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상식

알코올 중독자는 백수 폐인? 의사·검사·임원들 많은 이유

해암도 2025. 3. 7. 19:00

알코올 중독 치료의 권위자 남궁기(64) 교수에게 한 중견기업 부장이 찾아왔습니다. 최근 ‘무서운’ 일을 겪은 후 더는 놔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병원을 찾은 거였죠.

“회식 때 술을 엄청 마셨어요. 그래도 부장인데, 제가 빠지면 되겠습니까. 회사 사람들과 먹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눈 떠 보니 집에 누워있는 거예요.”

“그게 왜 무섭다는 거죠?”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 차가 주차돼 있더란 말입니다. 전혀 기억이 안 나거든요. 혹시 음주운전을 한 건 아닐까, 누굴 치기라도 한 건 아닐까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급하게 핸드폰을 뒤져 보니 다행히 대리운전을 불렀더라고요. 문제는 이게 한 번이 아니란 겁니다. 이러다 진짜 사고내겠다 싶더라고요.” 


                                      사진 pixabay

술 마시고 필름이 깨끗이 끊기는 현상,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나요? 일상생활 잘하고, 사회생활 문제없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흔히 알코올 중독자는 직업도 없고 매일 술을 달고 살 것 같지만, 의외로 일상생활을 잘 해나가는 ‘고도적응형’ 환자가 많다고 합니다. 의사·검사·교수·대기업 임원처럼 고학력·고소득층이 많은 것도 특징이죠. 사회적 역할을 잘 수행하기 때문에 스스로 ‘알코올 사용 장애’라는 걸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술 좋아하는 ‘애주가’라고만 생각하다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야 병원을 찾는 거죠.

국내 알코올 중독 치료 분야를 개척한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남궁 교수는 “암을 치료하지 않으면 점점 커져 목숨을 잃듯, 알코올 문제도 초장에 잡지 않으면 결국 삶이 파괴된다”고 경고합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마신다는 건 싹 다 변명”이라는 따끔한 말도 덧붙였어요. 애주가에서 알코올 사용 장애로 넘어가는 위험 시그널은 과연 무엇일까요. 40년간 알코올 중독 환자들을 만나며 치료에 힘쓴 남궁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돌아온 건 매콤한 조언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알코올 중독 치료 분야를 개척한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남궁기 교수. 강정현 기자

이런 내용을 담았어요

📌 직장생활 잘하고 멀쩡해도 알코올 의존증
📌 일상 망가지기 전, 이 시그널 꼭 챙겨라
📌 환자에게 꼭 말하는 ‘충격 요법’ 질문
📌 “술 권하는 친구? 친구 아닙니다”

🍺 직장생활 잘하고 멀쩡해도 알코올 의존증
알코올 중독, 정확히 뭔가요?  
매일 술 찾고, 손 떨고, 끊어내지 못하는 걸 두고 알코올 중독이라고 많이 부르는데요. 엄밀히 말해 틀린 말이에요. 알코올 중독은 몸에 알코올이 많이 들어가 있는 급성 상태를 말하거든요. 알코올 분해 속도보다 혈류로 유입되는 알코올의 양이 더 많은 거죠. 한 대학 신입생이 한 번에 소주 3병을 들이켰다가 토하며 쓰러진 채 병원에 온 적이 있는데, 그런 케이스를 두고 ‘알코올 급성 중독’이라고 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습관성 음주는 ‘알코올 의존 장애’ 혹은 ‘알코올 사용 장애’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럼 다시 여쭤볼게요. 평범한 음주와 알코올 사용 장애는 어떻게 나뉘는 거죠?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예요. 내가 의도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는가. 신체·정신 또는 대인관계·직장·여가생활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불구하고 술을 계속해서 마시는 경우가 그런 거죠.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기는데도 내 의지대로 끊을 수 없는 상태, 그땐 평범한 음주의 단계를 넘어선 거예요.

술 끊지 못해도, 직장에서 일 잘하고 멀쩡히 일상생활 하는 분들 있잖아요.
요샌 그런 증상을 두고 ‘고도적응형’ 알코올 사용 장애라고 부르더라고요. 사실 이 말은 의학 전문 용어는 아닙니다. 아마 구분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단어 같아요. 암을 초기부터 말기까지 정한 것처럼 알코올 의존 단계를 나눈다면, 고도적응형 알코올 사용 장애는 1기나 2기에 해당할 겁니다.

매일 술을 마시면서도 일상생활을 잘하는 분들, 분명 계시죠. 이들이 문제가 없는 게 아닙니다. 흔히 알코올 의존 장애라고 하면, 술에 찌들어 사회생활을 못하고 물건 집어던지며 화내는 모습만 생각하니, 오히려 일상생활을 잘하면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해요.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데도 문제가 되나요?  
그럼요. 만약 암 초기에 치료하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어떻게 되겠어요. 말기암으로 진행돼 몸속 장기를 다 망가뜨릴 거예요. 어떤 암도 한 번에 4기가 되는 건 없어요. 초기부터 시작해 점점 심해지는 거죠. 알코올 사용 장애도 마찬가집니다. 지금은 일상생활에 적응을 잘하며 지내겠지만, 어느 순간 진짜 위험한 수준으로 갈 겁니다. 결국은 일상생활을 파괴하고 말 거예요.

알코올 사용장애 진행 4단계

✔1단계 : 전구 단계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때때로 마신다.
해방감을 주기 위해 주기적으로 마신다.
음주량이 증가한다.

✔2단계 : 진행성 단계
은밀히 마시게 된다.
음주에 대한 죄책감이 생기고 논의를 피한다.
필름 끊김이 점차 심해진다.
✔3단계 : 중대한 위기 단계
음주조절 능력을 잃게 된다.
직장을 잃거나 그만둔다.
해장술을 마시게 된다.
허세를 부리고 공격적인 행동을 한다.
일시적으로 음주를 중단하기도 한다.
이유 없이 원한을 품거나 의처증/의부증이 심해진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식욕이 없어진다.
중독에 대한 변명을 한다.

✔4단계 : 만성적 단계
‘술꾼’이 되어 매일 마시게 된다.
조금만 마셔도 취한다.
도덕적으로 타락한다.
일할 능력이 없어진다.
술 이외에 다른 생각이 없다.

출처, 2018 음주폐해예방교육 교재(보건복지부, 한국건강증진개발원)

🍺 일상 망가지기 전, 이 시그널 꼭 챙겨라

우상조 기자

매일 퇴근 후 맥주 한 캔씩 마시기, 이 정도는 괜찮겠죠?  
한 병, 한 캔, 한 모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양은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 알코올 사용 장애 진단 문항에도 ‘내가 의도한 것보다 많이 먹는 경우’라고만 표현돼 있거든요. 가족과 관계도 좋고, 회사에서 일도 잘하고, 건강에도 전혀 문제없다면 매일 소주 5병씩 먹는다고 해도 알코올 사용 장애는 아니에요. 하지만 언제까지 멀쩡한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없어요. 반드시 알코올 사용 장애로 넘어가는 단계를 만나게 될 겁니다.

자동차를 사서 1년에 10만㎞씩 달린다고 해봅시다. 지금 문제 없이 차가 잘 나간다고 해도, 5년 혹은 10년 후엔 노후돼서 어딘가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몸도 똑같아요. 맥주 한 캔씩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마시다 보면 결국 문제를 만들게 될 거예요.

그럼 문제가 되기 전 눈치챌 수 있는 시그널은 뭐죠?  
제가 만난 환자들의 경험을 비춰볼 때, 알코올 사용 장애 의심 환자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건 바로 가족의 컴플레인입니다. 특히 아내나 남편이 “당신 이제 술 좀 그만 마셔, 왜 이렇게 많이 마셔”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한다는 거예요. 이건 이미 가정 내에서 관계가 깨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거든요. 모든 안 좋은 징후는 이때부터 시작합니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가장 많이 보이는 증상이 필름 끊기는 거예요. 필름 끊기는 수가 잦아진다면 알코올 사용 장애의 시작일 수 있어요. 이런 분들은 “간단하게 먹자”고 해도 꼭 끝은 폭음으로 끝나죠. 이건 내 의지로 조절이 안 된다는 얘기거든요. 평소에는 아주 신사적인 사람인데, 술만 마시면 성격이 변해서 폭력을 휘두른다거나 욕을 하는 것도 위험 시그널입니다. 다음 날 술냄새 팍팍 풍기면서 늦게 출근하고, 중요한 회의를 망치며 직장 내 문제를 만들기도 하고요. 그때쯤 되면 이제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과 술 마시는 걸 꺼리죠.

술을 엄청 마시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건가요?  
먹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신체가 그렇게 반응하는 거죠. 더 심각해지면, 환시가 보이고 환청이 들려요. 술 깨고 나면 여기가 어디인지 인지하지 못하게 되고요. 간질 환자처럼 발작도 일으키는데, 이 증상이 뇌졸중과 비슷합니다. 쓰러지면 매우 위험하죠. 거기까지 가면 이제 사망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거예요. 치매 위험은 말도 못하고요.


남궁 교수는 "일상생활을 잘하는 고도적응형 알코올 사용 장애 환자는 외래 진료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 환자에게 꼭 말하는 ‘충격 요법’ 질문
업무 스트레스가 높아서 술을 더 먹게 되는 건 아닐까요?
스트레스가 많으면 술을 더 먹을 것 같은데, 꼭 그렇지도 않아요. 그냥 ‘먹던 놈’이 더 먹는 겁니다. 말쑥하게 회사 잘 다니는 변호사, 의사, 기자, 대기업 임원 같은 사람들 중 알코올 사용 장애를 앓고 있는 분들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다 술 먹는 건 아니에요. 러닝머신 뛰는 사람도 있고, 산책을 나서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자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술 마시는 사람들은 업무 스트레스라며 혹은 사업 때문에 마시는 거라며 그저 술 마실 구실을 찾는 것뿐이에요. 저도 예전엔 그랬으니까요.

술 많이 드시나요?
제가 20년 전까지는 술 진짜 많이 마셨거든요. 그때만 해도 윗분들과 회식하면 안 먹을 수가 없는 분위기었어요. 토하는 한이 있어도 마셔야 했으니까요. 그러다 마흔이 되고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는 거예요. 간 수치는 높고 허리 디스크도 있고, 살 쪄서 성인병 위험도 있었고요. 저희 아버지께서 알코올로 인해 몸이 다 망가져서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한 나이가 마흔이었어요. 딱 제 나이였던 거죠.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러다간 아버지와 똑같은 문제로 생을 마감하겠구나, 큰일났다!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안 먹기 시작했는데, 10년쯤 지나니 체질이 바뀌었어요. 이젠 술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몸이 힘들더라고요.

알코올 사용 장애로 찾아오는 환자들에겐 어떤 말씀을 해주시나요?  
전 이 질문을 꼭 해요. “당신 인생에서 절대 잃어버려선 안될 만큼 소중한 건 뭔가요?” 그러면 99%의 환자가 가족과 건강, 이 두 개를 얘기합니다. 저는 이렇게 다시 말해줘요. 환자분에게 소중한 건 그게 아닌 것 같다고요. 가족이 싫어하고 건강 나빠지는데도 굳이 술을 마시는 건, 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요. 그럼 다들 놀랍니다.

일종의 충격 요법이네요?  
그만큼 마음 강하게 먹으라는 이야깁니다. 본인이 알코올 사용 장애라는 걸 빨리 인정하고 술을 끊으라고요. 다들 술 끊으라고 하면 힘들다고 생각해서인지 투덜대시더라고요. 근데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암과 같은 병은 아무리 먹는 걸 바꾸고, 운동을 하고, 삶의 환경을 바꿔도 암세포가 없어지지 않거든요. 근데 알코올 사용 장애는 술만 안 먹으면 다 해결됩니다. 훨씬 쉽고, 희망적이잖아요.

🍺“술 권하는 친구? 친구 아닙니다”
혼자 술 끊기 힘들다면 병원에 가는 게 좋을까요?  
만약 에베레스트를 혼자 올라가라고 한다면 아무도 못 갈 거예요. 심지어 훈련된 사람도 힘들죠. 그래서 에베레스트 등반할 땐 길 안내를 해주는 ‘셰르파’와 같이 가거든요. 그러니 단번에 술 끊겠다며 힘든 길 혼자 가지 마세요. 병원을 찾아 내게 맞는 의사도 찾고요,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의지하고요. 주위에 도움을 많이 요청하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당신의 ‘셰르파’가 될 수 있으니까요.

만약 친구들이 자꾸 술 먹자고 부르면 어떻게 대처하죠?  
술 끊겠다고 말했는데도 술 먹자고 부르는 친구는 친구도 아니에요. 사랑하는 친구가 술 때문에 건강도 위험해지고, 배우자와 이혼할 위기에 처했다면 오히려 “너 술 좀 끊어”라고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친구가 술 시키려고 해도, 오늘은 마시지 말자며 말려야 진짜 친구죠. “딱 한 잔은 괜찮아” 하며 술 시키는 친구는, 술 먹기 위해 당신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술 친구는 없어요. 술 끊겠다고 말했는데도 술 마시자고 한다면 그 사람 만나지 마세요.

여러 노력을 했는데도 매번 금주에 실패하면 어떡하죠?  
실패하는 사람은 훌륭한 분입니다. 일단 시도를 했잖아요. 실패하면 또 도전하면 돼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게 운동이랑 비슷한데요. 제가 꾸준히 운동하다가 바쁘고 피곤해서 운동을 일주일 쉰 적이 있어요. 몸은 그사이 굳어서 더 운동하러 가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래도 이 악물고 다시 나갔죠. 만약 제가 그 빠진 일주일 걱정하느라 운동하러 가기를 포기했다면, 몸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졌을 거예요.

금주도 마찬가지예요. 당연히 실패할 수 있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실패해도 또 금주하겠다고 도전하는 모습이에요. 실패에 집중하느라 가족들의 응원과 본인의 건강을 놓치지 마세요.


남궁 교수는 금주 첫 단계로 "주위에 많이 이야기하기"를 꼽았다. 주위에 말하는 것만으로도 술자리가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강정현 기자


※ 중앙일보(주)는 본 콘텐트에 대한 저작권 등 일체의 권리를 보유하며, 본 콘텐트의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에디터     선희연     중앙일보 기자     발행 일시2025.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