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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조선 불굴의 도전

해암도 2025. 11. 20. 07:26

유럽 열강이 식민지 개척에 나선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업은 국력의 상징이었다. 유일한 대륙 간 이동 수단이 선박이었다. 많은 전함과 상선을 갖춘 나라가 세계 무역로를 장악해 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세계 조선업을 석권했다. 전 세계 상선의 절반 이상을 영국에서 건조했고, 최신 드레드노트(dreadnought)급 전함 같은 초대형 군함을 만들어 해상 패권을 확고히 했다.

 

▶미국의 조선 능력은 2차 대전 때 진가를 발휘했다. 독일 잠수함 공격으로 연합군 수송선이 막대한 피해를 보았지만, 1만톤급 표준 화물선인 리버티선을 2700척 이상 건조해 군수물자와 병력을 실어 날랐다. “2차 대전의 승패가 미국 조선소에서 결정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한국 조선업의 시작은 미약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하나로 조선을 4대 국책 사업으로 지정하고 투자할 기업을 찾았다. 대기업 거의 모두 피하려 했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만은 무모해 보이는 이 과감한 도전에 나섰다. 1971년 정 회장이 그리스에서 26만톤급 초대형 원유 운반선 2척을 수주했을 때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당시 현대그룹은 조선소도 없었다. 정주영은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 사진과 지도, 영국 조선소에서 빌린 초대형 유조선 도면 한 장을 가지고 수주에 성공했다. 그가 영국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한국은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설득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정주영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조선업은 ‘바다 위의 건설업’이라고 한다. 수많은 선체 블록을 만들어 용접으로 이어 붙이는 조선업의 공정이 건설 작업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배를 만드는 일은 건설업에서 하는 토목, 건축, 기계 설비, 전기 공사를 결합한 것과 유사하다”고 했다. 현대건설에서 축적한 노하우가 조선업에서 통할 수 있다고 본 통찰이다.

 

▶정주영이 1972년 설립한 HD현대중공업이 지난달 필리핀 초계함 2호 ‘디에고 실랑함’을 인도했다. 1974년 첫 선박인 그리스 유조선 이후 51년 만에 5000번째 선박 인도다. 역사상 단일 기업이 5000척을 인도하기는 처음이다. 유럽과 일본도 달성하지 못한 세계 산업사의 대기록이다. 조선소도 없이 선박 수주에 나선 담대한 도전 정신과 건설업의 강점을 조선업에 접목한 창의적 발상이야말로 중국에 추격당하는 K조선이 다시 한번 새겨야 할 정주영 정신이다.

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