자주 바꿔야 할까. 오랫동안 궁금했다. 스님은 오직 화두만 잡으라고 했다. 화두는 한 가지만 잡아서 평생을 그 한 가지만 탐구해야 한다. 화두는 불교인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불교를 모르는 보통 사람도 할 수 있을까. 스님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장맛’만 알면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스님께 화두를 내려주시라 청했다. 스님은 ‘마삼근’을 내려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삼근일세. 어째서 마삼근일까? 어째서… 어째서… 어째… 어…!’ 이제부터 나는 죽을 때까지 ‘마삼근’을 화두 삼아 성성적적하게 살아갈 것이다. 깨우치는 그날까지.
무여 스님과의 대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뭔가 아쉬웠다. 내가 좀 더 일찍 무여 스님을 만났더라면 공부에 큰 진전이 있었을 텐데 왜 이제야 왔을까. 안타까웠다. 그때 문득 초현통 스님 얘기가 떠올랐다. 초현통 스님이 스승님의 담요를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승 작소 도림은 제자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깨달음은 스스로 느껴야 한다. 물이 차고 뜨거운 것은 눈으로 봐서는 알 수 없다. 직접 마셔 봐야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 수 있다. 깨달음의 경지는 오직 깨친 자만이 알 수 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작소 도림 스님이 16년 동안 한결같이 말 없는 말로 제자를 가르친 뜻이 거기에 있었다. 말로서는 알려줄 수 없다. 너 스스로 깨우쳐라. 초현통 스님이 스승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왜 스승이 자기에게 공부를 가르치지 않는가에 대한 화두가 터질 만큼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오래전부터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스승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오늘 같은 기회가 온 것은 아닐까. 만약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오늘처럼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스님의 법문을 새겨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모든 인연은 시절 인연이 있는 법이다. 늦은 것이 빠른 것이다. 이제 비로소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생사 문제를 공부할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