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간장 명인 기순도와 만난 ‘미쉐린 스타 셰프' 리저우드
기순도 전통식품명인이 360년 넘은 씨간장을 항아리에서 펐다. 색이 먹물처럼 진했다. 맛과 향도 일반 간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고 풍부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셉 리저우드 셰프가 “와우!”라며 감탄을 연발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전남 담양 월봉산 산자락. 대나무와 소나무 우거진 숲속 넓은 마당에 장 항아리 1200여 개가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장관이다. “다음 주 장(醬) 가르기를 앞두고 있다”는 기순도(72) 전통식품명인이 작은 항아리 하나를 조심스레 열었다. 진한 간장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360년 넘은 씨간장입니다.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 귀한 간장이죠.”
“와우! 색이 너무 진해요. 잉크(먹물) 같아요.” 기 명인 옆에 서 있던 호주 출신 요리사 조셉 리저우드(Lidgerwood·33)가 감탄했다. 미국 내파밸리 ‘프렌치 론드리’(미쉐린 가이드 3스타), 영국 런던 ‘레드버리’(2스타), 덴마크 코펜하겐 ‘노마’(2스타) 등 세계 미식의 중심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오던 리저우드 셰프는 한국 식재료에 반해 2018년 서울 역삼동에 레스토랑 ‘에빗(Evett)’을 열었다. 에빗은 2019년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1개를 획득했다.
리저우드 셰프가 “맛 좀 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기 명인이 리저우드의 손등에 씨간장을 살짝 찍어줬다. 손등을 핥은 리저우드 셰프가 또다시 감탄했다. “강렬하고, 그윽하고, 풍부하고, 복합적입니다! 짠맛 속에서 깊은 감칠맛이 뿜어져 나오네요. 간장 맛이 어쩜 이렇죠?” 기 명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티끌 하나라도 들어갈세라 황급히 항아리 뚜껑을 닫았다.
◇트럼프 국빈 만찬에 오른 씨간장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때 청와대에서 열린 국빈 만찬은 ’360년 된 씨간장으로 구운 한우갈비구이'가 화제였다. 외신에서 ‘미국보다 오래된 간장이 메뉴로 제공됐다’고 소개하기도 했던 이 씨간장을 담근 이가 기순도 명인이다.
장흥 고씨 양진제 문중 10대 종부(宗婦)로, 1972년 시집오면서부터 장을 담갔으니 올해로 50년째. 2008년 5년 이상 숙성한 간장인 ‘진장’으로 전통식품명인으로 선정됐다. 그가 담근 장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 ‘봉마르셰’에 2019년 입점하기도 했다.
“만찬을 기획한 ‘콩두’ 레스토랑 한윤주 사장이 전화를 하더니 1946년 담근 간장을 찾아요. 트럼프 대통령이 태어난 해의 간장으로 상을 차리고 싶다면서요.” 간장을 찾는 이유를 듣고 잠시 고민하다 씨간장을 내주기로 했다.
전남 담양 장흥 고씨 양진제 문중에 대대로 전해온 씨간장(아래)과 지난해 담가 숙성 기간이 1년 남짓한 청장. 빛깔과 풍미 차이가 확연하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간장이 한식의 기본이잖아요. 미국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전통 한식을 맛보여 주고 싶었어요. 이 기회에 한식을 세계적으로 빛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워낙 귀한 씨간장이라 많이 주지는 못하고 박카스 병으로 하나를 담아 보냈죠.”
그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건 가지고 있는 씨간장이 워낙 적기 때문이다. 기 명인의 아들 고훈국씨는 “매년 콩 1000가마로 장을 담그지만, 씨간장은 작은 독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360년 넘은 씨간장이라고 하면 ‘간장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보관 가능하느냐’고 의아해하는 분들이 계세요. 오래된 간장에 새 간장을 더하는 ‘첨장’을 통해서 360년 넘게 씨간장이 이어져 왔죠. 매년 만든 간장 중에서 가장 좋은 간장으로 첨장을 합니다.”
◇오래 이어갈 가치가 있는 간장
씨간장이란 말 그대로 ‘씨가 되는 간장’이다. 한국 간장 맛이 변치 않고 이어져 내려온 비결로 씨간장이 꼽히기도 한다. 간장을 장독에서 퍼서 사용하다 보면 양이 줄게 마련. 숨 쉬는 옹기인지라 자연스럽게 수분이 증발해 줄어들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든 간장에 새로 담근 간장을 붓는 것을 ‘첨장’ 또는 ‘겹장’이라고 한다. 오래 묵은 간장과 햇간장을 섞으면 와인을 블렌딩하는 것처럼 맛이 깊어진다.
리저우드 셰프는 “발사믹 식초도 씨간장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발사믹 식초의 고향인 이탈리아 모데나에 가면 50년, 100년, 심지어 300년 된 발사믹 식초가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많아요. 발사믹 식초는 포도즙을 끓여서 오크통에서 숙성시킵니다. 숙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포도즙이 증발하는데, 줄어든 만큼을 매년 새로운 포도즙으로 채워주지요.”
기순도 명인에게 씨간장은 단순히 오래된 간장이라기보다는 최고의 간장을 뜻한다. “종가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를 꼽으라면 제사겠지요. 제사에 쓸 쌀도 따로 재배할 정도로 모든 음식을 별도 관리합니다.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그 해 담근 간장 중에서 가장 맛있는 간장을 따로 작은 항아리에 구분했어요.
별다른 명칭 없이 매년 같은 항아리에 간장을 더해 왔는데, 그게 끊기지 않아 360년이 넘게 된 거죠. 우리는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고 이어왔는데, 이게 요즘 씨간장이라 불리는 듯합니다.”
전남 담양 월봉산 산자락, 대나무와 소나무 우거진 숲속 넓은 마당에 기순도 명인이 담근 장 항아리 1200여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 식재료에 반한 스타 셰프
리저우드 셰프가 기순도 명인을 찾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처음 왔을 때 장맛에 반했어요. 장 구하러 전국을 다녀봤지만 여기가 최고였어요. 두 번째 왔을 때 저의 장을 담갔어요. 바로 이거예요.” 그가 가리킨 항아리에는 ’2021. 5. 10. EVETT-조셉 셰프'라고 적힌 플라스틱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그가 한국 식재료를 주인공으로 요리한 음식에 한국 전통주를 곁들여 내는 식당을 내기로 결심한 건 한국의 식재료와 식문화에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2016년 팝업 레스토랑을 하려고 서울에 왔어요. 식재료가 엄청 다양했어요.
특히 해산물이 환상적이었죠. 수산시장에 가보니 2주마다 제철 생선이 바뀌더라고요. 이런 나라는 세계적으로 찾기 힘들죠. 된장, 간장, 장아찌 등 발효음식도 기가 막혔어요. 이렇게 뛰어난 한국 식문화가 알려지지 않았다니 안타까웠죠. 한국 식재료로 내가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지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리저우드 셰프는 자신이 사용하는 식재료가 생산되는 현장을 모두 가본다. 그는 “상자에 담겨 배달된 재료에는 존중이나 소중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재배하고 만드는지 보고 들어야 재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요.
현지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면서 나만의 요리를 창작할 영감도 얻고요. 지금까지 맛보고 사용한 재료는 모두 기록해서 자료화했습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완벽한 자료를 만들고 싶어요. 한국에 얼마나 위대한 재료와 음식들이 있는지 (세계에) 보여주고 싶어요.”
그의 식당 ‘에빗'을 찾은 한국인 손님들은 “낯설지만 익숙한 모순의 맛”이라고 평가한다. “익숙한 재료를 새롭게 재해석해서 그럴 겁니다. 예를 들어 ‘에그 커스터드’는 달걀찜을 순두부처럼 만들었어요. 제가 달걀찜의 맛도 좋아하지만 순두부의 부드럽고 매끈한 식감도 사랑하거든요. 다슬기는 프랑스 달팽이요리처럼 버터와 마늘에 볶았고요. 한국 손님들이 다슬기를 탕으로만 먹어봤지, 볶아 먹기는 처음이었을걸요.”
◇메주에 담아 내는 파인다이닝
리저우드 셰프가 이번에 기 명인을 찾아 담양에 온 건 메주를 얻어 가기 위해서다. “지난번 장 담그러 왔다가 메주에 핀 누룩곰팡이를 봤어요. 궁금해서 떼어서 맛을 봤더니 풍미가 복잡 미묘하더라고요. 이걸로 새 요리를 만들어 보려고요.
그릇은 메주를 사용할 거예요. 메주 한쪽 면을 뜯어낸 다음 안을 파서 요리를 담을 거예요. 뜯어낸 면을 꽂으면 영락없는 메주 덩어리로 보이겠죠? 손님들이 깜짝 놀랄 모습이 기대돼요(웃음).”
기 명인은 “조셉 셰프가 한국인 요리사보다 간장, 된장에 대해 더 잘 알고 관심도 많다”며 흐뭇해했다. “어디서 저런 아이디어가 나오는지 신기해요.”(기순도 명인) “한식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어서일 거예요.”(리저우드 셰프)
기 명인과 리저우드 셰프는 된장과 간장, 고추장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 나눴다. 다정한 선생과 제자 같기도, 할머니와 손자 같기도 했다. 따사로운 늦봄 햇살이 장독대에 쏟아졌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1.05.29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권력자의 회고록...그의 글은 비열함의 나열이다 (0) | 2021.06.04 |
---|---|
"좀비가 돌아왔다···조국을 치워야 진보 다시 세울 수 있다" (0) | 2021.06.02 |
文 정권 부동산 실정 파헤치는회사원 논객 에이드리안 킴 (0) | 2021.05.29 |
"尹의 메시지 무엇인가, 그에게 시간이 별로 없는 까닭" (0) | 2021.05.26 |
겨울 영하 20도 원주 역발상 “바나나·커피 키워 1.5억 벌었다” (0) | 2021.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