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의 응시 #23]
상상은 생각의 줄넘기다.
생각이 즐겨 하는 유산소 운동.
한 바퀴 두 바퀴, 줄을 넘는 생각이 어느 순간 훌쩍, 다른 곳으로 월경(越境)하는 일이다.
공상이 ‘열기구에 탄 상상’처럼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달아나는 것이라면,
상상은 새처럼 날아오르다 언제든지 지면에 착지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고 있다.

스무 살 무렵 프란츠 카프카를 좋아했다. 나를 사로잡은 작품은 《변신》이었다. 어느 아침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한다니 설정이 신선했다. 말이 되지 않아도 어느 한 세계를 치밀하게 그려내면 핍진성이 생긴다는 것을 카프카에게 배웠다. 작품에 내재된 의미를 생각한 건 한참 후였고, 당시엔 사람이 벌레로 변신한다는 설정에 꽂혀 비슷한 소설을 흉내 내어 써보느라 야단이었다. 카프카의 아류작(?)으로, 내가 야심을 품고 쓴 습작의 제목은 ‘픽션 혹은 논픽션’이었다. 멋있어 보이는 제목을 짓기 위해 꽤 고심했다. 소설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
“어딜 갔다 이제 들어와?”
외출에서 돌아온 남자가 자기 개에게 꾸중을 듣는 장면이 소설의 시작이다. (사람이 벌레로 변신하는 것만큼 신선해야 했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게으르고 한심한 무명작가가 저녁부터 새벽까지 자기 개에게 폭언을 듣는다. 남자는 개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려 애쓰지만 무력하다. 개는 남자가 마광수의 《권태》란 작품을 교묘히 표절했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다. 그것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개의 위엄과 권위는 하늘을 찌르고, 개는 남자에게 자살하라고 집요하게 설득한다. 결국 남자는 개의 지시에 따라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는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상상력이 돋보였기 때문일까? 당시 내 습작을 읽은 교수님께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훨훨 날던 내 상상력의 규모는 작아졌다. 상상력은 힘(力)인데, 나이 들수록 이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상력은 제약받지 않을 때 활달해지는데, 나이와 함께 ‘상식’과 ‘관습’이 쌓이면서 상상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 힘이 약해진 건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꾸준히 상상해본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가령 이런 상상은 어떤가?
1.
인간의 생식기는 왜 하필 몸 한가운데 있을까,
생각하다 하게 된 상상
만약 ‘생식기’가 몸 여러 곳에 있다면 어떨까? 생식기가 손가락 끝에 달려 있다면 재미있는 일이 많을 게다. 맨손은 불온한 취급을 받을까? 자판을 두드릴 때 손가락을 자극할 수 있으므로 손가락을 가리기 위한 장갑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대가들이 쓴 위대한 문학작품의 양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작품에 열을 올리는 대가들이라면, 작품을 쓰기 위해 신경차단술을 받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타이핑을 칠 수 있도록 손끝에 연결해 사용하는 도구가 나올 수도 있겠다. 아무하고나 악수했다가는 문란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얼굴에 크림을 바르다 혼자 흥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열 손가락용 팬티도 필요하겠지! 정숙한 사람이라면 무쇠처럼 딱딱한 골무 같은 팬티를 선택할까? 레이스가 달린 골무도 있을까? 식사하다 소변이 마려우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몰래 볼일을 볼 수도 있겠지. 아니, 어쩌면 고급 식당에선 테이블 아래 특별 제작한 화장실을 설치해놓을지도 모른다.
아직 상상은 끝나지 않았다. 만약 입술이나 코에 생식기가 달렸다면? 인간은 코를 맞대어 아기를 만들고, 콧구멍으로 아기를 낳을 수도 있을까? 음식이 입술이나 코에 닿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식사 예절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들은 먹는 것 자체를 집에서 혼자 해야 하는 일로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공공장소에서 코를 파는 사람은 풍기문란으로 잡혀갈 테고, 어린이의 코 파기(어릴 때 신나게 누리던 특권!)를 엄격하게 제한할 것이다. 숨어서 코를 파는 어린이는 부모에 의해 오은영 박사 같은 전문의에게 불려갈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자꾸 문제 행동을 해요”, 울면서 하소연하게 될까?
2.
세상의 모든 동물이 인간의 언어로 말하면 어떨까,
생각하다 하게 된 상상
반려동물과 반려인 사이에 볼 수 있던, ‘무조건적인 사랑’은 없어질 것이다. 자식에게 실망을 느끼는 부모는 있어도(많겠지), 반려동물에게 실망했다고 토로하는 자는 드물다. 나는 이 차이가 동물의 ‘말 없음’에서 기인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동물도 다양한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인간의 말과는 다른, 소리나 몸짓으로 얼마든지 말을 한다. 다만 그들에게서 구체적인 의사 표현은 듣지 못하고, 반려동물과 집사 사이에는 언어를 ‘넘어선’ 사랑이 존재한다. 집사가 반려동물에게 바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바라는 갖가지 기대와 달리) 건강히 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주는 일뿐이다.
가령 이렇게 말하는 고양이를 상상해보자. “네 친구 순희네 고양이 말이야. 그 애가 먹는 사료, 난 그것이 더 좋아 보이는데? 나는 왜 맨날 싸구려 사료를 먹어야 하지? 게다가 난 여기보다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 점프해서 다닐 곳이 필요하다고. 네 월급으로는 내 취향에 맞는 장난감이나 모래, 간식을 얻을 수 없는 거니? 얘기해봐. 더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하는 게 어때?”
이렇게 말하는 개는 어떤가? “난 더 이상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 산책 시간도 지나치게 짧고, 넌 날마다 늦게 집에 들어오잖아.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지 생각해봤어? 난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고.”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구체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을 반려동물과도 나누게 된다면 분노, 실망, 억울함, 기대, 배신감으로 치를 떠는 순간이 잦아질 것이다. 어쩌면 이런 프로그램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 반쪽이가 달라졌어요!〉. 〈동물농장〉과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동물의 초상권과 동물권에 위배되는 점이 있으므로 폐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동물이 등장할 수도 있다.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는 동물이 당사자성을 얘기하며 뉴스에 나와 항의하고, 동료의 억울한 삶과 죽음을 알리기 위해 여러 곳을 다니며 시위할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동물권에 동조하고, 비건이 되겠지(이건 참 좋은 일이군!). 하나부터 열까지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3.
인간보다 몸집이 크고 지능이 수백 배 높은 외계인이 지구를 지배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다 하게 된 상상
인간은 동물과 같은 위치에 놓일 것이다. 애완인간, 혹은 반려인간이 생길 테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인간이 사육당하거나 식용으로 사용되겠지. 송치로 만든 지갑이 있는 것처럼, ‘어린 인간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외계인이 선호할 수도 있다. 거리 간판에 앞치마를 맨 인간이 쟁반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넣고, ‘인간 곱창’과 ‘인간 삼겹살’을 홍보하는 가게를 볼 수도 있겠다. 수영하며 재주를 부리는 인간, 공놀이를 하는 인간, 글을 읽고 쓰는 인간을 구경할 수 있는 ‘인간원’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것 좀 봐! 인간이 이런 것도 하네?” 구경하는 외계인이 있겠지. 인간을 사고파는 ‘휴먼숍’이 있어서, 어린 외계인의 손을 잡고 어른 외계인이 방문해 인간을 사갈 수도 있다. 그때의 인간은 생각하고 느낄 것이다. 외계인만큼 고도로 발달한 지능으로 생각할 순 없겠지만 딱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그만큼 생각하고 느낄 것이다.
언젠가 이런 상상을 해봤노라고 지인에게 말하니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왜, 이런 상상은 불온한가? 한 번쯤 진지하게 해봐도 좋을 상상이 아닐까?
상상은 생각의 줄넘기다. 생각이 즐겨 하는 유산소 운동. 한 바퀴 두 바퀴, 줄을 넘는 생각이 어느 순간 훌쩍, 다른 곳으로 월경(越境)하는 일이다. 공상이 ‘열기구에 탄 상상’처럼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달아나는 것이라면, 상상은 새처럼 날아오르다 언제든지 지면에 착지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고 있다.
오래전 조지 오웰이 상상한 세계, 《1984》나 《동물농장》을 생각해봐라. 메리 셸리가 상상한 《프랑켄슈타인》 같은 작품은 어떤가? 이미 우리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도래한 상상’ 아닌가? 여기저기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빅 브라더,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타락한 독재자, 인간이 만든 슬픈 괴물(AI)은 우리 주위에 실존한다. 상상과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등을 맞대고 있다. 상상 없이는 무엇도 ‘새로’ 만들 수 없다. 우리는 남이 상상한 것을 발판 삼아, 다른 상상에 도착한다. 상상은 기이한 힘으로 세상을 높이 들어, 흔들어놓는다. 뒤죽박죽 엉킨 이야기가 다소 불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어느 순간 현실과 닮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이야기를 처음 상상한 사람을 생각한다. 벌레로 변신한 인간을 처음 생각한 카프카여!
글쓴이 박연준은 파주에 살며 이 시대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젊은 시인 중 한 명이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밤, 비, 뱀》, 산문집 《소란》 《쓰는 기분》, 장편 소설 《여름과 루비》 등을 썼다
톱클래스 2023년 08월호 박연준 시인 조선일보 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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