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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갚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 사랑을 갚아라

해암도 2020. 1. 11. 09:02

 김형석의 100세일기

오래전 일이다. 대학생 10여 명이 모이는 성경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 회원이었던 J씨는 지금 캐나다에 사는데 지난달에 우편물을 하나 보내왔다. 당시 일을 회상하는 얘기를 하면서, 대구에서 발행한 한 일간지 기사를 곁들였다. 내용을 알려주고 싶어 한 것이다.

'지난 늦가을에 B라는 여의사가 세상을 떠났다'로 시작하는 기사였다. 나도 잘 알고 지낸 성경 공부 회원이었다. 기사를 더 옮겨본다. '지금은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편입된 수도여자의과대학 재학생이었다. 졸업 후에 고향인 대구로 돌아가 경북대학 의과대학의 교수인 남편과 결혼, 부부 의사가 되었다. 개인 병원을 운영하면서 최근까지 가정의로 많은 환자를 돌보아주었다. 83세에 세상을 떠났다. 작고한 후에야 알려지지 않던 그의 희생적인 봉사 활동이 전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내게 갚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 사랑을 갚아라
일러스트= 김영석
의사 B는 가난한 환자에게는 무료 치료를 아끼지 않았다. 고생하는 유망한 학생들에게는 남몰래 장학금까지 전달했다. 오랜 의사 생활을 했고 언제나 많은 환자를 대해 왔으나 돈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 떠나기 전에는 남편을 설득해 두 사람 시신을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 기증하자는 유지를 남겼고, B 의사가 먼저 그 모범을 보였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며 족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는 물론 한평생 화장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도 시골 할머니 같은 인상이었다. B의 성경반 친구였던 여의사 Y도 대학병원에서 은퇴하고 3년간 아프리카에서 봉사 활동을 약속하고 갔다가 그곳의 불행한 환자들을 외면할 수 없어 15년을 더 봉사하고 늙어서 귀국했다는 사실도 J가 전해 주었다.

여러 해 전에 내가 지방 강연을 갔을 때다. 한 30대 남성이 찾아와 뜻밖의 인사를 했다. 내가 학비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내가 "장학금을 준 일이 없을 텐데요"라고 반문했다.

그의 얘기가 나를 약간 놀라게 했다. 자기가 고생하고 있을 때 의사 B가 장학금을 주면서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김형석 선생이 도와준 것이다. 너에게 주는 것은 김 선생을 대신해 주는 것이니까 너도 이 다음에 사정이 허락하면 이 돈을 가난한 학생에게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젊은이의 인사를 받으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80여 년 전 중학생 때부터 나를 사랑해준 모우리(E.M. Mowry) 선교사가 떠올랐다. 가난하게 고생하던 나를 여러 차례 도와주면서 모우리 선교사는 말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 갚는 것이 아니니까 너의 가난한 제자가 생기면 예수님을 대신해 주면 된다"고. 그 사랑이 여럿을 거쳐 이 젊은이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운 마음으로 남는다.


 조선일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2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