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상식

“은퇴 지옥 피하려면, 아내 몰래 딴주머니부터 차라”

해암도 2022. 2. 24. 06:36

 [행복한 노후 탐구]

 

노부부 공생(共生)법

 

 
은퇴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부부 사이에도 완전히 새로운 법칙이 필요하다. 금전적인 갈등은 현역 시절에 준비해 둔 딴주머니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일러스트=이연주 조선디자인랩 기자

 

“부부 사이에 내 돈, 네 돈이 어딨냐고 생각했는데 어리석었어요. 현직에 있을 때 비상금을 준비해 두지 않은 것이 너무 후회됩니다.”

 

현역 시절 배우자에게 경제권을 맡기고 회사에서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오로지 일만 해왔던 중견기업 임원 출신 이모씨. 그런데 요즘 이씨는 남에게는 차마 말하기 힘든 부부 갈등을 겪고 있다.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집사람한테 봉투에 넣을 액수를 허락 받아야 하고, 동창 모임이 있어서 외출할 때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왜 그렇게 선배들이 퇴직 전에 반드시 비상금을 만들어 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앞으로 후배들을 만다면 비상금 만들기를 강조하려고요.”

 

은퇴 후에 경제적인 독립을 하지 못해 속앓이를 하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남편 퇴직은 가계의 수입·지출 구조를 뒤바꾸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신(新) 부부 갈등이다.

 

퇴직한 남성들은 잘 나가던 현역 시절의 씀씀이를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아내에게 하소연하지만, 아내는 그런 남편의 지출을 불필요한 소비라고 생각하면서 다툼이 생긴다.

 

지난해 ‘아내 몰래 비상금 3억 모으기’란 책을 펴낸 문석근 농협대학 교수는 “아무리 현역에서 퇴장했어도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저녁엔 술자리도 가야 하는 그런 남자들만의 영역이 있다”면서 “현역 땐 수당이나 보너스 같은 게 있어서 괜찮은데 퇴직하고 나면 아내에게 예전처럼 (돈을) 달라고 말하기가 불편해진다”고 말했다. 아무리 마음씨 착한 아내라고 해도 수입 없는 남편이 자꾸 용돈을 달라고 하면, 결국 부부 갈등의 씨앗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오오에 히데키(大江英樹) 경제 컬럼니스트는 “현역 시절과 비교하면, 정년 퇴직 후에는 수입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포지션을 잃게 된 남성은 가정 내 위치에서도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가정의 재무 관리를 아내 혼자 맡아서 해왔다면, 아슬아슬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부부 사이의 머니파워는 은퇴 시점에 변곡점을 맞이한다.

 

22일 조선닷컴이 SM C&C 설문조사 플랫폼인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남녀 4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혼 부부들의 51%는 남편이 아내에게 수입을 전부 건네주고, 아내가 남편에게 용돈을 주는 형태를 갖고 있다.

 

즉 우리나라 부부 2쌍 중 1쌍은 아내가 CFO(최고재무관리자)가 되어 집안 살림을 꾸리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관리한다거나 혹은 일부 생활비를 공동 통장에서 쓰고 따로 관리한다는 비중은 각각 24%, 21% 정도로 높지 않았다.

 
 
 
SM C&C 설문조사 플랫폼인 ‘틸리언 프로(Tillion Pro)’가 올 초 남녀 4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배우자가 모르는 나만의 비밀 통장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2.4%가 ‘예’라고 답했다.

 

김동엽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본부장은 “최근 은퇴를 앞둔 남성들 중에선 퇴직금만큼은 본인 명의를 사수하겠다는 경우가 늘고 있다”면서 “그 동안 가족 건사하느라 고생했다며 흔쾌히 응하는 배우자도 있지만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면서 절반은 넘기라고 하는 배우자도 있다”고 말했다.

 

문석근 농협대학 교수는 “퇴직하고 나서 9개월 정도까진 실업 급여가 나오기 때문에 괜찮지만 9개월이 지나고 나면 수입이 끊겨서 말 그대로 퇴직금만 갖고서 노후를 보내야 한다”면서 “매번 아내에게 용돈을 타서 써야 하고, 자유롭게 돈을 쓰지도 못하는 이른바 ‘궁퇴남(궁색한 은퇴남)’이 되지 않으려면 은퇴 전부터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단 비상금 목표를 1억 이상으로 잡고, 열심히 모아보겠다는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현역 시절에 만들어둔 비상금의 가치는 나중에 은퇴하면 굉장히 크게 다가오게 됩니다. 아내 몰래 모은 돈이지만, 나중에 알고 나면 아내들이 오히려 더 기뻐하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손자들 선물 사주면 폼나는 할아버지가 되고, 아내에게 용돈을 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용돈을 주면 은퇴는 지옥이 아니고 천국이 되지요.”

 

딴주머니로 시작했어도 통장 잔고가 넉넉해지면, 은퇴 후 부부 사이는 더 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문 교수는 “직장이나 수입이 없는 냉정한 현실이 생각보다 빨리 닥쳐온다”면서 “충분히 준비한 상태에서 은퇴해야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유리지갑인 월급쟁이가 딴주머니를 차겠다고 결심한들, 큰 금액을 모으긴 어려울 수 있다. 문 교수는 “저금리 시대에는 주식 투자가 그나마 소액을 갖고서도 자금을 크게 불릴 수 있는 방법”이라며 “세상의 흐름에 맞는 좋은 주식을 찾아 장기 투자한다면 은퇴 이후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경은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