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맨해튼 심장서 쏟아진 102m 폭포… “벼랑 끝서 버틴 10년이 쓴 기적이었다”

해암도 2021. 11. 20. 07:37

‘파격 영상’으로 세계 도심 풍경 바꾼


‘디자인계 BTS’ 이성호 디스트릭트 대표

 
지난 7월 뉴욕 타임스스퀘어 한폭판에서 102m 거대한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풍경이 연출됐다. 한국 디자인 회사 디스트릭트가 만든 미디어 작품 '워터폴'이었다. 영상은 1분에 걸쳐 쏟아지는 폭포 영상을 빨리 감기한 것이다. /디스트릭트

 

이대로 침몰할 것인가, 마지막 한 방을 보여줄 것인가. 작년 1월 디지털 디자인 업체 ‘디스트릭트’ 이성호(41) 대표는 홀로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섰다. 그의 어깨엔 직원 100여 명의 인생이 걸려 있었다. 60억원 넘는 적자를 감당 못 해 자본 잠식 상태가 된 회사를 벼랑 끝에서 구해야 했다.

 

최후 보루로 삼은 건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이었다. 이곳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만든 파격 영상을 틀어 극적으로 기사회생하겠다고 결심했다. 싸구려 호텔에 머물며 발품 팔아 타임스스퀘어 주요 전광판 운영사 89개 이름과 연락처를 알아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귀국하자마자 코로나가 전 세계를 잠식했다. 맨해튼의 심장을 훔쳐 돌파구를 찾겠다는 계획은 맥없이 뒷걸음쳤다.

 

서울 마곡동 '더 넥센 유니버시티'에 설치된 디스트릭트의 영상 작품 앞에 앉은 이성호 대표. 투명 수조 안에서 진짜 파도가 출렁이는 듯한 모습을 시도한 첫 작품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로부터 딱 1년 반 뒤인 지난 7월, 기적이 일어났다. 타임스스퀘어에 하나도 아니고 주요 전광판 세 군데에 디스트릭트 영상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새해 카운트다운 행사가 열리는 ‘원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에 등장한 높이 102.5m 가상 폭포(작품명 ‘워터폴’). 마천루 숲 사이, 영상으로 빚어낸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전광판=광고판’이라는 개념을 뒤집는 걸작이었다. 근처 메리어트 마키스 호텔 외벽의 1400㎡ 크기 전광판엔 초대형 수조에서 고래가 헤엄치는 듯한 영상(작품명 ‘웨일’)이, 맞은편 건물엔 넷플릭스 드라마 ‘아우터 뱅크스 시즌 2′ 영상물이 흘러나왔다.

 

추락 직전의 회사가 극적으로 맨해튼 한복판을 정복하고, ‘대세’ 회사가 됐다. 요즘은 명품 회사를 비롯해 세계 유명 기업이 앞다퉈 러브콜을 보낸다. 지난해 9월 제주에 연 미디어 아트 전시관 ‘아르떼 뮤지엄’은 86만명이 다녀갔다. 지난달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에서 대통령상도 받았다. 전광판을 캔버스 삼아 가상과 실재를 넘나드는 미디어 아트로 세계 도심에 초현실적 풍경을 심고 있는 ‘디스트릭트’의 수장을 만났다.

 

◇가상 물결, 벼랑 끝 회사를 구하다

 

지난 7월 뉴욕 타임스스퀘어 메리어트 마키스 호텔 외벽의 1400㎡ 크기 전광판에서 상영된 미디어 아트 '웨일(Whale)'. 초대형 수조에서 고래가 헤엄치는 듯한 모습이 장관을 이뤘다. /디스트릭트

 

-맨해튼에서 폭포가 떨어지고, 고래가 헤엄치는 압도적 광경이 화제였다. 한국 회사 솜씨란 게 알려지면서 ‘디자인계 BTS’란 얘기도 나왔던데.

“그런 수식은 좀, 하하! 지난여름 뉴욕에 가서 봤는데 감개무량했다. 원 타임스 스퀘어 건물주는 폭포가 정말 마음에 든다면서 대여료를 받지 않을 테니 조금만 더 틀어달라고 했다. ‘웨일(Whale·고래)’은 1년 반 전 뉴욕 갔을 땐 만날 수도 없던 미국 유명 전광판 운영사 ‘실버 캐스트’ 대표가 먼저 연락해 작업했다. 믿기지 않는다.”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그간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6년 중국에 진출했는데 2018년쯤부터 자금 회수가 어려웠다. 코로나까지 터져 중국 사업을 접었다. ‘영끌’ 해서 겨우 장만한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고, 신용 대출도 받아 몇 년 동안 직원 월급을 겨우 주면서 버텼다. 그냥 무너질 순 없었다. 마지막이란 각오로 승부수를 띄웠다.”

 

-어떤 모험이었나.

“우리는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어 납품하는 회사다. 직원들 재능은 세계적인데 2004년 창업 이후 줄곧 용역의 굴레를 못 벗어난 채 대기업 하청 기지처럼 일했다. 안 그래도 직원들 자존감이 바닥인데 회사 사정이 어려워 경제적 보상도 못 해주니 괴로웠다. 위기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주에 의존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돈을 벌면서 직원도 보람을 느끼는 수익 구조를 떠올렸다. 해법은 자체 콘텐츠를 만들어 라이선스 사업을 하고 직영 전시관을 여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우리가 이런 기술을 가진 곳이란 걸 알려야 했다. 그 시작이 ‘웨이브(Wave·파도)’ 프로젝트였다.”

 

‘웨이브’는 지난해 4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 건물의 L 자 대형 전광판에 선보여 선풍적인 화제를 모은 프로젝트다. 8K 초고해상도 영상으로, 거대한 투명 수조 안에서 파도가 요동치는 듯한 모습을 실감 나게 연출했다. 평면 스크린을 입체 공간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기술인 ‘애너모픽 일루전(anamorphic illusion)’ 기술을 썼다.

 

-절체절명 상황에서 모든 걸 쏟아부어 만든 작품이었다는 얘긴데, 왜 전광판을 실험대로 삼았나.

“대형 전광판이 날로 늘어가는데 단순한 광고가 아닌 예술 같은 영상 수요가 있을 거라고 봤다. 앉아서 수요를 기다리지 말고, 역발상으로 우리가 투자해 혁신적으로 만들어 세상에 보여주자고 했다. 마케팅용이었지만 어떤 로고도 붙이지 말고 세련된 공공 미술처럼 보이게 하자고 결정한 게 핵심이었다.”

 

-원래 코엑스에서 하려 했던 게 아니었다고?

“타임스스퀘어를 목표로 만든 작품이었다. 매력적인 콘텐츠를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보여주면 소셜 미디어에 급속도로 퍼질 것 같았다. 최적 장소가 ‘전광판의 메카’ 타임스스퀘어였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무산되는 바람에 코엑스 전광판이 첫 시험대가 됐다. 코엑스 전광판 운영 업체인 CJ파워캐스트 측에 ‘한 푼도 안 줘도 된다, 그냥 틀게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튼 것이 대박 났다. 직접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급속도로 퍼져 지금까지 총 조회 수 1억뷰를 넘겼다. 당장 번 돈은 없지만 단박에 세계에 우리 이름을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했을까.

“코로나 상황이라 가상 자연에서 대리 만족을 얻은 것 같다. 코로나 시대를 투영해 ‘자가 격리된 바다(self quarantined sea)’란 애칭도 생겼다. 도심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자연이라는 의외성, 장소적 맥락까지 더해지며 사람들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지난해 서울 코엑스 아티움 전광판에서 상영돼 화제를 모은 입체 파도 '웨이브(Wave)'. 디스트릭트를 벼랑 끝에서 구해낸 대표작이다. /이진한 기자

 

이후 디스트릭트는 삼성전자와 손잡고 세계 주요 도시에 있는 삼성전자 LED 전광판에 작품을 넣고 있다. 그중 하나가 원 타임스 스퀘어 ‘폭포’ 프로젝트였다. 지난여름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전시에도 관람객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세계 도심의 풍경을 바꾸는 보이지 않는 손’ 같다.

“쑥스럽지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곤 생각한다. 웨이브 이후 전광판에 심미성 높은 콘텐츠를 어떻게 넣을지가 화두가 됐고, 평면 스크린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미디어 아트가 세계적 트렌드가 됐으니까.”

 

◇디자인의 ‘디’ 자도 몰랐던 회계사

 

-디자인 회사 대표는 거의 디자인 전공자던데 특이하게 경제학과(서울대) 출신이더라. 학창 시절은 어땠나.

“대표, 그것도 디자인 회사 대표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지방(경북 영주) 출신인데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하면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LP 가스 소매업을 하던 아버지는 IMF 외환 위기 무렵 사업을 관두고,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99년 봉고차 한 대를 사서 20년 동안 기사 일을 했다. 재작년 폐차한 아버지 차의 주행거리는 85만㎞. 그는 “부를 물려주진 못해도 바르게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했다.

 

-조용한 모범생 인상인데.

“엉뚱한 짓도 꽤 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벤처 붐이 일었다. 기숙사 방마다 붙은 배달 음식 전단을 모아 웹사이트에 올려 식당 사장님들께 중개 수수료를 조금씩 받는 모델을 만들었다. 원조 ‘배달의민족’ 같은 서비스였달까. 캠퍼스가 너무 넓어 고물 오토바이를 끌고 다녔는데 툭 하면 고장 나 낭패였다. 친구 하나를 꼬드겨 오토바이 긴급 수리 서비스 모델도 만들었다. 물론 둘 다 실패! 그래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어떻게 제공할 수 있을지 고민한 시간이었다.”

 

디자인 회사 대표로는 드물게 회계사 출신인 이성호 디스트릭트 대표.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력이 특이하다. 회계사 출신이라고?

“석사 과정(서울대 경영학과) 때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해 삼일회계법인에 다녔다. 시험 때문에 입대를 늦췄던 터라 7개월쯤 다니고 군에 가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뇌 의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MRI 데이터가 필요한데 일당 5만원을 줄 테니 한번 찍어달라고 하더라. 5만원이 어디냐며 얼씨구나 했는데, 얼마 뒤 친구가 병원에 와 봐야겠다고 연락했다. 몸에 이상 징후가 발견된 것이었다. 현역 입대가 안 돼 2007년 ‘산업 기능 요원’으로 디스트릭트에서 일하게 됐다.”

 

-복무 후 회계법인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2009년 돌아가려는데 창업주 세 명이 붙잡았다. 그사이 정식 직원이 아니라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쓰고 있었다’면서(웃음). 회사가 커지려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가 많아야 한다더라.”

 

-이름 없는 작은 회사였지 않나.

“회계사보다 봉급도 적고 인지도도 없는 회사였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군대식 문화의 ‘끝판왕’이던 회계법인과 달리 자유분방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일을 대하는 자세를 보니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때마침 아이폰을 필두로 스마트폰이 등장했을 때라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 수요가 생길 것 같았다. 뭣보다 젊었다. 20대 미혼이었다. 남들하고 다른 길을 가보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엄청 후회했지만(웃음).”

 

-후회했다고?

“정식 입사하자마자 회사가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일산 킨텍스에 최첨단 실내 엔터테인먼트 공간 ‘라이브 파크’를 열었는데,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와중에 2012년 창업주 중 한 명인 최은석 대표님이 미국 출장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최 대표는 업계에서 전설로 통하는 천재 웹 디자이너였다. 언론에 도배될 정도로 충격적 사건이었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대부분 계약이 최 대표님 이름 때문에 성사됐는데 갑자기 돌아가시자 거의 모든 계약이 취소됐다. 회사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싶으면서도 남은 사람들이 너무 힘겨운 시간을 겪어야 했기에 대표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배수진을 친다는 마음으로 아르떼 뮤지엄 개관을 하는 과정에서 그를 이해하게 됐다. 대표가 돼 보니 돌파구를 찾기 위해 무리인 줄 알면서도 불확실성에 베팅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더라. 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불안에 시달리던 어느 날 꿈에 최 대표님이 나타났다.” 그의 사무실 한편엔 최 대표의 생전 사진이 여러 장 놓여 있었다.

 

-회사가 휘청거렸을 때, 관두고 회계사 할 생각은 안 했나.

“월급을 제대로 못 받는 상황이었는데 신기하게 사람들이 회사를 안 떠났다. 나만 살겠다고 회계법인으로 가자니 왠지 배신하는 것 같았다. 주인 의식이 샘솟으면서 3년 정도 100억여 원 투자 유치를 하며 재기를 꿈꿨다.”

 

하지만 한번 꺾인 성장 곡선은 좀처럼 반등하지 않았다. 그사이 아이 아빠가 되며 고민이 커졌다. 2016년 진지하게 이직을 생각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덜컥 대표직을 제안했다.

 

-이직이냐 대표 수락이냐. 극과 극의 선택 아닌가.

“당시 재무제표를 보면 대표 수락은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격이었다. 하지만 안 되더라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상황에서 끝까지 해보는 편이 후회가 덜할 것 같아 대표를 맡기로 했다.”

작년 웨이브 프로젝트 성공을 기점으로 매출이 급격히 늘어 지난 6월 자본 잠식에서 벗어났다. 지난해 101억원이던 매출이 올해는 350억원 정도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루에 두 번 출근한다고?

“맞벌이인데 작년에 둘째가 태어났다. 아내보다는 내 출퇴근이 탄력적이다. 오후 8시 이전 퇴근해 아이를 재운 뒤 10시쯤 다시 회사에 나가 일하다가 자정 넘어 퇴근한다. 일과 육아 병행을 위한 나름의 방법이다. 물론 직원들은 칼퇴근한다(웃음).”

 

◇40대 아재도 감동시키는 쉬운 예술

 

-디자이너가 아닌데 작품 제작에선 어떤 역할을 하는가.

“잘 만들어야 한다, 이런 얘기밖에 못 한다(웃음). 작품 자체에 대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의사 결정할 때 디자이너들은 감성에 많이 의지하는데, 나는 숫자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한다. 평균적인 ‘40대 아재 감성’으로 일반인 눈높이에서 콘텐츠를 평가하는 역할도 하고.”

 

-40대 아재 감성이라니?

“디자이너들이 자유롭게 창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칫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만 만들면 대중과 유리될 수 있다. 그런 걸 내 ‘아재 감성’이 잡아준다. 너무 작가주의로 흐르지 않게 균형 잡아주는 역할이랄까? 내 기준은 철저한 대중 영합이다. 예컨대 타임스스퀘어의 ‘웨일’ 영상도 유치하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난 쉽고 직관적인 게 먹힌다고 생각했다.”

 

디스트릭트의 사내 예술가 그룹 '에이스트릭트'가 지난해 국제갤러리에서 연 전시회에 방탄소년단 RM이 와서 찍은 사진.

 

-지난해 디스트릭트 직원 일부가 ‘에이스트릭트’란 이름으로 국제갤러리에서 전시해 순수미술 영역으로도 확장했다. 방탄소년단 RM(김남준)이 관람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시 때 ‘인스타그램 인증용이지 이게 무슨 예술이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뭐가 예술이냐’고 반문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요즘 유명 작가고, 어디에서 전시했고, 경매에 얼마에 팔렸다는 식으로 작품 가치를 환산하는 것보다 차라리 인스타에서 ‘좋아요’ 더 많이 받는 게 더 좋은 예술일 수 있다고 본다. 몇 시간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모호한 말로 자기 작품을 설명하는 작가의 작품이, 공고한 ‘예술 카르텔’ 안에서 가격이 몇 억 원으로 책정된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본다.”

 

-용감한 발언 같은데?

“나는 예술 안목이 높지 않다. 해외 유명 미술관에 가도 현대미술은 그냥 통과할 때도 많다. 솔직히 감흥 없을 때도 있고, 작가가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것도 불편하다. 지금은 ‘실감 미디어(영상으로 실제 모습처럼 표현하는 것)’ 등 새로운 시각 표현 기법이 등장해, 기존의 어떤 회화나 조각으로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담아내는 세상이 됐다. 예술 잣대가 달라지는데 미술계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 모토는 ‘시각 예술 대중화’다. 사람들이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고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들자는 것이다. 제주도 아르떼 뮤지엄을 만들 때도 그랬다.”

 

-예를 들면 어떤 식인지.

“크리에이티브 담당자들과 회의하면서 촌스럽다고 생각되어도 ‘대중 감성’을 잊지 말라고 했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작품 설명은 소용없다, 무조건 세 줄 이내로 짧게 쓰자고 했다.” 최근 여수관을 열었고 12월엔 강릉관을 연다. 내년엔 뉴욕과 라스베이거스에도 열 예정이다.

 

디스트릭트에서 운영하는 미디어 아트 전시관 '제주 아르떼 뮤지엄'. /디스트릭트 제공

 

◇파도 앞의 인생들이여, 도망치지 마라

 

-용감과 무모, 과감 사이를 활강하며 인생 캔버스를 수놓고 있다. 고비마다 도전을 멈추지 않은 원동력이 무엇이었나.

“한창 어려웠을 때 변호사, 회계사, 대기업 임원 하는 친구들을 보며 자괴감도 들었다. 왜 탄탄대로를 놔두고 이런 선택을 해서 힘들게 사는가 싶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남들과 같은 길을 걷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조금 다르게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이란 걸 증명하고 싶었다.”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나.

“수많은 선택의 결과가 쌓여서 만들어진 자취. 5만원 벌겠다고 MRI를 찍지 않았다면, 회사가 어려웠을 때 회계사로 다시 돌아갔다면, 대표 대신 이직을 했다면, 지금의 나도 디스트릭트도 없었을 거다.”

 

서울 마곡동 '더 넥센 유니버시티'에 설치된 디스트릭트의 영상 작품 앞에 선 이성호 대표.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기적을 일궈낸 작품 ‘웨이브’가 ‘디스트릭트의 자화상’ 같다고?

“웨이브는 파도인데 유리 수조 안에 갇혀 있는 형상이다. 앞에 서면 집채만 한 파도가 나를 집어삼킬 기세로 밀려오다가 얇은 유리 벽에 막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작품이 설치되고 동료하고 얘기했다. 마치 눈앞에 거대한 난관이 닥쳐오는 위태로운 상황에, ‘웨이브’라는 얇은 유리 벽 한 장을 들고 맞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우리 모습 같다고. 절묘하게 우리 상황을 은유한 작품이 우리를 살려냈다.”

 

-이 순간에도 유리 벽 한 장에 간신히 기댄 채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용기를 준다면.

“아직 조언을 할 위치는 아니지만 ‘도망가지 마라’고 말하고 싶다. 지난 10여 년간 내게도 별의별 일이 많았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도망가지 않고 용기 내 시련을 마주하며 버텼다. 만약 직원들 월급 주기도 어려웠을 때, 도망갔다면 그때까지 버텨온 나의 시간은 그저 의미 없는 시간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버텨냈기에 의미 있는 시간으로 남았다. 무엇이든 믿음을 가지고 진정으로 몰입하면 언젠가 꽃피는 날이 온다는 걸 깨달았다.”

 

크고 작은 파도 앞에 선 숱한 인생들에게, 그의 삶은 말하고 있다. 제아무리 거대한 파도도 결국 부서질 운명이라는 것을, 파도가 부서지기까지 버티는 이가 승리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