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부터 '징글징글 시집살이'…105세에 면사포 쓴 할머니
미식 책 분야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구르망월드쿡북' 어워드 쌀 부문 1위를 수상한 책 '쌀을 닮다'의 저자들. 왼쪽부터 책을 기획하고 사진을 담당한 강진주 사진가, 한식 레시피를 담당한 조희숙 셰프, 책의 무대가 됐던 평택에서의 진행을 맡은 농부 전대경씨. 우상조 기자
오는 6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제25회 ‘구르망 월드 쿡북 어워드’ 최종 수상작들이 발표됐다. 전 세계 미식 책 분야의 오스카상이라 평가받는 상으로, 한국의 진주 식당에서 출간한 책 『쌀을 닮다』가 쌀(Rice) 분야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1년 동안 전 세계에서 출간된 요리 관련 도서를 심사한 집행부는 이 책을 “쌀에 관한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사진가 강진주, 농부 전대경, 여행 작가 이현주, 한식 세프 조희숙 네 사람이 힘을 모은 결과다.
『쌀을 닮다』는 ‘쌀을 보다, 쌀이 자라다, 쌀과 함께 살다, 쌀과 함께 먹다, 쌀을 요리하다, 쌀을 헤아리다’ 총 6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우리 밥상문화의 주인공인 쌀의 역사와 벼를 키워내는 농부들의 지난한 인생을 짚어보고, 쌀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까지 알차게 담았다.
책 '쌀을 닮다'. 사진 강진주
책을 펴낸 ‘진주 식당’은 강진주 사진작가가 ‘아트를 식사한다’는 콘셉트로 운영하는 브랜드다. 평소 우리 먹거리와 사라져가는 식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강 사진가는 ‘쌀’을 어떻게 책으로 풀어낼까 고민하다 우연한 술자리에서 농부 전대경씨를 만났다고 한다. 전씨는 2009년부터 스타벅스 전 지점에 ‘라이스 칩’이라고 이름붙인 뻥튀기부터 옥수수·감자·고구마를 찐 ‘옥고감’, 사과·배를 말린 과자까지 한국 농산물 메뉴를 제공해온 주인공이다. 그는 “여러 가지 환경변화로 쌀 가격이 널뛰는 걸 보고 농부들을 위한 ‘안전장치’로 쌀 가공식품 아이디어를 내고 시작한 사업”이라고 했다.
글을 맡은 이현주 작가까지 세 사람은 전씨의 고향인 평택 신리를 무대로 삼았다. 평택시 오성면 신1리부터 신4리까지 4개 마을에 사는 250여 가구 농부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오랫동안 먹었던 쌀 요리와 반찬, 그리고 춘궁기에 쌀을 대신해 먹었던 추억의 음식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콘셉트를 잡은 것. 덕분에 『쌀을 닮다』에는 푸근하면서도 맛깔 나는 사연들이 담겼다.
책 '쌀을 닮다' 삽입 사진. 민며느리로 들어와 평생 징글징글한 시집살이와 농사일로 고생했다는 이계순 할머니. 강진주 사진가는 결혼식은 꿈도 못꿔봤다는 할머니를 위해 고운 면사포를 씌워 사진을 찍어드렸다. 사진 강진주
1915년 태어난 이계순 할머니는 밥 굶지 말라고 친정에서 떠밀어 10살에 민며느리로 들어온 후 시어머니께 부지깽이로 맞아가며 보냈던 “징글징글한” 시집살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그렇게 맞아가며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쌀을 팔아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정작 밥상엔 늘 콩죽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책 '쌀을 닮다' 삽입 사진. 어렸을 때 집에서 정미소를 했던 김희수씨는 100년 된 정미소가 없어진다는 말에 알지도 못하는 신리로 내려와 무조건 정미소 사장이 됐다고 한다. 이후 정미소를 얻기 위해 꾸었던 돈을 갚느라 1년에 반은 농부로 지낸다는 그의 오래된 꿈은 색소폰 연주자라고 한다. 사진 강진주
100년 된 정미소의 3대 사장인 김희수씨는 대학졸업 후 신리의 오래된 정미소를 판다는 소식에 연고지도 없는 곳으로 이사와 인생2막을 살게 된 이야기를 풀어냈다. 정미소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정작 자신은 농부가 돼야 했다는 김씨는 “그래도 갓 도정한 쌀로 지은 밥맛이 최고인데, 그 좋은 걸 정미소 지키면서 제대로 즐겼다”며 음식솜씨 좋은 아내가 반찬으로 끓여냈던 민물생선요리를 소개했다.
한강화씨는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 마을에서 잔치라도 열리면 차렸던 잔치음식을 소개했는데 ‘콩나물 무침과 짠지, 식혜, 솥 가득 끓여낸 제물국수’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다.
책 '쌀을 닮다' 삽입 사진. 평택 신리에서 마을 잔치가 열리면 차려졌던 잔칫상. 고기 한 점, 떡 한 덩어리 없이 콩나물무침과 짠지, 식혜, 그리고 솥 가득 쓿여낸 제물국수가 전부였던 소박하기 그지 없는 밥상이다. 사진 강진주
책 '쌀을 닮다' 삽입 사진. 제물국수란 '자기 물에 삶아낸 국수'라는 뜻이다. 끓는 물에 국수를 넣은 다음, 국수 삶은 물을 그대로 국물로 사용하기 때문에 국물은 걸쭉하고 면은 눈 녹듯 부드럽다. 가을에는 아욱이 제물국수의 좋은 짝이 됐다고 한다. 사진 강진주
강진주 사진가는 이들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듣고 각각 드라마틱한 사진들을 찍었다. 민며느리로 들어와 결혼식은 꿈도 못 꿨던 이계순 할머니께는 고운 면사포를 씌워드렸고, 색소폰 연주자를 꿈꾸는 김희수씨에게는 반짝이 무대의상을, 27년째 청년 이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상기씨에게는 이소룡 옷을 입혔다. 강 사진가는 “처음엔 모두 이런 걸 어떻게 하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정작 카메라 앞에선 배우들 뺨치게 멋진 포즈를 취하셨다”며 웃었다. 덕분에 『쌀을 닮다』는 처음엔 어르신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웃고, 그들의 고단했던 옛날이야기에 눈물 흘리고, 추억 속 음식 사진을 보며 군침 흘리게 되는 책이 됐다.
책 '쌀을 닮다' 삽입 사진. 올해 나이 66세지만 여전히 마을 농부 중 가장 젊어서 27년 동안 이장을 맡고 있다는 김상기씨. "해외여행으로 이곳저곳 다녀봤지만 그래도 신리를 벗어나선 살 수 없다"는 게 27년차 이장의 품격이자 진심이다 . 사진 강진주
마지막 ‘쌀을 요리하다’ 섹션에선 한식 셰프 조희숙씨가 만든 쌀 요리 레시피가 펼쳐진다.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인 ‘한식공간’의 오너셰프인 그는 지난 2월 ‘아시아 월드 베스트 여성 셰프’에 선정된 바 있다. 평생 한식을 연구해온 조씨는 “밥이야 말로 우리 식문화의 주인공”이라며 “요즘은 밥보다 반찬 연구에 다들 열심이지만 밥이 맛있어야 반찬이 산다”고 했다. 그는 또 “치킨·햄버거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밥맛을 알려주는 게 우리 어른들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책 '쌀을 닮다' 삽입 사진. 조희숙 셰프가 만든 '된장소스의 양배추 말이밥'. 밥을 양배추에 김밥처럼 말고 된장소스를 얹어 먹는 '한 입 음식'이다. 사진 강진주.
책 '쌀을 닮다' 삽입 사진. 조희숙 셰프가 만든 '깍두기 고기 설기'. 떡, 고기, 깍두기의 새로운 조합이 신기하고 매력적인 요리. 밥과 반찬을 한꺼번에 먹는 것과 같아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사진 강진주
『쌀을 닮다』가 출간된 지 벌써 1년. 이번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을 타긴 했지만 평택 신리에선 이 책 한 권으로 인해 이미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전대경씨와 4개 마을 이장님들이 함께 ‘마을 투어’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 책에 등장했던 오래된 창고와 학교, 집 등을 돌아보며 마을을 걸어보는 내용이다. 낡은 농기구 등을 모아놓은 작은 박물관도 만들고 있다. 투어에 참가하는 이들에게는 ‘옛날 잔칫상’도 판매한다. 코로나19로 투어는 잠시 멈췄지만 마을 사람들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자신들의 터전이 하나의 문화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느라 모두 흥이 넘친다고 한다.
전대경씨는 “마을엔 이제 할머니·할아버지 농부들만 남았다. 더 늦기 전에 이 땅을 일궈온 마을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는데 강진주 사진가 덕분에 그 첫 발을 내딛게 돼 감사하다”며 “책 속 인터뷰 첫 장을 장식한 이계순 할머니가 지난 4월 초에 돌아가셨다. 그때 면사포를 씌우고 사진을 찍어드린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강진주(진주식당) [중앙일보] 입력 20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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