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땅을 치며 슬퍼하는 자, 왜 행복한가"…故차동엽 신부가 찾은 답

해암도 2023. 2. 17. 06:45

백성호의 궁궁통통

과거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 인 난곡에서 자란 고(故) 차동엽(2019년 선종) 신부는 연탄과 쌀 배달을 하며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힘겨운 삶에 대한 이해를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중앙포토]

 

#궁궁통1

고(故) 차동엽(2019년 선종·노르베르토) 신부는 서울 관악산의 달동네인 난곡에서 자랐습니다. 좁은 골목에 가난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였습니다. 차 신부는 난곡에서 연탄과 쌀 배달을 하며 유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차 신부는 힘겨운 삶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차 신부는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가톨릭 신학대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찾고자 했던 삶에 대한 물음을 다른 곳에서는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차 신부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 오스트리아 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성서신학으로 석사, 사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성경 말씀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내놓곤 했던 차 신부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안목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차 신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학생 때 사색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상당수 그때 가졌던 생각입니다.”

 

#궁궁통2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설했다고 전해지는 ‘산상수훈’의 팔복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팔복 중 두 번째 복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나요? 왜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며, 왜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는 걸까요. 도대체 그 위로는 누가 주는 것이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우리에게도 삶의 고비마다 슬픔이 닥치지만 그때마다 위로가 밀려오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고통의 파도가 밀려올 때가 더 많지 않나요? 이 대목에는 도대체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걸까요. 그걸 차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궁궁통3

신약성경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됐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했던 아람어로 기록된 신약성경도 있었을 거라 보지만, 아직 발견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예수님 원래의 어록에 가장 가까운 셈입니다.

 

차 신부는 그리스어로 ‘슬픔’을 먼저 설명했습니다. “마태오(마태) 복음에서는 ‘슬픔’을 그리스어로 ‘펜툰테스(Penthountes)’라고 썼다. 이건 상실의 슬픔을 뜻한다. 사별 등 소중한 걸 잃은 극심한 슬픔을 뜻한다.”

‘산상수훈’은 루카(누가) 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슬픔에 ‘클라이온테스(Klaiontes)’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클라이온테스’는 땅을 치면서 우는 걸 뜻한다.” 땅을 치면서 우는 일, 우리말로 하면 ‘통곡’쯤 되지 않을까요. 그럼 히브리어로는 뭐라고 불렀을까요. 그 정도로 복장이 터지는 슬픔은 “히브리어로 ‘사파드(Sapad)’다. 애통해 우는 걸 뜻한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썼을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고, 우는 건 표출이다. ‘사파드’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통합돼 있다.”

 

#궁궁통4

저는 슬픔에 대한 물음을 이어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한가?” 차 신부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위로’에 있다. 이 ‘위로’가 어디에서 오는 위로인지 알아야 한다.”

 

차 신부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으려 했다. ‘하느님’이란 주어를 사용하지 않으려면 수동태 문장을 써야만 했다. 주어를 생략하기 위해서다. 그럼 이 구절의 주어는 무엇이겠나. 그렇다. 이 위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가 된다.”

 

차 신부는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거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 말이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고통이 와도,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된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까.”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3.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