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모델 하영은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전신 거울 앞에 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30년 넘게 해온 나만의 루틴이다. 거울 속에는 어제와 비슷하면서 또 조금은 다른, 멀건 몸뚱이 하나가 있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나의 지난 세월을 지켜봐 준, 마치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진다.”
『나는 누드모델입니다』 펴내
1988년 주말 아르바이트로 첫발
명함 주면 “오해 십상” 박대 일쑤
편견 깨려 한국누드모델협회 설립
목사·전직 CEO·중년부인도 노크
“당당함·자신감 얻고 성취 경험”
공개적으로 이름을 밝히고 활동한 국내 첫 누드모델이자 ‘한국누드모델협회’ 설립자인 하영은(54)씨가 최근 출간한 『나는 누드모델입니다』(라곰)의 첫 단락이다.
30년 간 국내 최장수 모델로 활동한 누드모델이자 한국누드모델협회 설립자인 하영은씨의 실제 뒷모습 누드와 얼굴을 이중노출 기법으로 촬영했다. 전민규 기자
“밤사이 제 몸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에요. 살이 얼마나 빠졌나 이런 것보다 중요한 건 혹시 몸에 상처라도 생기진 않았는지 작은 흔적이라도 찾는 거죠. 누군가에게 최고의 모델이 되기 위해선 저도 내 몸을 건강하게 지키고 사랑해야 하니까요.”
지방 소도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하씨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늘 답답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한 무역회사에서 경리 일을 보며 겨우 숨통을 틔웠지만, 월급봉투가 든 핸드백을 날치기당했다. 언니의 신혼 단칸방에 더부살이를 하던 때라 막막함은 더했다. 독립하기 위해 퇴근 후 종로의 한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는 “누드모델 해볼 생각 없어?” 권유하던 사진작가를 떠올렸다. 충무로에서 가까웠던 레스토랑은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정체불명 단체’ 의혹, 안기부서 조사도
크로키 수업 참가자들이 그린 그림들.
“1988년 누드모델을 시작했지만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할 수 없었어요.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주말에는 누드모델로 활동하다 95년 전업 누드모델이 되기로 결심하면서 주변에 알리기 시작했죠. 더 멋진 작품을 위해 포즈를 연구하고 모델다운 보디라인을 유지하기 위해 시간을 써야겠다는 생각, 내 직업에 당당함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누군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다는 건 멋진 일이잖아요.”
‘누드모델 하영은’이라는 한 줄 설명과 무선 호출기 번호를 적은 명함을 건네도 “가족이나 누군가에게 오해받기 싫다”며 면전에서 명함을 찢어버리던 시대. 96년 한국누드모델협회 설립을 결심한 것도 왜곡된 시선과 사회적 편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런 직업도 있으니 존중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혼자보다 여럿의 힘이 나으니까요.”
협회 출범 두 달 전에는 종로 인사동 공평아트센터에서 ‘공개 누드 크로키 퍼포먼스’를 열었다. ‘몰래 숨어서 불법적이고 은밀한 일을 한다’ ‘홀딱 벗고 평범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인식을 깨고 싶어서였다.
크로키 수업 참가자들이 그린 그림들.
“그래도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 건 쉽지 않더라고요. 협회 출범하고 1년 후 어느 밤에 안기부 직원들이라며 남자들이 사무실로 찾아왔어요. 정체불명의 단체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면서. 이후 꼬박 3개월 동안 국가의 감시를 받았죠.”(웃음)
요즘도 하씨는 회원의 ‘성추행 고소’건으로 법원을 오간다. 누드모델과 사진·회화 작업자들이 지켜야 할 수칙 중에 ‘모델의 몸을 만지지 말 것’이 있다. 일상에서도 원치 않는 불쾌한 신체접촉은 성추행이 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몸을 바라볼 때 경솔해지기 쉬워요. ‘예쁘다’ ‘육덕지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모델들은 상처를 받죠. 그런 무언의 폭력과 성추행에 단호히 대응하려고 해요.”
하씨의 에세이를 읽으며 놀란 건 우리 생활 곳곳에서 누드모델들이 정말 ‘열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캔버스 앞에 조각상처럼 서 있는 모습만 상상했다면 오산이다.
“순수예술뿐 아니라 패션·의료·영상·게임 등 인체와 알몸을 필요로 하는 모든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어요. 국내 유명 의학서적에 실린 인체 지도는 우리 협회 소속 남자 모델의 몸을 그대로 그려 넣은 거죠. 2002년부터 방영 중인 KBS 다큐멘터리 ‘생로병사의 비밀’ 도입부 인서트 영상 속 몸의 주인공이 바로 저에요. 간호학과 학생들의 주사 실습에 동원되는 둔부 모양의 실리콘 모형도 제 엉덩이를 모델로 제작했고요. 모유 수유하는 엄마와 아기의 사진 속 가슴을 촬영한 적도 있죠.”
크로키 수업 참가자들이 그린 그림들.
키 165cm, 몸무게 45kg. ‘보통의 한국인 여성’이라 할 수 있는 하씨의 몸은 이처럼 의료용 인체모형 제작에 주요하게 쓰였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대한민국 의료기술 발전에 하영은이 큰 공을 세웠다”는 우스갯소리를 할까.
현재 누드모델협회 소속 회원 수는 500여 명. 이 중 100명이 전업 모델이고, 그 외는 주중에는 직장인·주부로, 주말에는 누드모델로 활동하는 ‘N잡러(본업뿐 아니라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가진 사람들)’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분들도 있지만 자신감을 갖기 위해, 색다른 경험을 위해 누드모델에 도전하는 회원도 많아요. 사진이 아닌 크로키·드로잉 작업용 누드모델이 되면 얼굴이 노출되지 않거든요.”
평생을 알코올 중독자로 살았다는 노숙자,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일에 어려움을 가졌다는 목사,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성취의 경험을 얻고 싶다는 전직 중소기업 CEO,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았다는 중년 부인이 한국누드모델협회 문을 두드렸고, 지금은 누드모델로 당당하게 활약하고 있다.
“팬티까지 벗은 알몸으로 근육과 뼈를 움직여 감정을 동작으로 전달하는 일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만큼 성공하면 당당함·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해요. 게임·디지털 영상 작업에서도 우리를 찾으니까 요즘은 인생을 재밌게 살려는 젊은 친구들도 많이 찾아옵니다.”
회원 500명, 의료·패션·게임까지 ‘열일’
하씨의 에세이집 표지에는 ‘날 것 그대로 내 몸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몸은 한 사람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요. 그 사람의 나이, 성격, 욕망, 습관…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까지 고스란히 말이죠. 그만큼 몸은 거짓이 없고 순수하죠. 그 사람의 몸을 보면 스스로 얼마나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 흔적이 드러나거든요.”
'나는 누드모델입니다' 책 표지. 사진 라곰출판사
매일 아침 들여다보는 거울 속에서 살이 처지고, 주름이 패인 모습을 발견했을 때 하씨도 처음엔 한없이 우울했다고 한다.
“나이의 흔적을 가리기 위한 포즈를 열심히 연구했죠. 그런데 어느 날 그러고 있는 거울 속 제 모습이 참 초라해 보이더군요. 받아들이자. 이게 나잖아. 늙는 게 슬프기도 하지만 지금의 내 몸에 맞는 동작과 감정 연출을 연습하자. 젊고 예쁜 몸으로 연출하는 것과는 다르게 지금의 내 몸이 가진 장점이 있을 거야. 그렇게 맘을 고쳐 먹고 나서부터는 행복해졌어요.”
하씨가 ‘내 몸을 마주하라’ 한 것도 현재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자는 의미다. 축 늘어진 뱃살, 휘어있는 척추, 쑥 빠져나온 거북목. 지금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야 좀 더 건강한 몸을 위해 다음 스텝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씨는 그렇게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며 가꿔온 몸으로 ‘창작의 도움닫기’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의 직업이 좋다고 했다.
“작가의 손끝에서만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건 아니에요. 작가의 생각을 읽고 그 감정을 연기한 누드모델도 아티스트예요.”
서정민 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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