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유정
평지 돌출이란 표현이 있다. 느닷없이 솟아오른 융기. 족보도 없고 계통도 없다. 작가 정유정(47)이 그런 경우다. 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해본 적도 전혀 없고,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은 적도 없으며, 상대적으로 홍보에 취약한 지역(광주광역시) 문인. 오로지 자신의 문학적 재능과 성실 하나로 승부하는 작가라는 것.
존재 자체를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은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시인 바이런의 문장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정작 본인은 이 수식이 억울하다. 나이 마흔에 늦깎이로 데뷔했지만 '치밀한 계획'으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1년 한국 문학 최대 베스트셀러였던 '7년의 밤'의 주인공이자 2013년 한국 문학 최대 기대작으로 꼽히는 장편소설 '화양 28'(가제·6월 출간 예정)의 작가를 만났다.
◇세 살 어린 동생 친구와 결혼
"―세 살 어린 남동생 친구가 남편?"이 얘기 알려지면 너무 계산적으로 보이는데(웃음). 동생 친구가 '작업'을 걸길래 내가 그랬다. 나는 글을 써야 하니 당신이 나를 책임져야 한다고. 그러니 결혼하고 싶으면 공무원이 되라고. 석 달 뒤에 119구조대 시험이 있었다. 떡하니 합격해왔다. 어쩔 수 없더라.
"―'치밀한 계획'의 정체는."결혼할 때 '집을 사면 그날로 직장 그만두고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맨손으로 시작해 둘이 벌어 딱 6년 걸렸다. 집을 산 그날 바로 통보했다. '신랑, 이제부터는 당신이 날 먹여 살려라.' 그때부터 들어앉아 글을 썼다. 서른다섯 살이었다."
◇처음엔 무작정 원고 보내
첫 5년은 철저한 무명이었다."처음에는 무작정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책을 내자고 하길래, 내가 글을 정말 잘 쓰는 줄 알았다(웃음). 그렇게 3권을 썼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더라.
이후 공모전 응모로 방향을 바꿨다. 5년 동안 11번 떨어졌다. 나중에는 오기 같은 게 생기더라."―'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은 게 2007년이다."고무장갑 끼고 변기를 박박 닦으며 화장실 청소하는 중이었는데, 수상 통보 전화가 왔다.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정말 벼랑 끝에서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대중소설로서 흡인력은 대단하지만 본격 문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문체나 문장 미학은 아쉽다는 지적이 많다.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관심이 없는 거라고 해 달라. 나는 작가보다 소설가로 불리는 게 좋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이야기꾼'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시간이 모자란다. 문장이나 문체의 미학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문학을 읽던 시대는 끝난 게 아닌가. 영상 시대, 소설이 이야기로 드라마·영화를 이길 수 있나."드라마보다 더 극단적인 이야기로 승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만으로 승부하겠다는 뜻이다. 배우 연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자기 머릿속을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은 머리와 심장, 심지어 혈관 속 피까지도 보여줄 수 있다. 끓는 피의 온도가 몇 도인지마저도.
"―당신은 영화를 시간의 예술, 문학을 영토의 예술로 표현한 적이 있다."영화는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관객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 하지만 소설은 독자가 아무 때나 들어와 뒹굴고 몸을 적시는 진창이다. 수많은 예술 장르에 물을 대는 샘이며, 인간과 삶과 세계의 운명을 한계 없이 은유해내는 대지다.
"◇"영화 같다"는 표현은 내게 모욕
당신 소설 3권은 모두 영화 판권이 팔렸다. 처음부터 영화화를 노렸나."영화 시나리오를 '7년의 밤'처럼 썼으면 100% 망했을 것이다. 내 소설은 삼인칭 다중 시점이다. 대중영화가 이렇게 시점의 다변화를 꾀하면 이야기는 산만해지고, 관객은 감정이입 대상을 몰라 어리벙벙해진다. 영화를 노리고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영화를 원했다면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을 했을 것이다. 내 성격은 직선이다. 소설 쓰기 위해 10년이란 세월을 바쳐 여기까지 왔는데, 영화적이라고 하는 건 모욕이다.
"―당신의 소설은 독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어떤 사람은 소설에서 교훈을 얻고, 어떤 사람은 철학을 얻는다.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나는 '살아보지 못한 삶'을 주고 싶다. 이야기에 몰입한 나머지 기진맥진해버릴 만큼의 강렬한 정서와 인생의 다른 의미를 경험하게 하고 싶다."순수 문학과 장르문학, 본격 문학과 대중문학으로 소설을 나누는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문학 관계자들의 레토릭일 뿐.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좋은 문학이냐 나쁜 문학이냐의 구분 아닐까.
거칠게 요약하면 정유정의 문학은 '닥치고 이야기'다. 독자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강력한 이야기. 영상 미디어와의 싸움에 지쳐 기진(氣盡)해 버린 한국 문학, 정유정은 드물게 이야기의 힘만으로 독자를 설득하고 있다. 참으로 강력한 정면 돌파다.
조선 : 201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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