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후반 A씨는 매년 받는 직장 건강검진이 두렵다. 특히 마음 한쪽에 걸리는 암이 있다. 췌장암이다. 주변에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탓이다.
췌장암은 가장 위협적인 암으로 꼽힌다. 일찍 발견할 방법이 거의 없고, 공격적으로 진행되고, 치료가 어려워 사망률이 높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도 조기검진의 빈틈이 크다는 점이다. 위암·대장암·유방암처럼 검진 체계가 자리 잡은 암도 있지만,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췌장암·난소암처럼 일반인이 정기적으로 받을 만한 표준검진이 거의 없는 암도 많다. 암은 다른 장기로 전이되고 나면 사망률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만큼 암의 ‘조기 발견’은 의료계의 숙원과 같았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피를 한번 뽑아서 췌장암 포함 50가지 이상 암의 신호를 찾아낸다”는 검사법이 나오며 암 혈액검사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원격의료 기업 힘스 앤 허스(Hims & Hers)는 이 검사법을 지난 2월 1억명 이상 시청하는 수퍼볼 광고에 내세우기도 했다. 여기 나오는 검사법은 진단 전문기업 그레일(Grail)이 개발한 암 혈액검사 ‘갤러리(Galleri)’다.

수퍼볼 광고에 등장한 암 혈액검사 ‘갤러리’. 이처럼 여러 암의 신호를 한 번에 찾아내는 검사를 다중암 조기진단(MCED)이라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MCED 검사가 FDA 승인을 받고 임상적 이익을 입증한다면, 메디케어 비용 지급을 승인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암 혈액검사가 제도권 검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상징적 사건이다. 힘스 앤 허스 광고 화면 캡처
갤러리는 아직 FDA 승인을 받지는 못했지만, 5년 전부터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정가는 949달러로 지난해에만 18만5000건을 팔아 1억368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과학은 암 조기 검진의 중요한 문턱을 넘고 있는 중이다. 혈액 속에 떠다니는 암의 DNA 조각을 찾거나, 암 주변에서 활발해지는 생체 신호를 읽어내는 기술이 빠르게 정교해져 간다. 특히 대장암과 췌장암에선 암 검진의 판이 바뀔 수 있다는 결과도 나왔다.
피 한 방울로 암을 진단하는 기술, 어디까지 왔을까. 췌장암같은 어둠의 암살자도 조기에 밝혀낼 수 있을까.
📋목차
① 췌장암, 혈액 진단의 혁신
② 혈액으로 찾아내는 대장암
③ 피 속에 떠다니는 암의 흔적
④ 50종 암 혈액검사 성적표
⑤ 바쁜 분들을 위한 세 줄 요약
🌟췌장암, 혈액 진단의 혁신
암 혈액 진단 분야에서 가장 흥미로운 발전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췌장암이다.
췌장암은 50대 이후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암 중 하나다. 조용히 자라고, 증상이 늦고, 발견됐을 때는 이미 수술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국가검진에도 췌장암은 들어 있지 않다.
문제는 췌장암의 흔적은 혈액에 잘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기 췌장암은 크기가 작고 혈액 속으로 흘려보내는 암 DNA도 적다. 기존 표지자인 CA19-9는 치료 경과나 예후를 보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조기검진용으로 충분히 예민하지 않다.
그래서 2025년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연구팀은 암의 DNA 조각이 아니라 암 주변에서 활발해지는 효소의 변화를 읽어내기로 했다. 췌장암이 생기면 암세포가 자라면서 원래 있던 조직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단백질을 자르는 효소인 프로테아제의 활성 정도에 변화가 생긴다. 췌장암 관련 효소 활동이 활발할수록 형광 물질이 방출되게 만들어 형광 신호를 읽어냈다.

연구팀은 췌장암이 생기면 혈액 속에서 특정 단백질분해효소의 활동이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효소는 단백질을 자르는 ‘가위’ 같은 역할을 한다. 연구팀은 이 가위가 자를 수 있는 작은 펩타이드에 형광 신호가 나오는 장치를 붙여뒀다. 췌장암 관련 효소 활동이 활발할수록 이 펩타이드가 더 많이 잘리고, 그만큼 형광 신호도 강해진다. 연구팀은 이 형광 신호를 읽어 췌장암 가능성을 판별했다. 연구팀은 이 검사에 팩맨(PAC-MAN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픽 박지은
이 검사는 암이 아닌 사람을 암이라고 잘못 판정하지 않는 능력인 특이도가 매우 높았다. PAC-MANN 단독으로는 건강한 사람과 암이 아닌 췌장 질환 환자 등 비암 샘플의 98%를 올바르게 음성으로 구별했다.
췌장암을 실제로 잡아내는 민감도는 PAC-MANN 단독으로 전체 췌장관선암 73%, 초기 췌장암 62%였다. 기존 표지자인 CA19-9와 함께 사용했을 때는 초기 췌장관선암 민감도가 85%로 올라갔고, 특이도는 96%였다. 연구팀은 “췌장암 수술 뒤 프로테아제 활성이 줄어든다는 사실도 관찰해, 이 검사가 치료가 얼마나 잘 이뤄졌는지를 확인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 놀라운 건 비용과 속도다. 연구팀은 실험실 기준으로 피 한 방울보다 적은 양인 혈액 8㎕(마이크로리터)만 있으면 되고, 검사 시간은 45분, 샘플당 반응 비용은 1센트(약 15원) 미만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실제 병원 검사로 상용화되면 가격은 이보다 높아질 수 있지만 원리 자체가 매우 싸고 빠르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혈액으로 찾아내는 대장암
암 혈액 진단의 현실화에 근접한 분야는 대장암이다.
미국 FDA는 2024년 가던트헬스(Guardant Health)의 쉴드(Shield) 혈액 검사를 평균 위험군 45세 이상 성인의 대장암 선별검사로 허가했다. 회사 발표에 따르면 쉴드는 미국에서 대장암 1차 선별검사로 승인된 첫 혈액검사다.
쉴드는 세포에서 분리돼 혈액을 떠도는 DNA인 cfDNA를 분석한다. 암세포에서 떨어져 나온 DNA 조각이 혈액에 섞이면, 그 안에 대장암과 관련된 분자 신호가 남는다. 검사는 이 중 이상 신호를 찾아낸다.

가던트헬스의 대장암 혈액검사 쉴드. 고위험군이 아닌 45세 이상의 평균 위험군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픽 박지은
FDA 자료에 따르면 쉴드는 대장암에 대해 83.1%의 민감도, 진행성 종양에 대해 89.6%의 특이도를 보였다. 즉 대장암 환자 100명 중 약 83명을 혈액검사로 잡아냈고, 대장암이나 진행성 선종이 없는 사람 100명 중 약 90명에게 음성 결과를 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약점도 뚜렷하다. 쉴드의 진행성 선종 발견 민감도는 13.2%에 그쳤다. 진행성 선종은 용종처럼 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 단계 병변을 뜻한다.
대장내시경의 강점은 바로 이 전 단계 용종을 찾아 떼어내 암 자체를 예방한다는 데 있다. FDA 설명서도 쉴드는 진행성 선종을 찾는 검사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쉴드는 대장내시경을 대체하기보다 이 검사의 불편감을 회피하려는 이들을 검진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혈액검사는 분명 이 장벽을 낮춰주기 때문이다. 완벽하진 못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아서다. 물론 양성이 나오면 반드시 대장내시경으로 확인해야 한다.
🛟피 속에 떠다니는 암의 흔적
피 한 방울로 여러 암을 동시에 확인하는 기술도 성장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암 진단은 생검을 거친다. 암으로 의심되는 몸 속 조직을 떼내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폐에 덩어리가 보이면 조직검사를 하고, 대장에 혹이 보이면 내시경으로 떼어낸다.
정확하지만 침습적이다. 절개하든, 주사를 넣든 해서 몸에 상처를 남긴다는 말이다. 또한 검사 부위가 분명해야 암 진단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암 진단을 혈액 검사로 대체하려는 열망은 과거부터 존재해 왔다. 그런 검사 중 하나가 CEA, CA19-9, AFP, CA-125 같은 종양표지자 검사다. 하지만 종양표지자 검사는 한계가 뚜렷하다.
예를 들어 CA19-9 수치는 췌장암과 담도암 환자에게서 높게 나타날 수 있지만, 담석증·췌장염·간질환에서도 올라간다. 현재 사용되는 종양표지자 검사는 ‘흐릿한 경고등’에 가깝다. 불이 들어왔다고 꼭 암이 아니고, 불이 꺼졌다고 암이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모든 범죄자가 증거를 남기듯 암세포도 흔적을 남긴다. 암세포가 자라고 죽고 부서질 때 DNA 조각이나 메틸화 패턴, RNA, 단백질, 효소 같은 흔적이 혈액으로 미세하게나마 흘러나온다. 이 신호를 증폭시켜 정밀하게 읽어내는 기술을 ‘액체생검’이라고 부른다.

암이 초기일 때는 혈액으로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일정 정도 크기를 넘어서야 감지 가능한 암의 DNA가 혈액으로 흘러나온다. 그래픽 이민서
액체생검의 꽃은 다중암 조기진단 검사다. MCED(Multi-Cancer Early Detection)라고 부른다. 한 번 피를 뽑아 여러 암의 신호를 동시에 찾는 기술이다.
최근 가장 각광받는 건 미국 진단 전문기업 그레일(Grail)의 ‘갤러리(Galleri)’다. 갤러리의 광고 문구만 보면 암 검진의 총아처럼 보인다. 특히 췌장암·난소암·담도암처럼 표준적 방법으로는 조기검진이 거의 불가능한 암까지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MCED는 피 한번 뽑아 여러 암을 한번에 찾아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여러 진료 기관과 검사실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환자들의 불편을 크게 줄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픽 이민서
🎯50종 암 혈액검사 성적표
하지만 최근 발표한 성과는 기대에 다소 못 미친다.
지난해 10월 연구 성과 발표에 따르면 갤러리는 특정 치명 암 12종에서는 73.7%의 민감도를 보였지만, 전체 암 기준 민감도는 40.4%였다. 민감도는 암이 있는 사람을 검사해서 암이 있다고 나온 비율 뜻한다. 나쁘지는 않지만 암을 찾아내는 능력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나왔다.
특이도는 99.6%로 높았다. 특이도는 암이 없는 사람을 검사해서 암이 없다고 나온 비율이다. 즉, 갤러리 검사는 암이 없는 사람을 암으로 오진하는 비율은 낮지만, 암이 실제로 있는 사람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역량은 충분치 않다는 뜻이다.

갤러리가 혈액 속 신호를 감지한다고 주장하는 암종들. 그래픽 이민서
올해 2월 내놓은 발표는 의료계 가장 큰 뉴스 중 하나였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와 공동으로 갤러리 검사를 국가 건강검진에 추가했을 때 효용이 있을 것인지 들여다본 연구다. 암을 3~4기가 아닌 1~2기에 조기 진단하면 사망률을 대폭 낮출 수 있는 만큼, 갤러리 도입 뒤 3~4기 진단이 줄고 1~2기 진단이 늘었는지 확인하는 게 연구의 1차 목표였다.
50~77세 약 14만2000명을 대상으로 갤러리 검사를 한 뒤 3년 이상 추적관찰했다. 그 결과 가장 중요한 1차 목표인 3~4기 암의 통계적으로 유의한 감소는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1~2기 초기 암을 잡아내는 민감도는 27.5%에 그쳤다. 다만 그레일 측은 “12개의 치명적 암에서 4기 암 진단이 줄고, 1~2기 암 발견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그레일의 주가는 발표 직후 50% 가까이 떨어졌다.

그레이스 린(Grace Lin) 미국 UCSF 교수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다중암 혈액검사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더 많은 암을 찾으면 더 좋은 검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암종과 병기에 따라 민감도가 크게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현재 권고되는 유방암, 대장암, 자궁경부암, 폐암 검진을 혈액검사로만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그래픽 박지은
미국 국립암연구소는 현재 미국에서 FDA가 허가한 다중암 조기진단 검사는 없다고 설명한다. 일부 검사가 실험실 개발 검사 형태로 제공되고 있지만, 이런 규제 체계는 “검사가 무엇을 측정하는지”는 보지만 “실제로 암을 일찍 찾아 생명을 구하는지”까지 요구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불확실한 암 혈액검사는 ‘진단 오디세이’의 위험이 있다. 진단 오디세이는 암이 없는데 양성으로 나올 경우, 환자가 불안감 속에서 원인을 찾기 위해 불필요한 PET-CT 등 여러 후속 검사를 받으러 긴 여정을 떠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방사선 노출과 정신적 고통은 무시할 수 없는 비용이기도 하다.
피 한 방울로 모든 암을 찾아내는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췌장암처럼 가장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암을 혈액 속 빛의 신호로 추적하는 시대는 이제 문턱까지 와 있다.
3️⃣바쁜 분들을 위한 세 줄 요약
① 암 혈액검사는 피 속에 떠다니는 암 DNA, 단백질, 효소 신호를 읽는 기술이다. 미국에서 일부 검사가 판매되고 있지만, 여러 암을 한 번에 찾는 다중암 조기진단 검사는 아직 FDA 승인을 받은 제품이 없다.
② 대장암 혈액검사 쉴드는 미국에서 선별검사로 허가됐고 대장암 민감도 83.1%를 보였지만 암 전 단계 용종 발견 능력은 약해 대장내시경은 완전히 대체하긴 어렵다.
③ 췌장암 혈액검사 팩맨은 혈액 8㎕, 45분, 샘플당 1센트 미만으로 췌장암을 진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다. 종양표지자 CA19-9와 함께 쓰면 1기 췌장암 정확도 85%를 보여 가장 흥미로운 차세대 기술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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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정봉 정수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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