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상식

삶이 한계에 다다를 때 묻는다… ‘품위 있는 죽음’이란?

해암도 2024. 2. 25. 08:33

초고령사회서 커지는 안락사 허용 논란

 
이달 초 개봉한 ‘소풍’은 김영옥·나문희·박근형 등 노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저예산 영화로, 존엄사에 대한 질문을 정면으로 제기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노인들은 많이 공감할 것이다. 존엄사가 빨리 허용됐으면 한다.”

 

87세 배우 김영옥씨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 ‘소풍’이 존엄사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한 말이다. 그는 “100세 시대라지만 건강을 잃고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없을 때의 불행은 대처할 길이 없다”고 했다.

 

‘소풍’은 인생의 한계에 몰린 노인들의 마지막 선택을 그렸다. 관객들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펑펑 울었다”면서도 “부모님과 함께 보기엔 무겁고 불편한 내용”이라고 한다.

 

품위 있는 죽음, 웰다잉(well-dying)이란 이름의 당의정. 존엄사 또는 안락사를 둘러싼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안락사는 불치병 등에 걸려 치료 및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될 때 직간접적 방법으로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의료 기술 발달로 수명은 획기적으로 늘어났지만, 건강과 젊음이 그에 비례해 연장되진 않았다. 그런 때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고 스스로 결말을 선택하는 게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란 인식이 커지고 있다.

 

이달 초 93세의 드리스 판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와 외헤니 여사 부부의 동반 안락사 소식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들은 자살을 금기시하는 가톨릭 신자였는데도 “너무 아팠다. 서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며 동시에 떠났다.

지난 2월 5일 동반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와 부인 외제니 여사의 생전 모습. /텔레그래프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는 네덜란드와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미국 일부 주(州) 등 손에 꼽는다. 이게 최신 글로벌 트렌드처럼 우리 사회를 파고들고 있다. 외국인에게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에서 마지막을 맞겠다며 관련 단체에 가입한 한국인은 300여 명. 이미 10여 명이 스위스로 날아가 생을 마감했다.

 

우리나라는 내년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서며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 유례없는 저출산·고령화 속도와 맞물려 안락사에 관한 사회적 논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2000년대까지도 안락사는커녕,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한 연명 의료 중단조차 ‘부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간주됐다. 2009년 세브란스병원의 식물인간 환자에게서 가족과 의료진이 인공호흡기를 뗀 일명 ‘김 할머니 사건’은 격렬한 논란을 낳았지만 결국 대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국회에서 연명의료결정법이 통과되기까지 또 오랜 진통을 겪었다.

 
 
지난 2022년 서울대병원이 발표한 안락사 찬반 국민 여론조사. 당시 찬성 여론은 76%였는데, 이 비율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조선일보DB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이 발효되고 만 6년이 지난 현재, 전국 200만여 명이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에 서명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에게만 허용된 연명 의료 중단 대상을 확대하라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미리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해 두지 않았거나 동의할 가족이 없는 1인 가구와 무연고자는 뜻대로 죽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지적마저 나오는 지경이다.

 

더 적극적으로 생명을 끊는 안락사에 대한 여론도 확대되고 있다. 2022년 서울대병원 조사에서 국민 76%가 안락사 허용에 찬성했다. 같은 해 국회에선 조력 존엄사, 즉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연명의료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그리스어(euthanasia)로 ‘아름다운 죽음’을 뜻하는 안락사. 그러나 안락사 허용은 생명 경시 풍조를 확산시키고 상속·보험 사기 등 범죄에 악용될 위험, 불치병에 대한 오진 가능성 등 여러 부작용을 안고 있다. 나이에 따른 차별이 적고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서구 선진국의 제도가 이 땅엔 다르게 이식될 수 있다. ‘노인(혹은 장애인)은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많고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문화에서, 안락사는 가족과 사회가 노인의 등을 떠미는 ‘현대판 고려장’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달 초 국내 개봉한 일본 영화 '플랜75'의 한 장면. 초고령사회를 맞은 일본이 75세 이상 노인의 안락사를 국가에서 지원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플랜75

 

‘소풍’과 나란히 개봉한 일본 영화 ‘플랜 75′는 75세를 넘긴 노인의 안락사가 제도화된 초고령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안락사는 결국 가난한 노인들에 대한 합법적 인구 말살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미 한국의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다. 노인이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품위 있는 죽음부터 서두르는 것이 온당한가. 무겁게 묻고 또 물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