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초 같은 비누, 개어 쓰는 세안제… 남다른 브랜드 철학에 매료
대기업 5곳과 경합해 국내 사업권 획득… 지난해 매출 1234억원, 전년 21% 증가
20년간 지킨 가치는 ‘사람·동물·환경’의 공존… 퀴어문화축제 8년째 참여
비혼 직원에 축의금, 반려동물 수당도… 직원 개인의 삶 존중하고 지원
이태원 참사 후엔 매장서 작은 피아노 음악회 열어
지난달 1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인근 화장품 브랜드 러쉬(LUSH) 매장에 피아노 한 대가 놓였다.
10월 30일 이태원 참사 이후 애도 기간을 갖고 2주 만에 문을 연 이 매장은 작은 음악회를 여는 것으로 일상의 복귀를 알렸다. 피아노 선율에 이끌린 시민들이 하나둘 매장에 모여들었고, 일부 시민은 즉석에서 피아노 연주를 펼쳤다.
음악회를 기획한 우미령(49) 러쉬코리아 대표는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매장을 재개장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소처럼 비누 거품을 내며 장사할 수도 없어 매장에 피아노를 가져다 놓고 음악으로 문을 열었다”라며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다행히 주변 상인과 시민들로부터 매장을 다시 열어줘 고맙다는 반응을 얻었다”라고 했다.
우 대표는 2002년부터 영국 친환경 화장품 러쉬를 국내에 들여와 사업을 이끌고 있다. 대학에서 건강관리학을 전공하고 미국보석감정원(GIA)에서 보석 감정과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환경과 인권, 동물 친화적인 러쉬의 브랜드 철학에 반해 스물여덟의 나이에 무작정 영국 본사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1년여의 설득 끝에 국내 쟁쟁한 대기업들을 물리치고 러쉬의 한국 판권을 따냈다.
러쉬 제품의 95%는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비건(Vegan) 화장품이다. 비누, 입욕제 등을 포장하지 않은 채 진열하고, 고객이 원하는 만큼 잘라 판매한다. 전 제품의 60% 이상이 포장재 없이 판매돼 ‘벌거벗은 화장품(Naked Cosmetic)’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20년 전 다섯 명이 시작한 러쉬코리아는 현재 800명의 임직원과 70여 개의 매장을 가진 중견 기업이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도 2021년 회계연도(2021년 7월~2022년 6월) 매출이 1234억원으로 전년 대비 21% 증가했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194억원으로 41% 늘었다.
지난 15일 조선비즈는 서울 강남구 러쉬코리아 본사에서 우 대표를 만나 20년 간의 성장 스토리와 향후 계획 등을 들었다. 그는 직원을 해피 피플(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칭하고, 자신을 해피 피플 대표라고 소개했다.
우 대표는 “회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사람”이라며 “조직원들이 마음 편하게 일에 몰입할 수 있도록 신뢰하고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지원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일정은 당초 10월 31일로 계획됐지만, 이태원 참사로 인해 2주가 연기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러쉬코리아의 설립 20주년을 축하한다. 소감이 어떤가.
“코로나19로 2년 넘게 움추렸던 터라 20주년이 주는 의미가 더 큰 거 같다. 지난 10월 나흘에 걸쳐 쇼케이스를 열고 자축하는 시간을 보냈다. 일 년 내내 20주년을 잘 기념하고, 올해 축하 받은 기억을 동력 삼아 향후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극복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20대의 나이에 러쉬의 국내 판권을 따냈다. 당시 대기업 다섯 곳과 경합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본사를 설득했나?
“보석 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장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우연히 러쉬를 알게 돼 브랜드에 매료됐다. 향초 같기도 하고 디저트 같기도 한 알록달록한 비누, 짜서 쓰는 세안제가 아닌 물에 개어 쓰는 세안제 등을 보며 기존 화장품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영국 본사에 이메일을 보냈고, 5개의 대기업과 경합을 벌인 끝에 국내 사업권을 획득했다.
나중에 본사에서 ‘당신은 직접 제품을 만들고 매장에서 물건을 팔 사람 같았다’라고 하더라. 러쉬 제품이 사용법이 까다롭고 유통이 쉽지 않다 보니, 자본과 경험을 가진 대기업보다 브랜드를 잘 키울 수 있는 베이비시터 같은 사람에 손을 들어준 거 같다.”
-국내에서 매출 1000억원대 브랜드로 성장했다. 트렌드가 빨리 변하는 뷰티 산업에서 20년간 하나의 브랜드를 꾸준히 성장시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지속 성장한 비결은 무엇인가.
“경영 철학이 ‘하드 워킹(Hard Working), 플레이 하드(Play Hard), 비 카인드(Be Kind)’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친절하자는 뜻이다.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다 보니 업무량이 많은 편인데, 고단하게 일만 할 순 없으니 기회가 되면 직원들이 제대로 놀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친절함도 중요하다. 타인의 어려움을 보고 의인처럼 나서는 시민들처럼, 친절한 마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
-고객을 살갑게 대하는 매장 직원들의 응대 방식도 화제를 모았다.
“러쉬엔 유독 에너지 넘치는 직원들이 많다. 일각에선 직원 중 성소수자가 많다는 말도 있는데, 직원을 뽑을 때 특별한 기준을 두는 건 아니다.
처음 직원 채용을 할 땐 대표를 비롯한 임직원들이 정체를 밝히지 않고 면접 현장에 투입돼, 지원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순발력을 발휘하는지, 타인의 말을 어떻게 경청하는지 등을 지켜봤다. 판매에 서툴러도 ‘태도’가 좋은 분들을 위주로 선발하다 보니, 독특한 염색을 하거나 문신을 한 소위 튀는 분들의 입사가 많았다. 이런 점들이 점차 기업문화로 정착되면서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된 것 같다.”
-비혼(非婚)을 선언한 직원에게 축의금을 주고, 반려동물이 있는 비혼자에게 반려동물 수당을 준다. 러쉬가 지향하는 조직문화는 무엇인가?
“직원들에게 주요 업무를 일임하고 신뢰한다. 그리고 최대한 그들을 지원하려고 한다. 회사를 성장시키는 건 결국 직원들이다. 직원 개개인의 다양한 삶을 존중하고, 조직 안에서 마음 놓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삶에 맞춘 문화를 만들다 보니 다른 회사엔 없는 복지 제도들이 나왔다.
결혼하면 축의금을 받고 유급휴가를 가는데, 결혼하지 않는 직원 입장에선 그걸 못 누리는 게 불합리할 수 있다. 그런 점을 반영해 비혼식을 하면 결혼식을 한 직원처럼 똑같이 열흘 간의 휴가를 주고, 강아지를 키우면 자녀 양육비처럼 반려동물 수당을 준다. 해피피플 팀과 함께 직원들이 좋아할 만한 일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있다.”
-한국에서만 시도한 전략이 있나.
“러쉬는 친환경 재료로 만드는 수제(手製) 화장품이다 보니 본사의 제품 관리 규정이 엄격하다. 그러나 제품 외의 유통이나 마케팅 영역에선 한국 시장의 특성을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컨대 글로벌 러쉬는 백화점이나 쇼핑몰, 면세점에 입점하지 않고 대면 판매를 기반으로 하지만, 국내 소비 환경에 맞춰 백화점, 쇼핑몰, 면세점에 입점하고 온라인 쇼핑몰 입점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처음 본사에선 온라인 비즈니스에 반대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이런 전략으로 코로나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기간 해외 매장들은 영업하지 못한 곳이 많았지만, 국내에선 영업을 중단한 적이 없다. 지금은 해외 파트너들이 한국의 비즈니스 방식을 배우려는 분위기다.”
-사업하는 과정에서 고비는 없었나. 있었다면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나.
“매일, 매주, 매달이 어렵다. 문제가 없는 날이 없다. 혼자 고민했다면 어려웠을 테지만, 직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으며 극복할 수 있었다.
얼마 전 글로벌 파트너들을 대상으로 신년 비전을 발표했는데, 향후 10년간의 그래프를 직선이 아닌 원형으로 그려 보였다. 직선이면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있는데, 원은 앞이 안 보인다. 하지만 이 원을 눈덩이처럼 굴리면 더 커지고, 결국엔 눈에 보이는 면적이 넓어진다. 우리가 어떤 위기에 대해 예측하거나 준비할 순 없지만, 함께 눈덩이를 굴리는 마음으로 대처하면 어떤 위기든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러쉬코리아가 변함없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가 있다면.
“사람·동물·환경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사회 공헌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도 우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다. 러쉬코리아는 퀴어문화축제의 경우 8년째 참여하고 있고,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 동물 보호 캠페인, 탈북 인권 캠페인 등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트(예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단지 미술 작품을 향유하기보다, 세상의 틀을 깨는 선한 영향력을 지닌 아티스트들과 협업해 그들이 내는 메시지를 나누고 소통하는 창구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10월 열린 20주년 행사에서는 발달장애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4일간 40여 개 작품이 거래됐다.
가장 중요한 건 진정성과 신뢰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글로벌 리더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러쉬코리아의 성장 비결이 뭔지 묻는 말에 ‘20년 전 당신들이 나와 계약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그들이 자본도 경험도 없는 내게 사업권을 준 이유는 믿음 때문 아니었을까. 나는 지난 20년간 그 믿음에 답하기 위해 러쉬보다 더 러쉬답게 브랜드 가치를 지켜왔다. 향후 20년도 우리를 응원해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잘해 나갈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성공한 회사보다 좋은 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다. 화장품 업계에서는 매출 1등은 못해도, 윤리적(Ethical) 화장품 부문이나 직원 만족도 면에서 업계 ‘톱’을 찍고 싶다.
중장기적으로는 환경 문제를 선도적으로 고민하고 해결하는 일을 하고 싶다. 소비재를 판매하는 회사인 만큼 어쩔 수 없이 탄소 발자국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데, 당당하게 영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선 환경 부분에 대한 단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속가능성은 성장을 위한 핵심 가치이자 경쟁력이다. 단순히 쓰레기를 줄이는 측면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 등을 활용해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김은영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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