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명장 이야기] 대한민국 최초 ‘표면처리’ 명장 배명직
국가에선 각 산업 분야의 발전을 이끈 이들에게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칭호를 줍니다. 명장이 되면 일시 장려금 2000만원과 매년 직종 종사 장려금을 받는데요. 명예로운 칭호에 비해, 시장에서 알아보는 이들은 드뭅니다. 우수한 기술력을 지닌 대한민국 명장의 제품들을 조명하는 ‘대한민국 명장 이야기’을 게재합니다. 그들의 직업관과 가치관을 통해 대한민국 산업의 미래를 탐색해보시죠.
경기 안산시 단원구 원시동과 성곡동 일대에 걸쳐 있는 반월국가산업단지. 4호선 안산역에서 차로 15분쯤 들어가야 하는데, 오가는 길이 화물차로 꽉 차있다. 줄지은 차량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안산도금단지’가 보인다.
배명직 대표를 만나기 위해 찾은 곳은 도금단지 입구와 가까운 기양금속공업.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배명직 대표는 계속 울리는 전화로 바빠 보였다. 국내 도금 일인자로, 대한민국 최초 표면처리 명장이다. 국내 도금 산업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에서 2007년 ‘명장’이라는 칭호를 그에게 붙였다. ‘대한민국 명장’은 숙련기술장려법 제11조에 따라 직종별 15년 이상 종사하고 기술의 보유 정도가 높은 자를 국가에서 선정하는 제도다. 매년 30명 이내의 명장이 고용노동부의 심사를 통과한다. 명장이 되면 매년 직종 종사 장려금 지급 등 국가 관리를 받는다.
국내 표면처리 명장은 7인 뿐이다. 그중에서도 ‘1호’이니 바삐 울리는 전화가 납득이 간다. 완제품을 용액에 담그면 말끔히 도금돼 나오는 기술이라 수고가 덜한 분야 같았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신비로운 세계였다. 배명직 명장을 만나 그의 삶과 기술에 대한 집념에 대해 들었다.
◇표면처리 명장의 칼은 녹슬지 않는다
도금은 쇠붙이에 액체로 된 금속을 입히는 과정을 의미한다. 제품을 용액에 담갔다 빼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제품에 얇고 균일하게 도금하기 위해선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다. 쇠붙이에 붙어 있는 녹이나 오물을 제거하고 전처리, 후처리 등 수십 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제품별 도금 용액의 배합도 장인들의 몫이다. 도금을 통해 전기의 흐름을 제어하고 내구성도 조절할 수 있다. 동, 니켈, 금, 은 등 도금의 소재도 다양하다.
배 명장은 ‘골드마이스터’라는 이름으로 칼이나 식기류를 만들고 있다. 그가 만든 칼은 녹슬지 않는 걸로 유명한데, 비결은 ‘부동태 처리’ 기술이다. “제품 표면에 남아있는 철 성분을 끄집어내 기공을 막고 두꺼운 산화피막을 만드는 걸 부동태 처리라고 하는데요. 이 과정을 거쳐야만 오래도록 녹이 슬지 않습니다. 군수·항공 부품에 사용되는 도금 기술인데, 이걸 칼에 적용했죠. 이 기술로 수저세터, 주방가위 같은 생활용품을 만드는데요. 철의 비율을 높여도 부식되지 않습니다. 덕분에 견고하고 오래가는 주방용품을 만들 수 있죠. 부동태 처리 기술력 덕분입니다.”
◇밑바닥 인생 구원해준 자격증 하나
1959년 경북 예천군 감천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에 대한 반감으로 학창 시절 방황도 했다. “영주종합고등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어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고, 지지리도 가난했으니 기술을 배워 불러주는 공장에 취직할 생각이었죠. 목표도 꿈도 없으니 그것도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기술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공부보다 기술이 쉬울 거라고 얕봤던 거죠.”
그를 책상에 앉혀준 건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다. “반항기 가득한 저를 앉혀놓고 ‘넌 머리가 좋으니 지금이라도 공부하면 자격증 딸 수 있다’며 화학분석기능사 시험을 권유하시더군요. 정말 머리가 좋은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 말을 해주신 선생님이 처음이었죠. 말 한마디에 반항 생활을 접고 1년 동안 공부했어요. 당시 같은 과 80명이 시험에 도전했는데, 저를 포함해 11명만 시험에 붙었죠.”
1978년 고등학교 졸업 직후 사회에 뛰어들었다. 갓 20세가 된 그에게 현실은 냉정했다. “자격증 써먹을 곳을 찾기도 전에 일단 돈부터 벌어야 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만 주면 무슨 일이든 했죠. 안경테 공장, 섬유 공장, 낚싯대 공장, 양말 공장 등 여러 곳을 전전했어요. 불합리한 일도 부지기수로 겪었고요. 보름 동안 일하다 무일푼으로 쫓겨나고, 공장 옆 숙소는 불도 안 때 줘서 윗목에선 물이 얼 정도였죠.”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자격증을 활용할 기회가 생겼다. “자격증으로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할 수 있더라고요. 곧바로 자리가 있다는 경기도 부천의 도금 공장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처음 도금에 입문해 품질 관리, 영업, 생산 등 모든 업무를 경험해보게 됐죠.”
◇27세 새내기 사장에서 표면처리 기술 1호 명장 되기까지
처음 보는 큰 공장에 압도된 시골 청년은 꿈을 갖게 됐다. “그런 큰 공장을 가진 사장이 되고 싶었어요. 퇴직할 때 월급이 50만원이 안 될 정도로 박봉이었지만 아껴가며 조금씩 사업 밑천을 마련했죠.”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군 생활을 마칠 무렵 다니던 도금공장이 부도난 것. 1985년 부도난 공장 터의 일부를 빌려 일단 사업장을 차렸다. 27세에 사장이 된 것이다. “고물상에서 중고 드럼통을 사 와 윗부분을 잘라내 도금 용액을 담을 수 있는 통을 만들고, 직원을 구해 어쭙잖게 시작했죠. 사업 초기에는 직원 월급 줄 돈이 없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소를 한 마리 팔아 200만원을 마련해주신 게 초기 창업 자금이 됐습니다.”
국방부에 납품하는 통신, 화약 장비 부품들을 도금하게 되면서 사세가 커졌다. 생산·영업·품질·판매 모두 담당하며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뛰다 문득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기술력은 자신 있는데, 외부 기업과 소통할 일이 많아지면서 제가 직접 사업에 관해 설명할 자리가 늘었어요. 전문적인 이론을 습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시작했죠. 도금 전문 인력이 부족해 후학을 양성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37세에 대헌공업전문대학 표면처리과에 입학해 전기도금기능사, 특수도금기능사를 취득하고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신소재 공학과로 편입해 표면처리 기능장을 땄다. 2004년 동 대학원에서 신소재공학 석사까지 수료하고 겸임교수 생활을 하다 2007년 국내 1호 표면처리 명장이 됐다.
그의 회사 기양금속공업도 연 매출 65억원의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50명의 직원과 함께 항공우주산업 주식회사, 한화시스템 등 굴지의 기업으로 납품하는 도금 제품들을 제작한다.
◇독일 기념품으로 사 온 칼, 1 년 뒤 꺼내 봤더니
2009년 소비재 사업에 도전했다. 배명직 명장의 이름을 걸고 ‘골드마이스터’라는 회사를 세웠다. 명장 선정 직후 다녀온 독일 산업 연수가 계기였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독일제 칼을 기념품으로 사라고 하더군요. 여행객들의 필수 쇼핑리스트 중 하나였어요. 몇 자루 사와 잊고 살다가 1년쯤 뒤에 보니, 칼에 녹이 슬어 있더라고요. 보관을 잘못한 탓도 있지만, 제가 가진 도금 기술로 녹슬지 않는 주방용품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금 전문가답게 주방용품의 소재부터 살폈다. “무쇠 제품이 많아요. 철로 이루어져 담금질이 쉽죠. 경도도 높아 오래 사용할 수 있고요. 그런데 철은 내식성이 작아요. 부식이 잘 되죠. 그래서 현대에 들어 철에 니켈과 크롬을 섞어 덜 녹슬게 한 것이 스테인리스 소재입니다. 그런데 스테인리스라고 부식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적절한 용액으로 도금을 거쳐야 내마모성과 내식성이 좋아지죠.”
주방용품 겉면은 티타늄으로 도금했다. “음식에 닿는 제품이니 무독성 소재를 사용했죠. 티타늄은 도금 공정 중에서도 유해 물질이 필요하지 않아 가장 친환경적인 소재로 평가받아요. 티타늄을 사용하면 내마모성도 올라갑니다. 1000번 사용하면 무뎌질 칼날을 10000번 사용해야 무뎌지는 정도로 기능성을 올릴 수 있죠.”
◇열 손가락 못 움직일 때까지
칼을 시작으로 주방용품 위주로 제품을 늘려갔다. 30년 넘게 도금 기술을 익히면서 터득한 13개의 특허 기술이 모두 들어간 집약체다. “바닥에 뒀을 때 수저의 머리 부분이 닿지 않아 청결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저 세트, 가위 날을 물결 모양으로 주조해 사용성을 올린 제품, 칼날이 바닥에 닿지 않는 커트러리용 나이프 등을 직접 사용해보면서 아이디어를 붙여 갔어요.”
영원히 벗겨지지 않는 도금은 없어도, 가장 오랫동안 녹슬지 않고 처음 빛깔을 그대로 유지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자부했다. “30년 넘게 도금 기술 한 우물만 팠어요. 공업 용품 도금에 도를 텄을 때는 생활용품 사업을 펼쳐 다시 개발에 재미를 붙였죠. 고생스러웠던 시절이 긴데, 기억이 미화된 건지 아직도 일이 재밌습니다. 후배 기술인이 더욱 좋은 환경에서 재주를 펼칠 수 있도록 터를 다지는 것이 제 마지막 목표예요. 열 손가락 움직일 때까지 업계에서 버티며 도금 기술 저변 확대에 앞장서겠습니다.”
박유연 기자 김영리 더비비드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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