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을 하지 마라. 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棺)도 짜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 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
법정 스님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실제 스님의 장례식에서 관을 짜지 않았습니다. 대신 들것 위에 숨이 멎은 스님의 육신을 올리고, 그 위에 천을 덮었을 뿐입니다. 마치 인도 갠지스 강가의 화장터로 실려 오는 시신들처럼 말입니다. “‘불교’라고 말했을 때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지?”라고 물으면 적지 않은 사람이 “무소유(無所有)”라고 답합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 덕분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소유가 뭔가요?”라고 물어보면 망설입니다. 우물쭈물합니다. 어렴풋이 그림은 떠오르는데, 딱 떨어지게 답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물어봅니다.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냐고. 그럼 이런 답이 돌아옵니다. “재산도, 가족도, 명예도 모두 버리고 떠나는 거지. 산속으로 들어가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선언한 채 살아가는 거지. 그런 거 아냐?” 혹은 이런 답도 있습니다. “내가 가진 걸 모두 내려놓고 검소하게 사는 거지. 아무런 소유물도 없이 구름처럼 사는 거지. 나그네의 삶처럼. 그런 게 아닐까?”
사람마다 대답은 제각각입니다. 그래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점점 가난해지는 삶’입니다. 사람들에게 “정말 그런 삶을 갈망하세요?”하고 물으면 고개를 젓습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 궁핍은 부담스러우니까요. 그래서 무소유는 결국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맙니다. 법정 스님의 수필집을 읽을 때는 감동을 받았지만, 나의 일상에서는 ‘동경’이 아니라 ‘거부’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정말 그렇게 부담스러운 ‘무소유’라면, 왜 불교에서 그토록 ‘무소유’를 부르짖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가 ‘무소유’에 대한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풍경 둘
예수도 ‘무소유’를 설했습니다. 다들 들어본 유명한 대목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혹은 밧줄)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복음 19장24절)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도 타계하기 몇 달 전에 가톨릭 신부에게 이 구절을 딱 꼬집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이병철 회장)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니까요. 부자라고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세상에는 ‘마음 착한 부자’도 있고, ‘마음 나쁜 거지’도 있으니까요. 가령 이웃에게 많은 걸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아낌없이 돕는 억만장자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 역시 바늘구멍을 통과하기가 어려울까요?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럼 예수는 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어렵다’고 한 걸까요. 예수가 말한 ‘부자’는 과연 무슨 뜻일까요.
#풍경 셋
‘무소유’라는 세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무ㆍ소ㆍ유(無ㆍ所ㆍ有)’ 순서대로 풀이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무(無)의 처소(所)가 유(有)다.’ 다시 말해 ‘없음이 있음 속에 있다’가 됩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읽어볼까요. ‘유ㆍ소ㆍ무(有ㆍ所ㆍ無)’. ‘유(有)의 처소가 무(無)다.’ 풀어보면 이런 뜻입니다. ‘있음이 없음 속에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소리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2600년 전 인도의 석가모니 붓다도 ‘무소유’를 설했습니다. 그는 ‘없음이 있음 속에 있다’를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럼 ‘있음이 없음 속에 있다’는 뭐라고 말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했습니다. 정리하면 ‘무소유=공즉시색’이 되고, ‘유소무=색즉시공’이 되는 겁니다.
#풍경 넷
사람들은 ‘무소유’하면 물건이 많은가, 적은가를 따집니다. 자동차가 한 대인가, 두 대인가. 돈이 많은가, 적은가. 집이 큰가, 작은가. 이걸 따집니다. 그래서 가진 물건이 없으면 ‘무소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종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는 그것과 다릅니다.
흔히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삶은 결국 경쟁이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모두 경쟁이다. 무언가를 거머쥐고 달려야 한다. 그래서 소유욕이 필요하다. 그것도 없이 어떻게 상대를 이길 수 있나. 소유욕이 없다면 이 험난한 경쟁사회를 어떻게 헤쳐갈 수 있나.”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무소유는 정말 도인이나 성자의 일이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과연 그럴까요. 스포츠 선수들을 보세요. 그들은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경쟁 무대에 노출된 이들입니다. 그런데 감독이나 코치는 엉뚱한 말을 합니다. “몸에 힘을 빼라”고 합니다. “긴장을 풀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몸에 힘이 들어가면 어깨와 근육이 뻣뻣해지니까요. 결국 자기 실력을 다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몸에 힘이 들어가는 본질적인 이유가 뭘까요? 맞습니다. 마음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승리’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의 소유욕으로 인해, 내 안의 에너지를 다 뽑아낼 수가 없게 됩니다.
스포츠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꽈∼악!’ 붙들고 있다면 긴장을 하게 마련입니다. 힘이 들어가니까요. 동시에 우리의 하루가 경직되고, 우리의 일이 막히고, 우리의 삶도 뻣뻣해지는 겁니다. 대상은 물질적 재산뿐만 아닙니다. 과거의 상처, 현재의 욕망, 미래의 불안 등 내 마음이 뭔가를 ‘꽈∼악!’ 틀어쥐고 있다면 그게 바로 ‘소유의 삶’이 되는 겁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부자’가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는 집착에 대한 무소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의 기준도 ‘재산의 총액’이 아니라 ‘집착의 총액’입니다. 집착이 클수록 바늘구멍은 좁아지고, 집착이 적을수록 바늘구멍은 넓어집니다. 집착이 많을수록 천국의 문이 좁아지고, 집착이 적을수록 천국의 문이 넓어지지 않을까요.
가령 부자와 거지 두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 없이 어려운 이웃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억만장자와 돈에 대한 엄청난 집착을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거지입니다. 둘 중 누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게 될까요. 둘 중 누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의 삶’에 더 가까운 사람일까요. 그렇습니다. 물질의 창고가 비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창고가 비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무소유’는 모든 걸 내려놓고, 모든 걸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꽉 틀어쥔 집착의 손아귀를 풀고서, 경쾌하고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삶의 스윙을 하는 일입니다. 왜냐고요? 그럴 때 일이 더 잘 풀리는 법이니까요. 그럴 때 내 안의 에너지가 막힘 없이 분출되는 법이니까요. 그러니 ‘무소유’는 산속에 숨어 사는 수도자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번잡한 일상을 헤쳐가는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게 아닐까요. ‘소유의 파워’보다 ‘무소유의 파워’가 더 큰 법이니까요.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중앙일보] 입력 201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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