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선 사람이나 동물이나 매한가지다. 지난달 말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양떼목장 축사. “으메~’ 하고 어미 양이 소리를 내니 새끼 양이 “메에~’ 하며 어미 젖을 귀신같이
찾는다.
“엄마는 새끼를 냄새로 알아내고, 새끼는 어미를 목소리로 분간해요. 어미가 출산 때 양수 냄새로 제 새끼를 찾아내죠.” 양떼목장 전영대(63) 대표가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아세요. 어미가 도둑연애를 했나 봐요. 양들은 암수를 따로 키우다가 9월 중순께 합방시킵니다. 임신기간이 5개월이니 다음해 2월에 출산해야 하는데 벌써 새끼를 낳았잖아요. 언제 몰래 사랑을 했는지 저도 알 수 없다니까요. 하하하.”
830m 고지대에 있는 대관령 양떼목장은 한마디로 그림이다. 눈 덮인 초지와 엄마 젖처럼 펼쳐진 구릉이 세속에 눌린 방문객을 넉넉하게 감싼다. 하지만 그 뒤에는 목장을 일군 전 대표의 땀과 열정이 숨어있다. 20만㎡(약 6만여 평)에 이르는 잡목지대를 한 해 6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로 탈바꿈시켰다. 지난 27년간 일어난 일이다. 을미년(乙未年) 양띠 해가 반가울 수밖에 없는 그의 지난 시간을 양 관련 속담을 빌려 돌아봤다.
눈밭에서 아기양을 안고 있는 전영대 대표. 27년 전 아내와 단둘이 시작한 목장이 지금은 직원 15명의 회사로 성장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소 잃고 양을 얻는다
큰 것을 잃고 작은 것을 얻는다.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소가 양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전 대표의 경우는 정반대다. 소 대신 양으로 남부럽지 않은 오늘을 이뤘다. 시간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약품 영업과장이었던 그는 대관령에서 제2의 삶을 찾게 된다. “그해 봄 우연히 대관령 삼양목장을 방문했어요. 초원에서 노니는 소 떼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였죠. ‘혹시 이 광경을 관광상품으로 가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양을 선택했는데요.
“84년 소값 파동의 여진이 있었던 때였어요. 우리 축산의 앞날이 암울해 보였죠. 당시 작게나마 양을 키우던 관동대 교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양고기 맛도 처음 알게 됐죠. 양을 키워 양고기 센터를 만들고, 민박시설을 지으면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용평스키장·월정사·경포대 등 주변 명소가 많아 축산물 개방이 되더라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고요. 이후 2년 동안 10번은 더 내려왔을 겁니다.”
-관광목장은 낯설지 않았나요.
“농업시험장·농촌지도소 등을 돌며 설립요건을 물어봤는데 이상한 놈, 미친 놈 취급만 받았습니다. ‘관광은 개뿔 무슨 관광’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뭔가 확신이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신문을 광고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읽어왔는데, 우리 농촌이 살려면 분명 변해야 한다고 믿었거든요.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잖아요. 쳇바퀴 같은 도시생활에도 물렸고요. 고민 끝에 88년 8월 서울 올림픽 열기를 뒤로 하고 아내와 함께 이곳에 짐을 풀게 됐죠.”
-어릴 적 소라도 키워봤나요.
“아니요. 고향이 바닷가 군산입니다. 19세에 서울에 올라와 직장에 다녔으니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살아온 셈이죠. 목장을 가꾸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어요. 그것도 아내와 단둘이 해야 했으니까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유행가 가사로 아내를 설득해 내려왔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황량한 땅뿐이었습니다.”
#양의 창자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고
했다. 아홉 번 굽은 양의 창자처럼 험난한 인생살이를 가리킨다. 대단한 의욕으로 달려든 일이었지만 초짜 목동이었던 그는 처음부터 모든 걸 배워야
했다.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곳, 그는 촛불로 매일 밤을 밝혔고 개울가에서 길어온 물로 밥을 끓여야 했다.
-일이 끝이 없었겠어요.
“공사판에서 건축을 배우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우선 축사를 지어야 하잖아요. 망치질부터 벽돌 쌓는 것까지 맨손으로 익혔죠. 변변한 장비 하나 없었고요. 또 양을 키우려면 초지를 조성해야 해요. 그래야 풀을 뜯길 수 있죠. 돌을 일일이 골라내고, 철책을 하나하나 세우고…. 지금까지 박은 철책만 1만 개나 됩니다. 철근 값을 아끼려고 강릉 일대 고물상을 다 돌아다녔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습니다. 그렇게 13~14년쯤 되니까 구색을 갖추게 됐어요.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찾아오고 학교 체험학습 프로그램에도 포함되고….”
-무슨 힘으로 버텨왔나요.
“정말 산짐승처럼 살았어요. 거지 중의 상거지였죠. 아이들 옷 한 번 제대로 사준 적이 없어요. 100m 경주에서 전력질주를 하듯, 전쟁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듯 말이죠. 반드시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지난 반세기 한국인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잖아요. 경쟁과 승부에 지친 이들이 분명 자연과 전원에서 위안을 찾을 것으로 판단했죠. 파란 하늘 아래 초록 풀밭에서 풀을 뜯는 양 떼처럼 평화로운 모습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요. 감동 자체입니다.”
-양은 얼마나 키웁니까.
“270마리쯤 됩니다. 한 해에 100여 마리 정도 새로 태어나는데 그 수만큼 다른 곳에 분양하죠. 목가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학교·유치원·목장, 심지어 모텔 등에서 주문이 들어옵니다. 아직 국내에선 양만 팔아서 수지를 맞출 수 없어요. 최소 2000~3000마리는 키워야 하는데 이를 감당할 만한 자본과 땅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양띠는 부자 못된다
양은 온순하다. 양띠 사람은 정직해서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도 생겨났다. 하지만 양은 열심히 일한 전 대표에게 섭섭지 않는 보상을 선물했다. 성인 4000원, 청소년·어린이 3500원 하는 목장체험료가 주 수입원이다. 그가 이곳에 정착할 당시 다섯 살, 세 살이던 아들 둘이 그의 일을 물려받을 준비도 하고 있다. 그는 “가치 대물림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가치를 말하는 거죠.
“농장에 커피숍이나 식당, 하다못해 떡볶이 가게 하나 없어요. 목장은 양의 한가로운 이미지가 생명입니다. 체험축산관광에 무슨 이미지냐고 반문할 순 있겠지만 목장이 감동을 주려면 그런 원시성을 간직해야 합니다. 상업성이 가득한 이미지로는 승부를 걸 수 없죠. 그만큼 우리 국민의 눈이 높아진 거죠. 커피숍을 차리면 당장 장사가 될 수 있겠으나 목장은 자칫 껍데기만 남게 될 수 있어요.”
-2009년 겨울 아내를 잃었는데요.
“어느 날 화장실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어요. 평생 고생만 하다가 두 다리 뻗고 잘 만한 시절을 만났는데 말이죠.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처갓집 식구에 얼굴을 들 수 없었어요. 아내의 이름 석 자 ‘이강희’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그 이듬해 아내가 나온 강화여고에 장학금 1억원을 기탁했습니다. 학생들이 깨알같이 쓴 감사편지를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2015년 양띠 해를 맞는 소감은.
“목장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도 12년 전 양띠 해부터죠. 얼마나 기뻤던지 그해에는 돈을 받지 않았어요. 양은 제 평생의 동반자입니다. 양이 없는 저를 상상할 수 없죠. 양이 고집이 세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양처럼 순한 동물도 없어요. 둥글둥글, 모난 데가 없죠. 다른 짐승을 절대 공격하지 않아요. 먹이를 줘도 무는 일이 없고요. 새해에 우리 모두 이런 마음으로 살면 사회나 가정이나 평화로워지지 않을까요. 2014년 우리는 너무 큰 슬픔을 겪었잖아요.”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5.01.03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엄마는 새끼를 냄새로 알아내고, 새끼는 어미를 목소리로 분간해요. 어미가 출산 때 양수 냄새로 제 새끼를 찾아내죠.” 양떼목장 전영대(63) 대표가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아세요. 어미가 도둑연애를 했나 봐요. 양들은 암수를 따로 키우다가 9월 중순께 합방시킵니다. 임신기간이 5개월이니 다음해 2월에 출산해야 하는데 벌써 새끼를 낳았잖아요. 언제 몰래 사랑을 했는지 저도 알 수 없다니까요. 하하하.”
830m 고지대에 있는 대관령 양떼목장은 한마디로 그림이다. 눈 덮인 초지와 엄마 젖처럼 펼쳐진 구릉이 세속에 눌린 방문객을 넉넉하게 감싼다. 하지만 그 뒤에는 목장을 일군 전 대표의 땀과 열정이 숨어있다. 20만㎡(약 6만여 평)에 이르는 잡목지대를 한 해 6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로 탈바꿈시켰다. 지난 27년간 일어난 일이다. 을미년(乙未年) 양띠 해가 반가울 수밖에 없는 그의 지난 시간을 양 관련 속담을 빌려 돌아봤다.
눈밭에서 아기양을 안고 있는 전영대 대표. 27년 전 아내와 단둘이 시작한 목장이 지금은 직원 15명의 회사로 성장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소 잃고 양을 얻는다
큰 것을 잃고 작은 것을 얻는다.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소가 양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전 대표의 경우는 정반대다. 소 대신 양으로 남부럽지 않은 오늘을 이뤘다. 시간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약품 영업과장이었던 그는 대관령에서 제2의 삶을 찾게 된다. “그해 봄 우연히 대관령 삼양목장을 방문했어요. 초원에서 노니는 소 떼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였죠. ‘혹시 이 광경을 관광상품으로 가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양을 선택했는데요.
“84년 소값 파동의 여진이 있었던 때였어요. 우리 축산의 앞날이 암울해 보였죠. 당시 작게나마 양을 키우던 관동대 교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양고기 맛도 처음 알게 됐죠. 양을 키워 양고기 센터를 만들고, 민박시설을 지으면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용평스키장·월정사·경포대 등 주변 명소가 많아 축산물 개방이 되더라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고요. 이후 2년 동안 10번은 더 내려왔을 겁니다.”
-관광목장은 낯설지 않았나요.
“농업시험장·농촌지도소 등을 돌며 설립요건을 물어봤는데 이상한 놈, 미친 놈 취급만 받았습니다. ‘관광은 개뿔 무슨 관광’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뭔가 확신이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신문을 광고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읽어왔는데, 우리 농촌이 살려면 분명 변해야 한다고 믿었거든요.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잖아요. 쳇바퀴 같은 도시생활에도 물렸고요. 고민 끝에 88년 8월 서울 올림픽 열기를 뒤로 하고 아내와 함께 이곳에 짐을 풀게 됐죠.”
-어릴 적 소라도 키워봤나요.
“아니요. 고향이 바닷가 군산입니다. 19세에 서울에 올라와 직장에 다녔으니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살아온 셈이죠. 목장을 가꾸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어요. 그것도 아내와 단둘이 해야 했으니까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유행가 가사로 아내를 설득해 내려왔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황량한 땅뿐이었습니다.”
#양의 창자다

-일이 끝이 없었겠어요.
“공사판에서 건축을 배우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우선 축사를 지어야 하잖아요. 망치질부터 벽돌 쌓는 것까지 맨손으로 익혔죠. 변변한 장비 하나 없었고요. 또 양을 키우려면 초지를 조성해야 해요. 그래야 풀을 뜯길 수 있죠. 돌을 일일이 골라내고, 철책을 하나하나 세우고…. 지금까지 박은 철책만 1만 개나 됩니다. 철근 값을 아끼려고 강릉 일대 고물상을 다 돌아다녔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습니다. 그렇게 13~14년쯤 되니까 구색을 갖추게 됐어요.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찾아오고 학교 체험학습 프로그램에도 포함되고….”
-무슨 힘으로 버텨왔나요.
“정말 산짐승처럼 살았어요. 거지 중의 상거지였죠. 아이들 옷 한 번 제대로 사준 적이 없어요. 100m 경주에서 전력질주를 하듯, 전쟁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듯 말이죠. 반드시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지난 반세기 한국인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잖아요. 경쟁과 승부에 지친 이들이 분명 자연과 전원에서 위안을 찾을 것으로 판단했죠. 파란 하늘 아래 초록 풀밭에서 풀을 뜯는 양 떼처럼 평화로운 모습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요. 감동 자체입니다.”
-양은 얼마나 키웁니까.
“270마리쯤 됩니다. 한 해에 100여 마리 정도 새로 태어나는데 그 수만큼 다른 곳에 분양하죠. 목가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학교·유치원·목장, 심지어 모텔 등에서 주문이 들어옵니다. 아직 국내에선 양만 팔아서 수지를 맞출 수 없어요. 최소 2000~3000마리는 키워야 하는데 이를 감당할 만한 자본과 땅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양띠는 부자 못된다
양은 온순하다. 양띠 사람은 정직해서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도 생겨났다. 하지만 양은 열심히 일한 전 대표에게 섭섭지 않는 보상을 선물했다. 성인 4000원, 청소년·어린이 3500원 하는 목장체험료가 주 수입원이다. 그가 이곳에 정착할 당시 다섯 살, 세 살이던 아들 둘이 그의 일을 물려받을 준비도 하고 있다. 그는 “가치 대물림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가치를 말하는 거죠.
“농장에 커피숍이나 식당, 하다못해 떡볶이 가게 하나 없어요. 목장은 양의 한가로운 이미지가 생명입니다. 체험축산관광에 무슨 이미지냐고 반문할 순 있겠지만 목장이 감동을 주려면 그런 원시성을 간직해야 합니다. 상업성이 가득한 이미지로는 승부를 걸 수 없죠. 그만큼 우리 국민의 눈이 높아진 거죠. 커피숍을 차리면 당장 장사가 될 수 있겠으나 목장은 자칫 껍데기만 남게 될 수 있어요.”
-2009년 겨울 아내를 잃었는데요.
“어느 날 화장실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어요. 평생 고생만 하다가 두 다리 뻗고 잘 만한 시절을 만났는데 말이죠.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처갓집 식구에 얼굴을 들 수 없었어요. 아내의 이름 석 자 ‘이강희’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그 이듬해 아내가 나온 강화여고에 장학금 1억원을 기탁했습니다. 학생들이 깨알같이 쓴 감사편지를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2015년 양띠 해를 맞는 소감은.
“목장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도 12년 전 양띠 해부터죠. 얼마나 기뻤던지 그해에는 돈을 받지 않았어요. 양은 제 평생의 동반자입니다. 양이 없는 저를 상상할 수 없죠. 양이 고집이 세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양처럼 순한 동물도 없어요. 둥글둥글, 모난 데가 없죠. 다른 짐승을 절대 공격하지 않아요. 먹이를 줘도 무는 일이 없고요. 새해에 우리 모두 이런 마음으로 살면 사회나 가정이나 평화로워지지 않을까요. 2014년 우리는 너무 큰 슬픔을 겪었잖아요.”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5.01.03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