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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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를 남겼나 싶어 집 안을 살폈다. 전람회 티켓이 발견된 건 화장대 서랍이었다. '마크 로스코―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 잡스가 그림도 좋아했어? 도로 집어넣으려는데 티켓 위에 휘갈겨 쓴 글씨가 보인다. '레드, 피로 그린 그림.'
연애 시절에도 가본 적이 없는 미술관을 나이 오십에 갔다. 그것도 혼자서. 거대한 색 덩어리들, 달랑 '무제'라고 적힌 사각의 그림들 앞에서 뻘쭘해진다. 대체 뭘 느끼라는 건지. 떠밀리듯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간다. 해넘이 바다를 그린 양 온통 붉다. 화가가 동맥을 끊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란다. 자세히 보니 다 같은 빨강이 아니다. 크고 작은 색면(色面)이 서로를 밀쳐내듯 둥둥 떠다닌다. 레드, 아내가 좋아했던 색깔. 온몸 던져 불사를 만한 무엇이 나타나면 죽어도 좋다며 농담처럼 말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균열이 생긴 건 언제부터일까. 팔짱을 끼어오는 아내의 손길이 싫어진 건 언제부터일까. 내 청을 거절한 적 없는 여자였다. 사업하는 형 위해 적금을 털 때도, 형 대신 어머니를 모시자 했을 때도,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도…. "당신이 날 싫어할까 봐 두려워." 아내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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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담벼락에 기대서 1년 전 끊은 담배를 피워 문다. 아내 없는 집에 들어가기 무서워 서성인다. 멀리서 누군가 걸어온다. 달달달. 짐 가방을 끌고 뒤뚱뒤뚱 다가온다. "당신, 여기서 뭐해?" 어둠 속 휘둥그레진 두 눈이 묻는다. 아내다. 기가 차 말문이 막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텅 빈 아파트에 있기 싫어 강원도로 귀농한 친구 집에 다녀온단다. "문자 못 봤어?" 잠결, 로밍폰이 휘파람 소릴 낸 것도 같다. 전화는 왜 안 받았느냐고 묻자 첩첩산중이었다고 한다. "은퇴하면 우리도 거기 가서 농사짓고 살자. 천국이 따로 없어."
코흘리개 아이처럼 아내를 졸졸 따라가며 묻는다. "로스콘지 로코코는 뭔데?" "아~ 그 사람? 옆집 여자가 표 한 장 남는다며 주길래…. 무지 유명한 화가라는데 난 뭔 소린지 도통 모르겠더라고." 이 여자를 그냥! 긴장과 두려움, 불안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강원도 된장으로 찌개 맛있게 끓여줄게." 거실에 불이 켜지고, 가스레인지에 드르륵 불꽃이 인다. 집 안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기 시작한다. 아내가 돌아왔다. 사랑하는 나의 그녀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