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로 휠체어 의존하던 환자 3명 모두 성공,
수술 당일 일어서고, 훈련 후 자전거·수영까지]
수년간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됐던 환자들이 척수에 전극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고 다시 걷는데 성공했다. 휠체어에서 스스로 일어나 보행할 뿐 아니라 수영을 하고 자전거도 타게 됐다. 운동신호를 전달하는 척수가 끊어진 마비 환자가 인공장치를 삽입한 뒤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이번이 세계 최초 사례다.
8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BBC·가디언 등에 따르면 스위스 로잔공대·로잔의대 공동 연구팀은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디슨'에 하반신 마비 환자 3명에게 척수 전극 삽입술인 이른바 '척수 임플란트'를 시행한 뒤 모두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됐다는 내용의 연구 성과를 공개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환자들은 29~41세 남성들이다. 사고로 척수신경이 심하게 손상돼 다리가 마비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5년 이상 다리 감각과 운동 능력을 완전히 잃은 참가자도 있었다.
연구팀은 환자들의 척추뼈 바로 아래 척수에 부드럽고 유연한 전극을 삽입했으며 환자들이 태블릿을 이용해 무선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삽입된 전극은 다리와 상체 근육들을 제어하는 척수신경에 전기 펄스(진폭·파동) 자극을 가하는 역할을 한다.
환자들은 태블릿으로 원하는 운동 형태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일어서기, 걷기, 자전거 타기, 수영 발차기 등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신경자극기는 9년 마다 교체해야 하지만 척수에 삽입한 전극은 평생 간다.
로잔공대 그레고아르 쿠르틴 교수는 "이 장치를 삽입한 지 몇 시간 만에 3명의 환자 모두가 일어섰고, 3~4개월간 연습과 훈련을 통해 기능이 향상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를 함께한 조슬린 블로흐 로잔대병원 교수도 "시작 단계에선 완벽하지 않지만 훈련을 통해 모든 환자들이 부드럽게 걷는 법을 빠르게 습득했다"며 "여성 환자들도 결과가 비슷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척수 손상 근본치료 아닌 보조장치…"삶의질 개선에 목적"
그동안 여러 국가 연구진이 마비 환자에 전극을 이식해 척수 신경을 자극하려는 시도를 해 왔다. 하지만 척수 손상이 덜 해 신경이 살아있는 환자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스위스 연구팀도 수년에 걸쳐 관련 연구에 매진해 왔다. 이번 연구는 척수가 크게 손상돼 1년 이상 허리 아래쪽이 완전히 마비된 환자들에게 전극을 이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쿠르틴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앞선 연구에 비해 훨씬 많은 16개의 전극을 이식해 성과를 냈는데 앞으로는 전극 양을 2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세계 최초로 이번에 척수 전극 수술을 받은 이탈리아 국적의 미첼 로가티는 "수술 당일 내 발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가슴이 벅찼다"며 "척수 삽입술은 나에게 일상을 찾아준 기적 같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로가티는 2017년 오토바이 사고로 척수가 완전히 손상돼 다리 감각과 운동 신경을 완전히 상실하는 등 상태가 가장 좋지 않은 환자였다. 현재 그는 일어서서 원하는 곳으로 걸어가고 계단까지 오르내린다. 올 봄이 끝나기 전에 1㎞를 걷는 것이 목표다.
연구진은 마비 환자에게 온전한 척수 6㎝만 있으면 전극 이식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다만 이 전극 삽입수술은 척수 손상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뇌에서 보내는 운동신호를 증폭해 다리로 보내는 것을 돕는 조치다. 전극을 이식했다고 모든 활동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와 관련 쿠르틴 교수도 "이 수술의 목적은 척수 손상 치료가 아니라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라며 "휠체어에만 의존하던 환자가 몇시 간씩 일어서서 걷는 것 만으로도 심혈관과 장기 기능이 좋아지고 골밀도가 증가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송지유 기자 (clio@mt.co.kr) 기사입력 202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