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태화강에 자연주의 정원 만든
세계적 디자인 거장 피트 아우돌프
가을꽃 만개한 10월의 한낮, 울산역에 내렸다. 네덜란드 출신 세계적인 정원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Piet Oudolf·78)가 조성한 ‘자연주의 정원’이 막 완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울산 태화강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우돌프는 ‘도심 속 하늘 공원’이라는 뉴욕 하이라인(High Line) 파크를 디자인한 거장이다.
버려진 철길을 풀·갈대·야생화 가득한 산책로로 바꿨다. 계절마다 역동적으로 달라지는 풍경에 매료돼 매년 500만 명이 찾는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루리 가든, 뉴욕 맨해튼 남쪽 배터리 파크,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파빌리온의 정원, 독일 바일 암 라인의 비트라 캠퍼스까지 세계 주요 공공 정원이 이 남자의 손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태화강 국가정원 안에 1만8000㎡ 정원을 조성했다. 총괄 조경가 바트 후스(Bart Hoes·65)와 정원 디자이너인 그의 이름을 함께 넣은 ‘후스·아우돌프 울산 가든’. 아우돌프의 작품을 소개한 화보처럼 각종 야생화와 풀이 층층이 물결치는 장관을 기대했더니, 웬걸! 막상 도착해보니 광활한 황토색 대지 위에 이제 막 심은 초록색 모종의 흔적만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맞는 건가. 태화강 국가정원 국제 학술 토론회 참석차 지난주 울산에 온 아우돌프는 껄껄 웃으며 “이런 정원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당황스럽겠지만, 이 생경한 풍경이 바로 정원의 시작”이라고 했다.
◇거장을 감동시킨 태화강의 기적
-‘정원의 시작’이라니 무슨 말인가.
“어떤 정원은 다 자란 식물을 식재하기 때문에 공개하는 순간 ‘와~’ 하고 감탄이 나오지만, 내가 추구하는 정원은 그런 게 아니다. 한 계절만 꽃피는 동일한 식재 패턴에서 벗어나 다양한 식물을 조화롭게 배치해 사계절 내내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식물의 탄생부터 성장 과정, 쇠락과 죽음에 이르는 순환을 보여주는 게 정원이다. 모종을 심었으니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빠른 건 내년 봄부터 필 거고, 1년 뒤면 윤곽이 갖춰질 거다. 2년 뒤에 절정을 이룰 거다.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만개하면서 서로 다른 풍경을 빚어낼 거다.”
-왜 아시아 첫 작품으로 울산을 택했나.
“내가 아니라 울산이 나를 택했다(웃음). 사실 처음 제안을 받고 한국에 어떤 식물종이 자생하는지 몰라 망설였다. 2019년 오랜 벗이자 후배인 바트 후스에게 먼저 한국에 가서 장소와 기후, 주변 환경을 확인해달라고 했다. 후스는 특히 입지 조건과 주변의 대나무 숲 경관, 태화강 이야기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식물이 잘 자라는 여건이라는 말에 자신감이 생겼다.”
아우돌프는 세계 유명 도시의 러브콜에도 쉽게 응하지 않을 정도로 작품 후보지 선정에 까다로운 편이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기적 같은 태화강의 변신 스토리. 태화강은 2000년대 초까지 생활 오수와 공장 폐수로 몸살을 앓아 ‘죽음의 강’으로 불렸다. 1990년대 공장 오·폐수가 정화조를 거치지 않은 채 강으로 쏟아졌고, 해마다 죽은 물고기 수만 마리가 떠올랐다.
울산시는 2004년 ‘생태 도시 울산’을 선언하고 태화강 부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울산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수중 쓰레기 제거 등 정화 활동에 나섰다. 10여 년 후 태화강은 은어·연어·고니 등 10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명의 강’으로 부활했다. 2019년 7월 1일 전남 순천만국가정원에 이어 국내 두 번째 국가정원으로 지정되면서 ‘태화강 국가정원’(83만5452㎡)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는 “공업도시로 황폐화된 환경을 시민들의 힘으로 복원시켰다는 이야기에서 열정을 느꼈다”며 “정원이 도시에 생명력과 자연의 감성을 더 불어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 국화 밭이었던 후스·아우돌프 가든은 지난해 기반 공사를 거쳐 올해 9월 말부터 국내외 정원사 24명과 울산 시민 600여 명이 참여해 122종 4만8000여 본의 식물을 심었다. 울산 자생식물인 ‘벌개미취’ ‘참당귀’ ‘돌마타리’ ‘맥문동’을 비롯해 ‘칼 푀르스터’ ‘리틀 스파이어’ ‘후멜로’까지 국내선 다소 생소한 식물들도 네덜란드에서 들여와 심었다.
-울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식재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원봉사자들의 역할이 정말 컸다. 훈련된 정원사의 안내에 따라 많은 분이 정성껏 심어줬다. 공공 정원은 면적이 클수록 자원봉사자가 많이 필요하다. 처음 정원을 조성할 때뿐 아니라 유지·관리하는 데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계속 필요하다. 처음 울산시에서 프로젝트를 제안 받았을 때 항구적으로 유지 보수가 담보될 것이 우선 조건이었다. 뉴욕 하이라인 파크를 비롯해 내가 만든 공공 정원은 자발적으로 꾸려진 시민 조직의 열정적인 참여로 완성, 유지된다.”
이날 현장을 안내한 국내 조경업계 관계자는 “한국에서 공공 정원을 조성하면서 이렇게 작은 모종부터 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내 전문가들도 늘 모종부터 심고 싶어하지만, 발주처에서 허락을 안 한다. 공개하자마자 짠 하고 완성품이 드러나야 하니까. 그런데 아우돌프는 생명이 올라오는 과정 자체를 즐기라고 그 뜻을 관철한 것”이라고 했다.
◇대지 위에 식물로 그림 그리는 남자
사람들은 그를 “붓 대신 식물로 그리는 예술가”라고 말한다. 화가가 미술관을 통해 신작을 발표한다면, 그는 세계 곳곳 도시와 대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수장고에 보관할 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작품이다. 아우돌프는 “단지 화려한 꽃이 있다고 해서 정원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모든 식물이 조화롭게 협력할 때 특별한 분위기가 완성된다”고 했다. 그만큼 식물을 철저히 연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경지다. 하이라인 파크의 총괄 조경가 제임스 코너는 “내공 있는 화가가 물감에 대해 잘 알고, 경험 많은 셰프가 식재료를 알듯이 그는 식물을 잘 아는 사람”이라며 “홀로 심었을 때 어떻고 다른 식물과 조합하면 어떤 효과를 내는지 꿰뚫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처음 식물에 관심 갖게 됐나.
“바텐더, 생선 도매업, 철강 노동, 웨이터 등을 전전하다 25세에 가든 센터에서 일하면서 식물과 사랑에 빠졌다. 본격적으로 조경을 공부했고 1975년 정원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2년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후멜로의 농가를 구입해 아내와 함께 이사했다. 4000㎡ 땅에 정원을 만들고 육묘장과 원예상을 운영하면서 정원 디자인에 필요한 다양한 식물을 직접 재배하고 실험했다.”
-화려한 꽃에 치중하던 전통 가드닝 방식에서 벗어났다.
“당시만 해도 전통적인 영국식 정원이 대세였다. 형형색색 꽃으로 화려함에 치중한 디자인을 보면서 무언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최대한 자연 생태계와 가깝게 구성하고 싶었다. 당시까지 정원에 잘 심지 않는 식물들, 야생이라며 원예상에서 취급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거칠지 않고 아름다운 식물이 많았다. 1991년 새로운 세대를 위한 정원 식물 1200종을 소개하는 책을 냈다. 이제 30년이 흘러서 그 식물들은 어디에서나 구입할 수 있게 됐지만(웃음).”
-여러해살이풀도 그 목록에 들어 있었나.
“물론이다. 원추리, 비비추 등 겨울에 땅 윗부분이 죽어도 이듬해 봄 새싹이 돋아 여러 해 살아가는 풀을 말하는데, 생명력이 강하고 주변 환경에 잘 어울리기 때문에 즐겨 심는다.”
아우돌프의 이런 철학은 ‘새로운 여러해살이풀 심기 운동(New Perennial Movement)’이라는 말을 들으며 정원과 식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정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배제되던 다양한 식물을 끌어들여 자연 본연의 감성을 표현하는 게 일종의 트렌드가 됐다. 그는 “겉모습은 야생 그대로의 자연 느낌을 내지만, 야생 그대로 놔두면 안 된다. 밑바탕에서 철저히 계획되고 관리된 결과물”이라고 했다.
-디자인 과정이 궁금하다.
“우선 간단한 스케치로 시작한다. 전체적인 레이아웃이 마음에 들면 더 큰 도면을 그린다. 첫 단계로 여러해살이풀 화단을 만들고, 식물 리스트를 만든다. 50~60개 정도가 모이면 위계를 생각해서 중심 역할을 담당할 식물을 선택한다. 6월 이전에 개화하는 식물들, 가을에 개화하는 식물들, 나머지 식물로 그 사이의 빈 간격을 채운다. 도면 작업을 할 때는 조감도처럼 위에서 바라보지만, 실제 작업을 할 때는 눈높이로 돌아본다. 사람들이 정원을 구석구석 거닐 때 어떻게 보일지 상상하는 것이다.”
-조연이 없고 모두가 주인공이겠다.
“그렇다. 식물들은 주어진 체계 안에서 각자 고유한 자리를 지킨다. 이런 구상을 하려면 모든 식물의 특징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언제 싹이 나고 꽃이 피는지, 또 어떻게 겨울을 나는지도 알아야 한다. 어떤 식물은 오랜 시간 피어있다가도 해 질 녘에 사라지고, 어떤 식물들은 오로지 더 큰 식물들 사이의 공간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다가 큰 식물들이 활짝 필 때쯤 사라진다. 그들만의 체계적인 방식이 있는 거다.”
◇도시 경관까지 바꾼 하이라인
아우돌프가 처음 맡은 공공 프로젝트는 1994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보태니컬 가든이었다. 정원의 경계 부분 식재를 맡았다. 그에게 일을 맡긴 담당자는 가을 내내 터를 닦으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이듬해 착공 당일, 스케치 하나 없이 나타난 그는 복잡한 식물 배치를 척척 진행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이미 식물의 위치와 모습이 자리 잡혔기 때문이다.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다. 2000년엔 첫 북미 데뷔작으로 맡은 시카고 루리 가든에서 세계적인 건축가, 조경팀과 협업하며 정원 디자이너에 대한 시선을 바꿔놓았다. 밥티시아, 에링기움 등 그가 심은 북미 자생종을 통해 미국 내에서 자국 식물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루리 가든을 산책하면서 봄이면 구근식물, 여름이면 만개하는 여러해살이풀, 가을엔 야생화의 씨송이를 감상하기 위해 발길을 멈춘다. 겨울이면 씨송이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이 새하얀 실루엣을 돋보이게 한다.
-당신을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건 2009년 공개된 뉴욕 하이라인 파크다.
“40년간 방치돼있던 철로를 공원으로 꾸민다는 아이디어는 당시만 해도 획기적이었다. 뉴욕 한복판에 공중 높이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프로젝트를 이끈 조경가 제임스 코너의 제안을 받고 삼림 지대와 대초원의 느낌을 살리되 2.2㎞에 이르는 길을 여러 섹션으로 나눠 구간마다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게 했다. 어떤 구간엔 미국 자생종을 주로 심었고, 벽을 따라 성장하는 담쟁이덩굴도 사용했다.”
-지금도 유지 보수에 계속 관여하고 있나.
“물론이다. 루리가든은 2년마다 직접 점검하러 간다. 현지 담당자와 매달 이메일로 연락하고, 영상 통화도 규칙적으로 한다. 현지에서 정원 도면 위에 ‘이 식물은 잘 안 되니 바꾸고 싶다’ ‘이 식물은 2주가 지나면 볼품 없다’ 같은 메모를 보내면, 답을 적어 보낸다. 하이라인은 매년 방문해서 한 구간씩 집중 점검한다. 정원사를 만나서 관리에 필요한 게 뭔지 아이디어를 주고 의견을 나눈다.”
-가장 아름다운 건 영국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 정원이더라.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정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까지 쉼 없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활짝 핀 꽃뿐 아니라 식물의 골격, 변화하는 색감이 모두 영감의 요소로 작용한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의외로 겨울이다. 생동감 넘치는 칼라도 좋지만, 갈색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갈색의 시간이 지나야 초록색을 볼 수 있으니까.”
-수많은 작품 중에 정원을 단 하나 꼽는다면.
“하이라인 파크가 나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하지만 오래갈수록 사람들이 관심 가져주는 정원이 내겐 더 중요하다. 시카고 루리가든은 벌써 20년이 지났고, 영국 위슬리 가든은 26년 지난 지금도 멋스럽다. 사람들은 정원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걸 잘 모른다. 설계만 잘 하면, 관리에 필요한 노력도 줄일 수 있다.”
-‘다섯 계절: 피트 아우돌프의 정원’이라는 다큐를 보니 정원을 인생에 비유하더라.
“생명의 탄생부터 성장,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인생과 닮지 않았나. 영화는 정원의 아름다움이 최고조에 이르는 가을에서 시작해 겨울, 봄, 여름을 거쳐 다시 가을에서 끝난다. 사람에게는 한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이 정원에서는 일 년 동안 이루어진다. 그런 순환 과정이 우리 마음속에 어떤 울림을 주는 것 같다.”
◇55년 우정, 울산에서 결실
이날 인터뷰에는 조경가 바트 후스와 피트 아우돌프를 울산에 섭외한 천지식물원 이현수 실장이 동참했다. 후스는 55년 전 아우돌프와 함께 찍은 앳된 모습 사진을 보여주며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열 살, 그는 스물세 살이었다.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오랜 인연이 이번 작업을 만들었다”며 “그는 태화강에 조성한 정원에 내 이름을 앞세울 만큼 동료애가 따뜻하다”고 했다.
-둘의 작업이 어떻게 구분되나.
“그동안 각자 수많은 작업을 해왔지만, 함께하는 작업은 울산이 처음이다. 후스는 조경, 그러니까 전체 마스터 플랜을 짰고, 나는 어떤 식물을 골라서 어떻게 배치할지 식물 디자인을 했다. 물론 세부 진행 사항은 계속 의논했고, 둘 다 만족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대화해야 했다.”
-후스·아우돌프 가든에서 중점을 둔 것은 뭔가.
“사람들이 정원에 더 오래 머물게 하도록 곡선을 많이 주려고 했다. 일자로 이어지는 정원은 재미가 없다. 걸으면서 놀라운 식물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흐름을 만들었고, 같은 식물을 보더라도 반대쪽에서 걸어올 땐 다른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후스)
-발주처와 갈등하거나 여러 의견이 충돌할 땐 어떻게 조율하나.
“어떤 문제가 있든 솔직히 얘기를 하면 결국은 해결된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조율하며 풀어가는 게 또한 내 일이니까. 나는 굉장히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원래 그렇다(웃음).”
“형도 사람이니까 실수한다. 이번 일을 하면서 우리도 많이 싸웠다, 하하!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오해가 커지기 때문에 즉시 대화로 풀어야 한다.”(후스)
-방문객들이 정원에서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
“태화강 주변에 높은 아파트가 많더라. 도시인들이 늘 보던 국화 말고도 이곳에서 자연을 닮은 정원을 보면서 쉬어 갔으면 좋겠다. 당장 볼 것이 없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시라. 우리 인생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여정이기도 하지만, 첫눈에 아름답지 않은 무언가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것이기도 하니까.”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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