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행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원장
40대 후반 여인이 중학생 딸과 함께 가게로 들어왔다. "모자 좀 보여주세요." "(수술) 날짜 잡히셨어요? 모자보다는 속모자를 먼저 사셔야 합니다. 머리카락을 자르면 주무실 때 춥거든요. 모자나 가발은 속모자를 쓰신 후 덧쓰시면 돼요. 모자는 수술 후에 제 가게나 다른 가게에서 어울리는 것으로 사세요." 속모자를 고른 여인이 거울 앞에 섰다. 유방암인 여인은 팔을 들지 못했다. 대신 딸이 속모자를 정성껏 씌워줬다. 삭발 직전에 자신이 쓸 모자를 사러 온 엄마와 그녀의 어린 딸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열다섯 살 영희(가명)는 대뇌 신경세포가 파괴되는 '크라베'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맨 처음 무균실에 들어가야 했을 때, 영희는 유독 머리카락에 집착했다. 건강한 엄마가 딸을 위해 먼저 삭발했다. "엄마 예뻐? 시원해 보이지. 너도 곧 이렇게 밀어야 한대. 괜찮지?" 그렇게 삭발한 영희가 7년째 투병 중이다. 그때부터 엄마도, 영희도 모자를 쓴다. 엄마는 잠든 영희를 보고 "고통받지 않게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단다. 그간 몇 개의 모자를 썼을까?
암에 걸린 남편과 사별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서 "죽을 날을 정해놓은 사람과의 나날의 아까움을 무엇에 비길까? 애를 끊는 듯한 애달픔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빠른 물살처럼 느껴지고 자주자주 시간이 빛났다. 아까운 시간의 빛남은 행복하고는 달랐다. 여덟 개의 모자에는 그 빛나는 시간의 추억이 있다. 나만이 아는"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