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유일 女 미쉐린 셰프
도미니카 출신 마리아 마르테
마리아 마르테(Marte·44)는 별명이 ‘미쉐린 신데렐라’다. 카리브해 섬나라 도미니카공화국 시골 마을 출신인 마르테는 최고의 요리사를 꿈꾸며 대서양을 건너 미식의 나라 스페인으로 갔다. 네 살 쌍둥이 남매는 부모에게 맡겨두고 여덟 살이던 큰아들만 데리고 감행한 도전이었다.
그는 레스토랑의 주방 밑바닥 접시닦이로 들어가 가장 높은 총주방장 자리까지 올랐고, 요리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미쉐린 스타를 2개나 받았다.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별을 획득한 라틴 아메리카 출신 여성 요리사는 그가 유일하다.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 마르테를 지난 7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만났다. 마르테는 한국-도미니카공화국 수교 60주년을 맞아 도미니카공화국의 맛을 소개하기 위해 지난 3~9일 방한했다.
-요리사인 아버지와 제과사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건가?
“아기 때부터 장난감보다 주방에서 조리 도구와 빵 반죽이나 식재료를 가지고 놀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 일을 도우며 요리를 배웠고, 이런저런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요리사로서는 상당히 늦은 나이인 25세에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도미니카공화국에 맛있는 식당은 있지만 고급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은 없었다. 세계 미식가들이 찾아와 맛보고 싶어하는 음식을 내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고향에는 그런 조리 기술을 알려주는 학교도, 일하며 배울 만한 식당도 없었다. 당시 ‘분자 요리’로 세계 미식 트렌드를 선도하는 스페인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하고 싶었다.”
-요리사가 아니라 접시닦이로 취직했다.
“요리 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지도 않았고, 도미니카에서의 경력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도 최고의 식당에서 접시닦이로라도 일하고 싶었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당시 가장 ‘핫’했던 ‘엘 클럽 아야르드(El Club Allard)’ 문을 두드린 이유다.”
-미용실에서 청소 일도 했다고.
“접시닦이 시급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잠잘 시간이 부족해 식당 주방 계단에 앉아 쪽잠을 잤다던데.
“총주방장 디에고 게레로(Guerrero)에게 ‘주방 일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거절당했다. 계속 조르자 게레로는 ‘손님을 받는 영업시간에 접시를 닦고, 나머지 시간에 밑 준비 작업을 돕겠다면 허락하겠다’고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영업이 끝나고 새벽 2~3시까지 일했다. 버스가 끊겨 집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아침에 버스 운행이 재개될 때까지 주방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잤다. 잠이 늘 부족한 때였다.”
-그런데 어떻게 총주방장에게 3개월 만에 인정받고 요리사로서 정식으로 일하게 됐나.
“하루는 한 요리사가 깜빡하고 저녁에 낼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손질해 놓지 않았다. 내가 그걸 봤지만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재료 손질을 대신 해뒀다. 저녁이 되자 주방에서 난리가 났다. 내가 손질해둔 재료를 꺼내 놓았다. 게레로가 레스토랑 경영진에게 ‘접시닦이를 새로 구해달라. 마르테는 앞으로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 뛸 듯이 기뻤다.”
마르테는 타고난 재능과 성실함으로 3년 만에 게레로의 오른팔이 됐다. 게레로와 마르테는 미쉐린으로부터 별 2개를 받으며 클럽 아야르드를 마드리드 대표 식당으로 키웠다. 2013년 게레로가 클럽 아야르드를 떠나자, 경영진은 마르테에게 총주방장을 맡겼다.
-미쉐린 2스타를 지켜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청났을 듯하다.
“다음 해 미쉐린 가이드 발표가 날 때까지 제대로 잠도 못 잘 만큼 초긴장 상태였다.”
-그때 탄생한 게 당신의 대표 요리인 ‘히비스커스(flor de hibiscus)’인가.
“히비스커스는 도미니카를 대표하는 꽃이다. 도미니카 여성들은 히비스커스를 머리에 꽂고 다닌다. 도미니카 출신인 나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요리를 창조하고 싶었다. 히비스커스를 똑 닮은 디저트를 처음 내자 모든 손님이 감탄하던 순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히비스커스 요리를 엉덩이 양쪽에 문신으로 새겼다고.
“늘 문신을 하고 싶었는데, ‘이걸로 해야겠다’ 싶었다. 식당 마감하고 문신 가게로 바로 갔다. 한쪽만 하려다 흉터가 있는 다른 한쪽에도 하기로 했다.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웃음).”
-2스타 레스토랑 총주방장이란 명예를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다 나았지만, 총주방장이 되고 3년 뒤인 2016년 둘째 딸에게 안면 장애가 왔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그동안 내가 일을 위해 가족을 희생한 건 아닌가 자책이 들었다. 도미니카 음식을 재창조(reinvent)해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싶다는 꿈도 있었다. 도미니카 음식은 맛있고 풍성하지만 창의적이지 않다. 다행히 도미니카는 복 받은 땅이다. 식재료가 풍성하고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폭넓은 맛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사랑 받을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지금은 도미니카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케이터링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나처럼 뭔가 되고 싶은 도미니카 소녀들이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재단도 만들었다.”
-길지 않은 서울 체류 기간 잡채, 불고기, 김치 등 다양한 한식 요리 수업을 들었던데.
“스페인에서 일할 때부터 고추장, 쌈장 등 한국 음식과 식재료에 관심 많았다. 김치는 채소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요리 중 하나라고 본다. 불고기, 갈비 등 ‘코리안 바비큐’는 당연히 환상적이다. 소주도 너무 맛있다. 맛과 향이 풍부한 도미니카 음식과 찰떡궁합이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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