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심리학이 들려주는 ‘죽음’ 이야기

해암도 2015. 7. 20. 14:03

죽음과 ‘웰 다잉’을 생각한다


00dying1.jpg » 생명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 죽는다. 출처/ pixabay.com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1]


‘즐거운 편지’로 유명한 황동규 시인의 ‘풍장1’이라는 시 앞머리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라는,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담담한 어조가 놀랍다. 화자의 초연함이 오히려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생명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 죽는다. 탄생의 순간부터 삶의 행로는 죽음이라는 결론을 향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는 바 없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든 언제나 두려운 존재다.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일까?’, ‘잘 죽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런 물음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우리는 다시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잘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물음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인생이 품고 있는 필연적인 죽음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삶을 절박하면서도 담담하게 살아내는 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죽음을 심리학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죽음에 대한 태도들

00dot.jpg

죽음은 무서운 존재다. 죽음의 공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는 매우 적응적인 반응이다. 공포의 학습은 우리를 위해한 것에서 보호하고 공격의 충동을 억제할 수도 있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고 볼 때 죽음의 불안과 공포는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능력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보편적인 정서라는 것이다.


음에 대한 두려움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자아상실감, 미지의 사후세계에 대한 공포,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불안뿐만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될 남아 있는 내 가족에 대한 근심 같은 마음을 모두 포함한 아픔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한 두려움의 정서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언급을 일절 하고 싶지 않은 회피의 마음도 얼마든지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는 죽을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니라 기어코 죽고야마는 존재다. 죽음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인지적 노력이다.

00dying2.jpg » 죽음은 무서운 존재다. 출처/ pixabay.com

나다 트렌트대학교 심리학자 웡(Paul T. P. Wong) 교수는 죽음에 대한 수용을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다.[2] 첫 번째가 ‘중립적 수용(neutral acceptance)’으로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끝으로 생각하여 큰 두려움 없이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죽음을 삶의 끝에서 만나는 하나의 변할 수 없는 부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에서는 개인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는 관점을 제시하는데, 성공적으로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는 ‘접근적 수용(approach acceptance)’이다. 접근적 수용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확신하고 행복한 사후 세계에 관련된 신념을 바탕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라는 관념이 가져오는 불확실한 미래에 긍정적 생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죽음을 수용하는 세 번째 유형은 ‘탈출적 수용(escape acceptance)’이다.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한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큰 상태의 죽음 수용 형태라고 보면 된다. 삶이 갖는 필연적인 죽음이 고통스러운 현재의 도피처로 기대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불행한 삶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이다.

00dying3.jpg »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중요하다. 출처/영화 <내 사랑 내 곁에 (2009)>


죽음에 대처하는 '유능한 마음'

00dot.jpg

죽음을 두려워하는 감정적 측면과 죽음을 수용할 수 있는 인지적 측면을 넘어, 우리는 불가피한 죽음에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마음이라는 신념적 측면도 가능하다.


음에 대처하는 유능감 개념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돌보며 도와주는 호스피스 간호의 역할이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이 보고되면서 부각되기 시작한 개념이다.[3]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사회학습이론(social learning theory)의 주창자인 밴두러(Albert Bandura)가 제안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의 영역 특정적 신념으로 볼 수 있다.[4] 죽음을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 곧 죽음 대처 유능감(death competency)이 되는 것으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사람의 죽음에 대처할 수 있다고 믿는 긍정적인 기대감이라 할 수 있다.


죽음 대처 유능감은 ‘나는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안전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영역이다’, ‘나는 미래에 누군가를 잃는 것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와 같은 물음을 통해 유능감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죽음 대처 유능감과 관련된 연구들에 의하면 이러한 효능감은 자신이 얼마나 건강하다고 느끼는가, 심리적으로 얼마나 평안한가, 그리고 내면적으로 얼마나 강인한가와도 연관된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이를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은 죽음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죽음 대처 유능감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사후에 장기를 기증하기로 서약하는 실천에 훨씬 더 적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5]

00dying4.jpg » 죽음은 자유와 단절함을 의미한다. 출처/영화 <내 사랑 내 곁에 (2009)>


어떤 마음들이 필요한가?

00dot.jpg

우리나라 60세 이상 노인 100명을 대상으로 죽음에 대한 마음을 살펴본 연구가 있다.[6] 우선, 노년기의 죽음에 대한 대처 유능감은 죽음 공포가 낮을수록, 그리고 죽음을 수용하는 현실적인 마음이 클수록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결과는,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죽음에 대한 수용 태도가 긍정적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높은 수준의 교육이 죽음에 대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기보다, 교육을 통한 깨달음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생각의 깊이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격 특성과 같은 개인의 특성적 변인도 죽음에 대한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에서는 활동성이 높고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외향적인 사람들이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죽음에 대한 중립적 수용 태도가 높았다. 게다가, 자기절제나 신중함을 갖춘 성실성이 높은 성격의 사람들은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가 확연히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며 겸손과 온유함을 지닌 우호성이 높은 특질의 사람들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낮고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가 긍정적이었다.

 

음 대처 유능감이 높을수록 사후에 장기를 기증하는 실천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는 앞선 연구에서 나타난 것처럼, 국내 연구에서도 죽음 공포가 낮은 노인일수록 장기 기증을 하려는 경향성이 높았고, 특히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가 낮고 죽음 회피 태도가 낮은 노인들이 죽은 이후에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고자 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남녀 차이가 있었을까? 연구결과에서는 유의한 성차가 나타났는데, 남자 노인들이 여자 노인들에 비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훨씬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성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인구통계학적 변인들 중에서 노년기 죽음 공포를 예측하게 해주는 가장 뚜렷한 변인은 ‘경제적 수준’이라는 아주 특이할 만한 결과도 보고한다. 이는 경제적 여유가 충분히 있다고 보고한 노인들이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재산이 많은 노인들일수록 죽음에 대하여 더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는 결과는 흥미롭다.


돈의 장점은 가진 자에게 그만큼의 많은 자유를 허락한다는 점일 것이다. 돈을 쓸 수 있는 자유에는 통제감과 우월감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쉽진 않다. 자유를 위해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려온 인류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유는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 그 이상이다. 죽음은 자유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렇게 어렵게 벌어 얻은 자유인데 그걸 눈앞에 두고 이별해야 한다는 것은, 더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원통함이 깃들여 질 수 있는 일로 보인다.

00dying5.jpg »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출처/영화 <About Time (2013)>


잘 죽는 것과 잘 사는 것

00dot.jpg

45세 이상, 65세 이하의 우리나라 중년 남녀 320명에게 죽음에 대한 마음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7]


년에게는 배우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클수록 죽음 자체를 삶의 자연스러운 끝으로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마음의 깊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부부 사이의 만족도가 높을수록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적었으며 죽음에 대한 대처 유능감도 월등하게 높았다.


배우자를 향한 마음과 사랑 못지 않게 죽음 대처 유능감을 높이는 변인은 부모-자녀 관계였다. 자녀를 챙기고 보살피는 정도를 측정하는 ‘보살핌’, 자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존중과 배려’, 그리고 자녀와의 애착을 나타내는 ‘친밀감’ 등 요소의 점수가 높을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낙관적이고 두려움이 낮은 것으로 측정되었다. 지금 곁에 있는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사랑은 인생을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일지도 모른다. 내 자녀를 통해 나의 지난날을 보고, 내 배우자를 통해 지금의 나를 보고, 내 부모를 통해 나의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크고 깊은 삶에 대한 통찰이 어디 있겠는가.


여러 연구 결과에서, 죽음 대처 유능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변인은 ‘사회적 책임감’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숙한 노화와 성공적인 인생에서 제안하는 최고 수준은 바로 이 사회적 책무를 실행하는 것이다. 내 주변 사람들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을 넘어 내가 속한 사회 전체에 책임을 느끼고 이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책임을 지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이는 생물학적 유전자를 남기는 생존의 궁극적 목표를 넘어 문화적 유전자를 남기는 것에 기여하는 초월적 실천이, 곧 잘 죽는 길에 있다는 해석이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다는 자각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 태도에 영향을 준다. 우리에게는 그 의미 있는 인생에 대한 생각과 실천이 ‘웰 다잉’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00dying6.jpg » 태어나는 순서, 그 순서를 제외하곤 인생에서 순서가 정해진 것이 무엇이 있던가. 출처/영화 <About Time (2013)>


‘웰 다잉’에 대한 단상

00dot.jpg

죽음에 대한 생각이 주는 괴로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번민이다. 누구도 죽음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겪을 수는 없다. 언제나 상상을 동반한 짐작에 불과할 뿐, 그 어느 누구도 알 길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 당장 죽는다면…’이라는 전제를 할 줄 안다. 그만큼 삶은 곧 죽음과 맞닿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웰 다잉’은 우리의 인생을 어차피 죽음을 향한 행로라고 볼 때, 죽음에 잘 대처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소에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


의 마무리를 위한 ‘웰 다잉’이 있다. 템플 스테이에서 죽음을 가상 체험하고 가상 유언장을 쓴다든지, 사전 치매 요양 의향서, 사전 의료 의향서, 사전 장례 의향서 등의 작성을 통해 자신의 죽어가는 과정을 미리 통제하려는 방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자체로써 이미 훌륭한 귀감이 된다. 같은 무게로 잘 죽는다는 것을 미리 준비하는 것도 역시 삶의 끝을 스스로 매듭지으려는 고결한 결심이다.


나는 오늘 충분히 잘 살았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라고 했다. 오늘밤 나는 행복한 잠을 이룰 수 있을까? 오늘 하루는 내가 행복한 죽음에 더 다가가는 데 충분히 기여했을까? 미래에 닥칠 내 죽음은 내가 맞는 새로운 기회이자 가능성일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한 자긍심이 필요하다. 자연주의 경제철학자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은 말했다. ‘좀 더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 다른 사람, 또는 하나의 이념과 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태어나는 순서, 그 순서를 제외하곤 인생에서 순서가 정해진 것이 무엇이 있던가. 인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온전한 통제력과 존엄을 위한 ‘웰 다잉’을 간절히 원한다.


[주]

 

[1] 황동규 (1995). 풍장. 문학과지성사.

[2] Wong, P. T., Reker, G. T., & Gesser, G. (1994). Death Attitude Profile-Revised: A multidimensional measure of attitudes toward death. Death anxiety handbook: Research, instrumentation, and application, 121-148.

[3] Godkin, M. A., Krant, M. J., & Doster, N. J. (1984). The impact of hospice care on families.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iatry in Medicine, 13(2), 153-165.

[4] Bandura, A. (1995). Self-efficacy in changing societ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Robbins, R. A. (1994). Death competency: Bugen’s coping with death scale and death self-efficacy. Death anxiety handbook: Research, instrumentation, and application, 149-165.

[6] 김지현, 민경환 (2010). 노년기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죽음 대처 유능감에 영향을 주는 변인에 대한 연구.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24(1), 11-27.

[7] 정영숙, 이화진. (2014). 중년기의 성숙한 노화와 죽음 태도 및 죽음 대처 유능감의 관계. 한국심리학회지: 발달, 27(2), 131-154.


이고은 부산대 인지심리학 박사과정    2015. 07. 20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