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조선] 김지수의 파워 인터뷰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정책학 김현철 교수
인생에서 많은 것은 내 통제 범위 바깥의 일이다. 나라 운, 부모 운, 학교 운, 친구 운, 배우자 운, 상사 운, 자식 운…, 꼽아 보면 안 중요한 것이 없는데 성공해서 잘나가는 사람 중 어떤 이는 ‘내 능력으로 얻은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한다.
인생은 능력일까? 운일까?
나로 말하자면 인생 초기엔 ‘억세게 운이 없다’고 악을 쓰며 살다가 중반 이후를 넘어가면서 ‘받은 복을 세어보며’ 숨죽이게 됐다. 모자란 능력만큼 운이 받쳐주고, 크고 작은 불행 뒤에 예기치 않은 은혜도 누리며 살아왔음을 깨달으며.
그러던 중 ‘인생 성취의 8할은 운’이라고 단언하는 경제학자를 만났다. 살아 움직이는 사회 실험 데이터로 견고한 ‘능력주의 세계관’에 균열을 내고 있는 경제학자 김현철은 말한다. “태어난 나라에 따라 평생 소득의 50% 이상이 결정됩니다. 부모가 물려준 DNA가 30% 비율로 소득에 영향을 미쳐요. 집중하는 힘조차 유전과 양육 환경에서 나와요. 순수한 내 능력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젊은 시절 보건소 왕진 의사로 근무하다 사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에서 실증주의 경제학자로 방향을 튼 김현철 교수는 의료 시술하듯 경제학을 사용한다. 그가 쓴 책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은 피부에 닿는 생활 이슈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서둘러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노인 요양 보호 등급 신청을 했고, 형편이 어려운 지인이 구직하지 않는 이유가 ‘기초생활보장 제도 혜택이 끊길까 봐서’라는 내막도 알게 됐다.
책은 매우 구체적이다. 육아휴직에 따른 자녀의 성적 변화를 통계로 보여주고, 황혼 육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으로 조부모 돌봄 수당 사례를 제시한다. 저자인 김현철 교수는 미국의 코넬대 교수로 재직하다 2020년 외국인 가사도우미 비용이 저렴한 홍콩의 홍콩과학기술대로 직장을 옮겼다. 다음은 일문일답.
경제학은 신고전학파가 중심이 돼서 세상을 '능력주의'로 디자인하는 데 오래 기여했다. 최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흐름을 보면 통계를 무기로 '불평등'을 파고들었다. "지금 해외 경제학자들은 다들 통계와 사회 실험으로 삶의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가령 과거엔 50년 추적 조사로 '인간관계가 좋으면 행복하다'고 결론을 내려도 그 인과관계가 불투명했다. 친구가 많아서 행복한 건지, 행복한 사람이 친구가 많은 건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신뢰성 혁명'이 일어나면서 데이터 환경이 획기적으로 좋아졌다. 보건·인력·교육 분야에서 데이터를 돌려서 정책 효과의 인과성을 입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생 성취의 8할은 운이라는 사실을 경제학자가 이야기하니, 왠지 위로가 된다. "(웃으며) 사실이다."
한때 나도 능력주의의 신봉자로 전력 질주했지만, 살아보고 8할이 운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데이터가 말해준다. 태어난 나라에 따라 평생 소득의 50% 이상이 결정된다. 부모가 물려준 DNA가 30%, 자라난 환경이 10% 비율로 소득에 영향을 미친다. 입양아와 친자의 소득 추적 통계로 밝혀진 사실이다.
나머지가 살면서 만나는 행운과 불운, 은인과 악연이 크로스되는 거다. 운 좋게 대학에 간 것, 사소한 기적들⋯, 따지고 보면 노력과 집중할 힘조차 유전과 양육 환경에서 나온다. 순수한 내 능력과 노력은 제로에 가깝다.”
당신 운은 어땠나. "나도 운이 좋았다. 의과대학 입학도 경제학과 박사 시험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인지 범위 바깥의 기적이다. 아이비리그 교수가 된 것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마침 그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28세에 공중보건 의사로 노인들을 진료하다 '왜 가난한 사람은 더 아픈가?'라는 질문을 만났다. 사회의 병을 고치고 싶어서 경제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것도 행운이다. 실증주의 경제학자는 통계와 현장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나는 그때 이미 시골 왕진 의사로 현장에서 훈련이 됐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경제학 석사과정 중이던 김현철은 무작정 제네바로 날아가 세계보건기구(WHO) 총재를 인터뷰했고, 그의 주선으로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를 만났다. 빈곤국의 보건과 재건에 힘쓴 김용 전 총재를 만난 것도 운명의 전환점이 됐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경제학을 계속하라는 김용 전 총재의 권유로 컬럼비아대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코넬대 교수로 재직하며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보건 정책 분야 현장 실험을 이어갔다.
이력을 알고 보면 운에 앞서 엄청난 능력자라는 생각이 든다. "젊을 때는 나도 능력주의 신봉자였던 것 같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코넬대, 컬럼비아대 출신 명문대 조교들이 나를 거쳐 갔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모자보건 사업, 여성 취업 리서치 프로젝트를 할 때는 내전이 터져서 근처에서 연구하던 다른 팀 미국 연구원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내 팀원 중 한 명도 석해균 선장이 탔던 에어 앰뷸런스를 타고 남아공으로 가서 치료받았다. 내 아내 한예은도 개발 국가 젠더 연구를 하러 임신한 채 분쟁 지역을 다녔다. 죽음 가까운 곳에서 프로젝트를 하면서 좋은 동료들을 만났고, 운 좋게 살아남았다."
결정적 순간마다 리스크를 회피하지 않았기에 인생은 능력보다 운에 좌우된다는 수많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능력보다 운에 좌우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게 왜 중요한가. "능력주의의 함정이 '네가 게으른 탓'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내 성취가 내 능력보다 운에서 왔다는 걸 알면 겸손해진다. 처지가 곤란한 사람을 향해 '노력이 부족하다'고 탓하기에 앞서 '나보다 운이 없었구나'라고 인정하게 된다. '나는 운이 좋고 너는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인정해야 약자를 보듬는 품이 생긴다. 우리는 지금 '고부담 고복지' 국가로 가야 할 전환점에 있다.
미국은 빌 게이츠 같은 존경받는 부자가 많고, 그런 개인의 기부 문화의 힘으로 굴러간다. 유럽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복지 국가를 실현했다. 어느 여정으로 가든 ‘내가 이룬 것은 다 내 노력 덕’이라는 함정에서 나와야 시작할 수 있다.”
명문대생의 태도와 인식을 바꾸는 것이 장기적인 복지 국가로 가는 데 도움 될 거라고 했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나온 제비뽑기 대학 입시를 예로 들면서 말이다. 대학 입시를 제비로 뽑는단 말인가. "제비가 운이다. 인생 8할이 운이다. 몇억원이 걸린 아파트도 '로또 청약'이라며 제비로 뽑지 않나.
자연이 만든 제비뽑기는 놀랍지 않은데, 대학 입시라고 못 할 게 있을까. 내가 교환 학생으로 머물렀던 스웨덴, 네덜란드는 상위 5% 중에서 의과대학 입시를 제비로 뽑는다. 문제 한 개 더 맞고 틀리는 걸로 줄 세우지 않는다. 시험도 모르면 찍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커트라인 정해서 한 개 틀리면 합격하고 두 개 틀리면 불합격하면, 나쁜 스트레스만 가중된다. 명문대 지원자 중 합격자 대비 3배수는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 어느 정도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비를 뽑는 게 더 건강한 해법일 수 있다. 한 문제로 당락이 결정되니, 수능 끝나면 킬러 문항으로 시비가 붙는다.”
책을 보면 흥미로운 데이터가 많다. '사립고 출신 남성'에게 '명문대 임금 효과'가 몰려있었다는 통계나 성적도 비만도도 룸메이트의 영향을 받는다는 '친구 효과'도 인상적이었다. "학력 과실을 따 먹는 것조차 불평등하다. 65세 이상 남성은 지금 특정 사립고 출신이 임원 승진과 고소득의 과실을 거의 따먹었다. 친구 효과는 유유상종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무작위로 배정된 룸메이트에 따라 학점과 체중까지 달라진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친구는 배우자인데, 배우자에 따른 행운과 불운 연구는 현재로선 샘플 측정이 불가능하다(웃음)."
최근의 흐름을 보면 경제학이 정말 삶 가까이 들어온 느낌이다. 실증주의 경제학, 어디까지 왔나. "지금 미국 경제학의 3분의 1이 응용미시경제학 분야다. 정부의 특정 정책을 사회 실험으로 엄밀히 평가한다. 최근 응용미시경제학자들이 세 번 노벨상을 타면서 주류가 됐다. 실증주의 경제학은 과거 사건을 철저히 분석, 인과를 계산해서 미래에 제언한다. 대표적인 게 헤크먼 곡선이다. 운 나쁜 사람을 돕는 수많은 정부 정책이 시행됐을 때, 흩뿌려진 나쁜 운이 어떻게 개선을 이뤄내는지, 20년간 추적한 곡선이다.
영유아기, 태아기, 임산부⋯, 정부가 일찍 개입할수록 지원 효과가 드라마틱하게 나타났다. 그 답은 과학이 갖고 있다. 인간의 신체, 뇌 기능이 말랑말랑할 때 생긴 나쁜 사건이 인생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례로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후 출산했을 때와 출산 후 돌아가셨을 때, 태어난 아이의 건강이 확연히 다르다. 돌아가신 후 낳은 아이는 태아기 내적 충격으로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약을 먹을 확률이 25% 올라간다. 성인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10% 늘어난다.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유아기 부정적 경험과 그에 따른 고통의 파급 증거는 차고 넘친다.”
예방의학처럼 정부의 개입이 인생 초기에 이뤄져야 하나. "그렇다. 정책은 의료 시술처럼 이뤄져야 한다. 어릴수록 투자 대비 효과가 크다. 태아 보호, 임산부 보호, 영유아 보호, 저소득층 한 부모 가정에 대한 지원⋯, 돈 쓰려면 여기 투자해야 예방 치료 효과가 극대화된다."
의사 출신 경제학자로 공공의대 등 의사 증원 부문에도 쓴소리를 했다. "미국에 있을 때 내가 두통이 심해 신경외과 의사를 만나려면 4개월이 걸렸다. 필수 의료가 부족하다지만 미국, 유럽과 비교하면 한국은 양호한 편이다. 출산실 의사가 부족한 이유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분만을 안 하겠다고 결정해서다. 그 문제는 지역 거점으로 팀 단위 구조로 풀어야 한다. 사실 의사가 더 필요한 건 고령화 때문이다. 현재보다 미래를 위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정책은 항상 인간의 자율성과 욕구를 고려해야 한다. 52시간, 69시간 근무도 마찬가지다. 일방적 규제로 풀면 저항이 생긴다. 당장 취약 지역에서 일할 의사를 뽑을 때도 강제가 아니라 '커리어'로 접근하면 길이 보인다. 실제 취약 지역 의사 선발 사례를 보면 봉사 정신보다 성취 욕구가 큰 사람이 진료 횟수, 백신 접종률 등에서 월등히 앞섰다. '봉사'보다 '성취'를 강조해서 다양한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현실은 의사들은 증원을 반대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인재는 의대로 몰리고 있다. 요즘엔 초등생 학원에도 의대반이 생기고 밤늦도록 '수학의 정석'을 푸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한숨 쉬며) 지금처럼 인재들을 다 의대로 보내면 국가에 손해가 막심하다. 의대 졸업자들 카톡방에서 관련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의대는 지능지수(IQ) 상위 5%면 충분하다. 적당히 똑똑한 학생들이면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상위 0.1%가 의대에 간다. 이런 학생들은 과학계와 공대로 가야 한다.
K의료를 얘기하지만, 서울대학교병원, 세브란스병원 매출을 봐도 의료 산업은 국내 마켓에 한정돼 있다. 글로벌 마켓은 과학기술이다. 의사는 종합병원이 성취의 최고점이지만, 과학자가 성공해서 기업을 만들면 사회에 환원이 되고 국가 경제가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 정부가 과학기술계의 연구개발(R&D) 예산을 깎고 의사를 증원하겠다고 하니, 생태계가 교란되고 불필요하게 똑똑한 애들이 다 의대로 몰려드는 거다.”
마지막으로 이 땅의 소시민에게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이 언제인지 조언해달라. “(미소 지으며) 내가 하는 경제학은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을 예측하는 게 경제학은 아니다. 예측할 수도 없다. 인생 성취의 80%가 운으로 결정된다. 그중 50%가 태어난 국가에 의해 좌우된다. 좋은 국가는 국민소득의 50%를 책임질 수 있다. 다양한 일자리를 만들고 자녀를 낳아 행복하게 키울 수 있도록 정책을 설계한다. 물론 좋은 뜻을 가졌다고 모든 정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약자를 돕는 현명한 정책을 내는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의사가 잘 먹고 잘사는 모델이 되는 건 건강하지 않다. 타자(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호부조의 면역력이 생긴다.”
이코노미조선=김지수 입력 202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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