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게 밑장빼기?” 판사 놀랐다…60억 털어간 딜러의 팔꿈치

해암도 2024. 11. 15. 13:00

황민구 법영상분석연구소장 

딥페이크 범죄는 피해자인 ‘우리’의 문제 

황민구 법영상분석연구소장은 최근 큰 사회문제로 불거진 ‘딥페이크’ 범죄에 대해 이같이 말하며 “‘생각의 전환’이 (딥페이크 범죄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했다. 기술 발전 덕에 범죄 대응도 쉬워질 줄 알았는데, 영상 분석 전문가인 그는 왜 이렇게 얘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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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황민구 법영상분석연구소 소장이 중앙일보 VOICE팀과 인터뷰하고 있다.

‘법영상 분석’은 말 그대로 사건·사고가 담긴 영상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카드 도박(바카라)의 ‘밑장빼기’ 현장의 영상도 황 소장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카드 게임 규칙도 잘 모른다”던 그가 ‘밑장빼기’ 기술의 순간을 포착해 낸 건 집요한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황 소장은 인터뷰에서 어떻게 타짜들의 ‘기술’을 증명해냈는지, 그 분석의 원리를 풀어 설명했다.

황 소장은 지금껏 수많은 의뢰인을 만나 왔다. 그는 “인간에 대한 실망과 희망이 수없이 교차했다”며“사건 현장의 기록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거짓된 믿음을 사실이라 믿는 소위 ‘리플리 증후군’을 겪는 경우를 마주해 왔다”고 했다. ‘진심을 다해’ 거짓말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이들을 보며 황 소장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성선설을 믿을까. 그가 분석하는 영상엔 예기치 않은 불행의 순간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그는 신(神)이 있다고 믿을까.

법영상 분석이 유명해지며 황 소장과 비슷한 일을 하는 이가 많다. 황 소장은 “무턱대고 아무나 찾아가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사건·사고를 겪은 이들이 법영상 분석을 의뢰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어떤 업체를 조심해야 하는지 등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진짜 분석가를 찾는 법을 전하며 “법영상 분석에서 중요한 건 기술보다 신념”이라고 했다. 이 밖에 잔혹하고 충격적인 영상을 지난 10여 년간 매일 접하며 겪은 트라우마와 내상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전문가로서 ‘실수’를 대처하는 법은 무엇인지 등도 말했다.

목차

1. 딥페이크 범죄, “피해자인 ‘우리’의 문제”
2. ‘밑장빼기’ 사기도박, 영상 분석 가능했던 결정적 증거
3. 법영상 감정 의뢰, 조심해야 할 다섯 가지
4. 사람을 때려놓고 울면서 “억울하다”고 말하는 이유
5. ‘그것이 알고 싶다’와 많이 다퉜다… 왜?
6. ‘세월호’ 트라우마, 상처를 극복했던 방법은
7. 법영상 분석, 기술보단 신념이 중요한 이유

앞서 상편 〈성추행 누명 쓴 배우 살렸다… 0.03초 진실을 찾는 남자〉에서 황 소장은 크고 작은 분쟁에서 ‘법영상 분석’이 필요한 순간은 언제이고, 그 분석 기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소개했다. 황 소장이 이끄는 법영상분석연구소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등 국가기관과 다른 점, 연구소를 회유하거나 유리하게 이용한 사례 등을 상세히 전했다. 또 ‘곰탕집 성추행’ 사건 등 여러 유명한 사건에서 자신만의 영상 분석 기술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CCTV와 블랙박스가 늘었는데도 성추행 등의 분쟁은 왜 더 해결이 어려워졌는지, 영상 분석가로서 재판에서 판사·검사·변호사·피고인들과 영상 증거로 어떻게 맞섰는지 등을 전했다.

‘그알’ 법영상 분석가의 일과 삶

상편: 성추행 누명 쓴 배우 살렸다…0.03초 진실을 찾는 남자
하편: “이게 밑장빼기?” 판사 놀랐다…60억 털어간 딜러의 팔꿈치

“딥페이크 범죄, 문제는 ‘우리’한테 있다” 
딥페이크 영상이 문제가 되고 있다.
사진이 생겨난 이후 이미지 조작은 늘 있던 문제다. 그런데 딥페이크가 이슈가 된 건 일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딥페이크는 피해자인 ‘우리’의 문제다. 보통 남들에게 계좌번호, 신분증, 주민등록번호, 집주소 같은 개인정보를 안 알려주지 않나. 이제 ‘얼굴’도 개인정보인데, 이걸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다 올린다. 합성의 ‘먹잇감’을 제공하고, 범죄자들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가져다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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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대응책은.
방법은 딱 하나다. 얼굴을 인터넷에 안 올리는 거다. 딥 페이크 영상을 만들려면 얼굴 360 모든 장면이 수백 컷 필요하다. 그걸 알고리즘에 태우면 실시간으로 매핑(mapping)해 똑같은 얼굴을 만든다. 이 얼굴 소스는 인터넷에서 가져온다. 딥 페이크 프로그램을 없애면 좋겠지만, 처음 개발한 의도는 선한 목적이었기에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유튜브에 영상을 올릴 거면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책임을 안 지겠다는 건, 통장 사본을 올려놓고 ‘대포 통장 만들지 마’, 주민등록번호 공개해 놓고 ‘개인정보 조회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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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얼굴도 개인정보’라는 관점은 낯설다.
낯설다. 하지만 이젠 개인정보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정치인, 연예인은 크게 신경 안 써도 된다. 이들은 얼굴을 내놓고 돈를 번다. 본인이 아닌 걸 사람들이 금방 검증해 준다. 근데 일반인들 피해가 크다. “내가 아니다”고 말할 창구가 없고 그렇게 주장해도 믿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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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이런 변화에 맞는 대응법도 있지 않을까.
없다. “내 얼굴이나 몸 사진이 이용당했어요”라고 해서 감정서를 써줘도 유포되면 그걸로 끝이다. 최근 AI를 활용한 애플리케이션으로 얼굴을 카툰화하거나 예쁘게 만들어준 사진을 올리는데, 그 사진들도 애플리케이션에서 가져다가 나쁜 의도를 갖고 일부를 활용할 수 있다. 위험하다.

판별과 검증이 쉬워지지 않을까.
딥페이크 검증 프로그램도 의미 없다. 유포되면 그 순간 끝이다. 아무리 말해도 안 믿는다. 딥 페이크 사진을 이용하는 이들은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냥 ‘놀이’다. 나에게도 “사건 많이 들어오느냐”고 묻곤 하는데, 딥 페이크 사건 의뢰는 별로 없다. 퍼지는 순간 끝났기 때문에.

카드 ‘밑장빼기’ 도박 영상 분석이 가능했던 결정적 증거 
‘밑장빼기’ 영상도 분석했던데.
어떤 분이 캄보디아에서 바카라 도박을 했다. ‘3일간 60억을 날렸다’며 변호사가 연락해 왔다. 도박 사건이라 사건을 안 맡으려고 했는데, ‘밑장빼기’만 밝혀지면 무죄가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법적으로 따져보면, 누군가 사기를 쳐서 돈을 잃으면 그게 도박으로 성립하지 않고 도박에 참여한 사람이 피해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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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그래서 나는 “‘밑장을 뺐는지’는 기술의 영역이라 잘 모르고, 게임 규칙을 모른다”고 하니 피해자 측에서 게임별 승패와 잃은 금액을 기록한 자료를 건네줬다. ‘밑장빼기’ 기술자도 섭외해 시연했다. 그러고 나서 사건 영상을 보니 ‘밑장’을 뺄 때만 다른 패턴이 보였다. 팔꿈치가 들렸다. 또 밑장을 들어올리면 카드가 살짝 올라가 음영이 생겼다. 카드를 누르기 때문에 카드 슈(shoe)박스가 살짝 뒤로 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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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그래서 피해자가 게임에서 질 때마다 딜러가 보여준 그 행위의 패턴을 정상적인 때와 비교해 재판부에 보여줬다. 증거로 인정됐다. 판사도 “재밌다”고 했다. 방청객과 검사도 놀랐다. 얼마 후 재판에서 무죄가 나왔다. 이후 검찰에선 불법 도박한 이들을 추적해 잡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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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반복 시청의 결과인가.
이론을 공부하고 영상에서 보이는 특이점을 파악했다. 화질을 개선해 주파수를 분석했다. 팔의 각도가 달라지는 걸 프레임별로 중첩해서 분석했다. 밑장을 뺄 때마다 한쪽 팔이 유독 들리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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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분석하며 알아낸 건데, 딜러가 이길 때만 밑장을 뺀 게 아니었다. 져줄 때도 밑장을 뺐다. 그러다 피해자가 돈을 크게 걸면 그때 기술을 쓴다. 한꺼번에 돈을 잃으면 피해자들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조금씩 가져가고, 져주기도 한다. 타짜들은 이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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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카드 밑면 음영까지 영상에 나오나.
육안상 음영이 안 보인다. 확대해도 그 간격이 잘 안 보인다. 다만 픽셀 단위로 보면 주파수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벌어지는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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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밑장을 뺄 때만 픽셀 레벨에 차이가 난다. 카메라는 0.03초에 한 프레임씩 찍는다. 카메라에 안 찍히려면 0.03초 안에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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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신다은

법영상 감정 의뢰, 조심해야 할 것 다섯 가지
직접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나.
최근에 “(감정서를 원하는 방향과) 반대로 써줬다”고 소송을 건 의뢰자가 있다. 또 “원하는 대로 감정 결과를 바꾸지 않으면 허위 사실로 고소하겠다”거나 유리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찰에선 내사 종결했다. 사이비 종교에 명예훼손으로 민사소송을 당한 적도 있다. 승소했다.

영상 감정 의뢰할 때 조심할 점은.
유사한 일을 하는 법영상 분석가들이 많아지는데, 그들의 감정서를 본 적이 있다. 깜짝 놀랐다. ‘변호인 의견서’였다. 돈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 같다. 의뢰할 때 조심할 게 몇 가지 있다. 홈페이지 등에 가보면 얼굴이 안 나와 있다. 분석가 이름도 정확하게 없다. 학위나 이력도 불분명하다. ‘우리는 억울한 사람을 도와줍니다’라고만 돼 있다. ‘글(감정서)만 써주고 유리하게 해석해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어차피 법원에 증인으로 끌려가서 검증받는다. 그래서 법원에 안 가려고 하거나 추가 비용을 청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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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최수아

사람을 때려놓고 울면서 “억울하다”고 말하는 이유
사람 파악하는 일에 도가 텄을 것 같다.
아니다. 점점 더 어렵다.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라고 계속 어떤 믿음을 가지면 실제 그렇게 여기는 현상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를 봤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문화센터 직원과 싸우다 그 직원을 때렸는데, 둘이 CCTV 영상을 보며 “증거 영상이 조작됐다. 억울하게 둘 다 유죄”라며 두 분이 껴안고 펑펑 울었다. 그러면서 “왜 영상에 이게 있는지를 분석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영상을 누가 조작했느냐”고 물으면 “경찰이 문화센터와 한편이고, 문화센터에서 조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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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최수아

망상인가.
논문을 하나 쓰고 싶은 게 이 주제다. 리플리 증후군에 대해 지금껏 학자가 많이 공부했는데, 이런 상황을 영상으로 본 셈이다. CCTV를 보여줘도 “우리 둘의 기억과 완전히 다르다. 손도 안 댔다. 우린 피해자”라며 울면서 증거를 내민다. 아버지는 “영상 속에서 가해자가 빨간 목도리를 하고 있는데, 내가 차고 있던 건 검은색”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착각한 것 아니냐. 집에 빨간 목도리가 있지 않으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아들이 봤다”고 한다. 아들도 “아버지 그때 검은 목도리를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영상이 조작된 것만 밝혀주면 평생 은인으로 삼겠다고 한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나.
이제 사람을 아예 안 믿는다. 그리고 안쓰럽다.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며 우리 뇌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하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좌절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기억이 다 바뀌어서 내게 왔다. 그래서 이젠 ‘사람의 기억은 믿을 수가 없다. 나의 기억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오직 믿을 건 영상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조작됐던 영상은 없었나.
지금까지 맡은 사건 중에 조작된 영상은 없었다. 그래서 ‘조작이 안 됐다’고 써주면 진짜로 “사기꾼” “거짓말쟁이”라고 욕을 하며 “TV 나온 거 다 거짓말이고 맨날 정의롭고 진실만 얘기하는 것처럼 얘기해 놓고 거짓말한다” “너도 경찰하고 한 편이다”라고 화를 낸다.

‘그것이 알고 싶다’와 많이 다퉜다. 왜?
황 소장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탔다. 지금껏 그가 분석한 영상은 여러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됐지만, 인터뷰가 늘 방송에 나간 건 아니라고 했다. “‘그알’ 제작진과 의견 차이로 대립한 적도 많다”고 했다.

분석 코멘트가 방송에 안 나가는 경우도 있었나.
‘컷’을 많이 당했다. 분석한 대로 말하면 방송에 안 쓰는 경우가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분석을 통해 “이렇게 보인다”고 하면 제작진에서 ‘이게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안 쓰는 것 같다. 그렇다고 분석할 때 (그알에) 유리하게만 (분석)해 주지 않는다. 아마 ‘그알’에 나오는 모든 분이 프로그램 방향에 부합하게, 유리하게만 인터뷰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은 전문가다.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 방향성 문제 외에 오해 소지가 있거나 흐름상, 분량상 이유로 빠진 적도 있다. 제일 큰 이유는 ‘싫은 소리’를 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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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이경은

분석 과정에서 실수한 적도 있나.
공학을 전공해서 논문을 쓰다 보면 무수히 많은 실험을 반복하는데, 실수가 반복돼야 제대로 된 게 나온다. 실수를 인정 안 하면 발전이 없다. 잘못했을 때 안 고친다. 실수를 인정하고 “수정하겠다”고 말할 용기가 있으면 다음부터 실수를 안 한다. 근데 대부분 임기응변으로 실수를 가리려고 한다. ‘내가 박사고, 권위자인데 (실수가) 알려지면 내가 뭐가 돼?’라는 생각으로 ‘이건 실수가 아니고 원래 이런 거야…’라고 계속 ‘포장’한다. 다른 일이 생기면 또 포장한다. 포장은 쉽다. 반성하고 고치겠다고 말하는 게 어렵다.

그런 실수들이 커리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일까.
사실 아무 영향이 없다. 실제 한 사건을 맡았을 때 한 변호사가 잘못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죄송하다. 실수했다”고 말하니 그 변호사가 쿨하게 “고쳐 달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실수해야 결과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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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이경은

‘세월호’ 트라우마, 상처를 극복했던 방법은…
황 소장은 지금도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면 무섭다고 했다. 의뢰인이 바라는 결과에 반하는 감정서를 내놓을 땐 위협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들도 황 소장의 일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만 써주면 그런 위험이 없겠지만, 원하는 대로만 썼으면 사기꾼이고, 이만큼 못 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매일 처절한 사건·사고 영상을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내상이 생기진 않았을까.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나.
피해자가 죽어가는 과정을 다 본다. 그래서 처음엔 분석 끝나고 재판 끝나면 꼭 아는 선배, 친구를 불러 술을 엄청 마셨다. 요즘엔 안 그런다. 10년이 넘으니 일상이 됐다. ‘세상을 알면 놀이터고 세상을 모르면 지옥’이라는 말이 있는데, 힘들지만 이게 나의 ‘놀이터’가 됐다. ‘영상 속에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이 억울한 상황을 잘 보여줄까’를 고민하지, ‘무서워서 못 보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나도 모르게 정신적인 내상이 생겼을 텐데.
그런 건 있다. 잔상이 보일 때가 있다. 그게 언제 많이 없어졌냐면 세월호 참사 영상 분석 이후다. 당시 세월호 수중수색 영상을 다 봤다. 진짜 하기 싫었다. 트라우마의 끝이었다. 자면서도 보였다. 고소공포증에 걸려 육교도 못 올라갔다. 강화도 마니산을 계단으로 오르는데, 벌벌 떨며 난간을 손잡고 올라갔다. 근데 그때 문득 ‘희생자들을 무서워할 게 아니고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건을 잘 분석하고, 죽어서 희생자들을 만났을 때, 악수하고 포옹하면서 ‘아저씨 잘살아왔다’는 얘기를 할 생각을 하니 공포가 많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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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이경은

황 소장은 “1년에 3~4건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무죄를 받거나, 판결문에 이름이 들어가면 희열을 느낀다”며 “40~60년 남은 인생을 죄인으로 살 뻔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줬다는 보람으로 일을 계속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 희열의 순간은 잠깐 아닌가.
낚시꾼도 ‘대어’ 한번 잡겠다고 하루종일 낚시터에 가지 않나. 똑같다. 먹고살 만큼은 벌긴 하는데, ‘내 가족이 저렇게 당했으면 어떡할까’라는 생각에 계속 일한다. 1년에 몇 차례 “고맙습니다. 무죄 나왔습니다”라는 전화를 받으면 그날은 집에서 소주를 마신다.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 자주 접했다. 신의 존재를 믿나.
불행을 겪은 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보며 진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로 차 범퍼가 깨졌는데, 민사소송을 하며 “억울하다. 살려달라”며 죽으려고 한다. 반면에 어떤 분은 “아버지가 나쁜 사람에게 맞아 사망했다”며 억울해 한다. 사건 크기 차이는 엄청 크지만,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겐 자기 일이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다만 그런 일은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럴 때 ‘얼마나 대범하게 일을 해결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사건이 생기면 ‘벌어졌구나’ 해야지,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겨? 내 팔자가 불쌍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 그보다 더 팔자 안 좋은 사람 수도 없이 봤다. 그런 말을 하는 분이 제일 좋은 팔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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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이경은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떤 걸 믿나.
성선설을 믿는다. 사건들을 보면 환경이 안 좋게 좌우한다. 좋은 부모님, 좋은 친구들 곁에서 잘 자란 친구들도 한순간에 도박, 마약에 빠져 패가망신한다. 태어날 때부터 나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반면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는 분들도 많다. 다만 (사법) 시스템상 사과를 해도 받아주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 있다. 결국 살려면 영상 분석을 통해 범죄를 안 저질렀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법영상 분석, 기술보단 신념이 중요한 이유
확고한 영역을 구축했다. 앞으로 10~20년은 너끈할 것 같은데.
후계자를 키워 물려주고, 자문 역할을 하고 싶다. 근데 기술은 6개월이면 다 배운다.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본 걸 본 대로 말하는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법부터 신념을 지키는 법이 중요하다. 그게 지난 10년, 나의 자산이다. 기술은 자산에 안 들어간다. 기술보다 신념 있는 후배를 키우고 싶다. 또 한국 최초의 법영상학 개론서를 쓰고 싶다. 아직 한국에 이 책이 없다.

 


중앙일보    발행 일시2024.11.15   에디터  김태호  이경은  조은재  신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