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써서라도 일단은 잡고 봐야 하는 상황들
병이 시작될 때 처음부터 약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의사가 먼저 꺼내는 말은 대개 생활습관 교정이다. 고지혈증이나 당뇨의 초기 구간처럼 굳이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단계에서는 그것이 맞다. 약에는 효과만큼 부작용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지나친 분들이 꽤 많다.
약은 몸에 안 좋다는 인식, 귀찮음, 그리고 한 번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한다는 세간의 믿음이 합쳐져, 되도록 약을 안 먹으려 버티는 것이다. 문제는 그 사이에 흘러가는 시간이다. 약을 미룬 대가는 약을 먹은 대가보다 훨씬 늦게, 그러나 훨씬 크게 청구되는 경우가 많다.
낮은 날의 수치만 믿는 마음
혈압이 높게 나오면 ‘방금 걸어와서’, ‘커피를 마셔서’라며 오를 만한 상황을 찾아 모면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심리다. 그런데 이 심리가 심해지면, 높게 측정된 혈압은 잘못 잰 것이고 낮게 나온 날의 수치가 내 몸의 진짜 상태라고 믿게 된다. 혈당과 고지혈증도 마찬가지이고, 간 수치나 부정맥 같은 심장 문제도 그렇다.
여기에 부작용을 부풀리는 자극적인 영상들까지 넘쳐나면서, 약의 이득은 보이지 않고 위험만 커 보이게 된다. 그 결과 약 대신 생활 습관 교정만 붙들게 되는데, 그 자체는 틀린 길이 아니다. 다만 그 길이 얼마나 길고 험한지를 모른 채 들어선다는 점이 문제다.
생활 습관으로 혈압을 얼마나 낮출 수 있나
미국 고혈압 지침이 제시한 추정치에 따르면 체중을 10㎏ 줄이면 수축기 혈압이 5~20mmHg, 채소와 저지방 위주 식단으로 바꾸면 8~14, 소금을 줄이면 2~8,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을 하면 4~9mmHg가 내려간다. 그러니 초과한 혈압 20mmHg는 체중을 조금 줄이고 운동을 좀 더 한다고 도달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적어도 체중을 5㎏, 많게는 10㎏ 안팎을 빼야 하고, 식단에서 채소의 비율을 상당히 올려야 하며, 30분 넘게 운동하는 날이 주 5일 이상은 있어야 한다.
동시에 달성할 수 있어야 그나마 가시권에 들어온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 가지 현실적 장벽이 있다.
- 실제로 그만큼 실천하는 사람이 드물고
- 실천해도 효과는 사람마다 달라 측정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며
- 무엇보다 그것을 요요 없이 몇 년을 유지하는 사람은 더 드물다.
체중을 10% 넘게 줄이고 1년 이상 유지하는 사람이 다섯 명 중 한 명 정도밖에 안 된다는 연구가 있을 만큼이다. 생활 습관 교정은 가장 근원적인 해법이지만 효능에 한계가 있고, 세 조건을 모두 안정적으로 만족하는 경우는 현실에서 참 드물다. 그런 경험 탓에 일찍 약을 권하는 의료진도 있다.
최적화에 실패한 동안, 장기에는 손상이 쌓여 간다
그래서 약 대신 생활 습관을 택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내가 안고 있는 위험의 크기를 가늠하는 것, 그리고 생활 습관 교정이 실패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높은 혈압과 혈당을 조금만 중기적으로 끌고 가면 주요 장기들이 먼저 상한다. 높은 압력은 혈관 안쪽의 얇은 세포층을 끊임없이 긁어 염증을 일으키고, 그 자리에 콜레스테롤이 쌓이며 혈관 벽은 두꺼워지고 탄력을 잃는다. 심장 근육이 두꺼워지고, 신장의 필터는 압력에 균열이 생겨 단백뇨가 나오며, 망막과 뇌의 가는 혈관들이 소리 없이 막히거나 터진다.
높은 혈당 역시 혈관 벽의 단백질에 들러붙어 같은 길을 밟는다. 이런 손상은 아무 증상 없이 진행되기에 본인은 노력하면서 좋아지고 있다고 느끼지만, 검사에서 발견될 즈음에는 최적화에 실패한 몇 년치의 흔적이 이미 쌓여 있는 경우가 많고, 이렇게 쌓인 손상은 나중에 수치를 잡아도 온전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끝에는 불의의 사건이 기다린다. 뇌졸중, 심근경색, 실신과 낙상은 한 번 일어나면 그 대가가 너무 크고 후유증을 남긴다. 생활습관 교정은 성공해도 몇 달에서 몇 년이 걸리니, 그 사이 입을 손상이 복구 불가능한 종류라면 순서를 바꿔야 한다. 어느 정도 해 보고 안 되면 신속히 약으로 먼저 안정시켜 놓고, 그 위에서 몸을 바꾸는 것이 전체적으로 유리하다.
약으로 먼저 잡아두는 게 좋을 상황들
첫째는 불면증이 오래갈 때다. 불면은 통증, 야간뇨, 불안, 무너진 리듬처럼 원인이 여럿 얽혀 있어 교정에 시간이 걸린다. 불면증 치료의 1순위는 약이 아니다. 그러나 거의 매일 잠들지 못할 정도이고 수면 습관을 고치려 애써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오래 끌지 않는 편이 낫다. 잠이 부족하면 스트레스 호르몬과 교감신경이 밤에도 꺼지지 않아 혈압과 혈당이 오르고, 식욕 호르몬의 균형이 깨져 단것을 찾게 되며, 근육을 짓고 손상을 고치는 성장호르몬이 줄고, 염증은 커지고 면역력은 떨어진다. 잠이 무너지면 운동도 식사 조절도 제 효과를 내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다. 불면이 몇 달을 넘기면 뇌는 침대와 밤을 ‘잠드는 곳과 시간’이 아니라 ‘뒤척이며 깨어 있는 곳과 시간’으로 학습해 버리고, 그때부터는 원인이 사라져도 불면만 남는다. 이때 약의 도움을 받아 몸에 정상 루틴을 다시 학습시키는 편이 오히려 더 빠르고, 전체적으로 약을 먹는 기간도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
둘째는 일정 수준 이상의 높은 혈압이 확인될 때다. 격렬한 운동 직후가 아닌데 수축기 160 이상이나 이완기 95~100이 한 번씩 찍힌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혈관이 이미 그 압력을 견디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침도 이 구간에서는 생활습관 교정과 약을 동시에 시작하도록 권할 정도이다. 잠시라도 두통이 있거나 뒷목이 뻐근하다면 더욱 그렇다. 병원에서 약을 권하면 우선 시작한 뒤 몸을 만들어 가면서 조절하는 편을 권하고 싶다. 오히려 몸이 가벼워져 운동과 생활습관 관리가 훨씬 쉬워지고 기간이 단축되는 경우도 흔하다.
셋째는 공복 혈당은 서서히 오르는데 당화혈색소가 그보다 높게 나올 때다. 공복혈당은 밤새 간이 내보내는 포도당을 인슐린이 얼마나 억누르는지를, 당화 혈색소는 최근 두세 달 동안 식후를 포함한 하루 전체의 평균 혈당을 보여준다. 둘이 어긋난다는 것은 공복은 아직 버티지만 식후 혈당이 이미 크게 튀고 있다는 뜻이며, 식후 혈당을 눌러 주는 췌장의 ‘초기 인슐린 분비’가 먼저 무너지는 것이 당뇨 초기의 전형이다. 이 단계의 높은 혈당은 그 자체로 인슐린을 만드는 세포를 지치게 하는 독성을 띠어, 늦을수록 회복 가능한 몫이 줄어든다.
반대로 약을 일찍 시작해 췌장을 쉬게 하면 이득이 크다는 연구가 많다. 초기 몇 년의 혈당 관리가 수십 년 뒤의 합병증까지 줄인다는 ‘대사 기억’ 효과가 대표적이고, 당뇨 전 단계에서 소량의 약을 시작했을 때 진행이 줄고 장기 경과가 더 좋았다는 연구들도 있다. 생활 습관 교정을 어느 정도 해보고 안 되면, 병원에서 약을 권할 때 일찍 시작하는 것이 손해가 아니다. 흔히 걱정하는 약물 부작용은, 소용량에서 대개 나타나지 않는다.
넷째는 자주 생기는 통풍 발작이다. 한 번 우연히 겪은 발작까지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발가락이나 발목에 통증 발작이 두세 번 이상 왔다면 이미 만성 단계다. 혈액에 녹아 있던 요산이 바늘 모양 결정이 되어 관절에 쌓이는 것이 발작의 정체인데, 발작이 가라앉아도 결정은 그대로 남아 관절을 갉고 결절을 만들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아무리 식습관을 조절해도 재발과 관절 손상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 다반사다.
요산을 낮추는 약으로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필수이고, 미루면 통증은 물론 관절의 모양까지 변하며, 같은 결정이 신장에 쌓여 신장 손상도 피하기 어렵다. 이 밖에도 심방세동처럼 증상이 없어 미루기 쉽지만 뇌졸중 위험을 다섯 배 가까이 올리는 문제도 같은 줄에 있다.
약은 한 번 시작하면 못 끊는 것이 아니다
약을 먹기 시작한다고 생활습관 교정을 그만두라는 뜻이 아니다. 약이 수치를 잡아주는 틈을 타 생활 습관을 바꾸고, 약을 끊을 수 있는 수준까지 몸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순서의 목적이다. 실제로 일찍 잡은 혈압과 혈당은 체중이 줄고 근육이 늘면 약을 줄이거나 끊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수개월 내에 끊어지는 분이 있고 수년 이상 오래 걸리는 분이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 반대다. 처음부터 끊기 힘들 정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발견되면, 생활 습관을 아무리 잘 바꿔도 안전한 범위에 도달하기 어려워 의사도 평생 먹어야 한다고 설명하게 된다. ‘한 번 먹으면 평생’이라는 믿음은 약 때문이 아니라 늦게 시작한 탓에 현실이 되는 셈이다.
교과서와 지침은 생활 습관 교정을 먼저 하라고 이야기하고, 그 말은 옳다. 그러나 교과서는 교과서이고 실전은 다르다. 교과서 속 환자는 처방대로 체중을 빼고 운동을 이어가지만, 진료실 환자는 직장과 가족, 피로와 식욕, 하루하루의 사정을 안고 산다. 실전에서 고민하는 것은 생활습관 교정의 이론적 효과가 아니라, 이 사람이 그것을 해낼 현실적인 확률과 그동안 몸이 치를 대가다.
약은 평생의 족쇄가 아니라, 몸을 바꿀 시간을 벌어 주는 도구다. 지금 이 수치나 증상이 사건이 되었을 때 되돌릴 수 있는가, 그리고 내 생활 습관 교정이 반년 안에 목표에 닿을 현실적인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이 두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렵다면, 일단은 잡고 보는 쪽이 몸에는 더 안전한 선택이다. 기회는 또 있다.
장일영 더힐병원 진료원장 조선일보 입력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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