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戀書에 돈 뜯긴 남자들은 왜 사기꾼을 옹호했을까

해암도 2021. 7. 10. 08:30

미국서 여자로 위장해 펜팔하며 외로운 남성 3만명 갈취한 사건
피해자들 “그 편지가 나를 구원”
저자 “진실이 늘 해법은 아냐… 자신을 속이는 게 때론 실용적”

샹커 베단텀, 빌 메슬러 공저 '착각의 쓸모'/반니

착각의 쓸모

샹커 베단텀·빌 메슬러 지음|이한이 옮김|반니|316쪽|1만8000원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를 만났을 때, 저자 샹커 베단텀은 물었다. “사후에 관한 종교적 믿음 덕분에 인생이 견딜 만해진 사람에게서 그 같은 확신이 주는 편안함을 빼앗아야 할까요?” 이 책의 큰 줄기는 이 물음에 있다.

 

1980년대 미국 텍사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남자 조셉이 미혼자들을 위한 펜팔 서비스에 등록한다.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사랑의 교회’가 운영하는 일리노이주 외딴 숲속 휴식처에 은신하고 있다는 파말라라는 여성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파말라는 관계가 깊어지자 ‘애정의 증표’로서 도움이 필요하다며 주기적으로 돈을 요구한다. 조셉은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를 도울 수 있고, 파말라의 삶이 조금 더 편해진다는 사실이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파말라는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 도널드 로리라는 사기꾼이 외로운 남자들을 겨냥해 돈을 뜯어내려 만들어낸 가상의 여인이었다.

 

미 전역과 캐나다에 3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 한 해에 100만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 희대의 사기극 ‘사랑의 교회’ 사건의 희생양은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느낌을 간절하게 바라는 선량한 남자들이었다. 회원들 중엔 교수 등 고학력자도 많았다.

 

1988년 로리가 사기 혐의로 기소됐을 때 법원 앞에는 “그 편지 덕에 알코올·마약중독, 자살충동에서 벗어났다”며 로리를 응원하는 일군의 피해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편지 검열이 내 인생을 망쳤다”며 수사관에게 욕을 해대는 이들도 있었다.

 

조셉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파말라의 사진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신앙을 간직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들은 이 사건을 예로 들며 말한다. “사람들이 잘못된 믿음에 매달리는 이유는 때로는 ‘자기기만’이 실용적이어서다.”

 

인간에게는 왜 판타지가 필요할까? 저자들은 “과학적 ‘진실’을 전하는 것만이 해답이 아니다.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믿는 수많은 사람이 허황된 믿음에 매달리는 건 실용적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우리는 종종 “식사는 잘 하셨나요?” “주말 잘 보냈어요?” 같은 진심과는 동떨어진 의례적인 말들을 한다. 의례적이란 걸 알면서도 듣는 사람은 기분 좋게 응대한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 ‘돈독한 관계’라는 가상의 유대를 형성한다.

 

호텔 등의 서비스 산업이 ‘애정 어린 관심’이라는 허구를 제공하고 고객들이 ‘환대를 돈으로 구매했다’는 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는 아버지에게 “저는 폐하를 제 의무에 따라 사랑할 뿐”이라 답하는 막내딸의 정직함을 칭송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리어왕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고 옹졸하며 나약하다.

 

저자는 “오직 바보만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사람들이 진실에 귀 기울여 주리라 기대한다”고 말한다.

 

믿음은 뇌도 속인다. 미국 경제학자 안토니오 랭걸은 다양한 가격표가 붙은 병에 모두 같은 와인을 부어놓고 사람들에게 맛보게 했다. 사람들은 90달러 상표가 붙은 병에 든 와인이 10달러 병에 든 와인보다 질이 좋다고 강력하게 말했는데, 비싸다 믿은 와인을 실제로 ‘맛이 더 좋게’ 느꼈다. 참가자들의 뇌를 스캔해 보니 비싼 가격표가 붙은 병의 와인을 마실 때 쾌락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됐다.

 

착각에서 기인한 자기기만이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자신감에는 보상을 하되, 과도한 자신감에는 보상하지 않도록 설계된 펀딩 시스템에서 의외로 더 성공적인 건 합리적인 여성 기업가들이 아니라 과도한 자신감을 지닌 남성 기업가들이었다. 저자는 “자기기만의 힘이 중요한 원인이다. 남성은 실패를 그만두라는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출전했으며 이들 중 일부가 마침내 성공했다”고 분석한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가? 그저 ‘정신승리'일 뿐이라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미토스(mythos) 개념을 제시한다. 세상은 논리적, 실증적 세계인 로고스뿐 아니라 꿈과 스토리텔링, 상징의 세계인 미토스와 상호 의존하며 돌아간다는 것이다. “구렁에 빠져서 신을 구하지 않기란 어렵다. 자신이 잘 속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면, 그건 당신을 시험할 환경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제 Useful Delusions. 

 

 

곽아람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1.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