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자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무농약, 유기농에 이어 차세대 농법으로 자연 농법이 각광받고 있다. 6년간의 연구와 임상시험 끝에 자연 농법의 활로를 개척한 김주진 박사를 만나 그 성공 비결을 들어보았다.
- ▲혜림원의 배추밭을 둘러보는 김주진 박사. 밭에 비닐 대신 수확하고 남은 옥수수 지푸라기를 덮었다.
경기도 양평군의 어느 깊은 산골. 김주진 박사가 자연 재배 방식으로 운영하는 농장, 혜림원은 눈썰미 없는 사람이 보기엔 농장이라기보다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뒷산에 가깝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 들여다보면 바위틈 사이사이, 산나무 사이사이, 잡초 사이사이로 과일나무들이 보인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탁 트인 공간에 긴 밭이랑과 비닐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넓게 펼쳐진 농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선선한 가을바람이 산마루를 타고 휘익, 얼굴을 쓸며 지나갔다. 바람에서 신선한 솔잎과 풀 냄새가 났다. 드넓은 밭은 이랑이 없었다면 밭인 줄도 모를 만큼 야생화와 잡초가 무성하다. 엉겅퀴, 물봉선, 개미취, 개망초, 질경이, 쑥, 바랭이, 쇠뜨기… 밭둑을 걷는 내내 발아래로 메뚜기와 방아깨비들이 후두둑 도망친다. 수줍게 핀 부추꽃 위에서는 범나비들이 팔랑팔랑 춤을 춘다. 시간을 100년 전으로 되돌린 듯한 농장 풍경이다.
퇴비 냄새 대신 풀 향기 나는 농장
- ▲좋은 채소나 재료를 만들어도 양념이 안 좋으면 소용없기 때문에 된장과 고추장도 직접 담근다.
혜림원은 일반 농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비료, 농약, 농기계 없이 자연 그대로 작물을 키우는 자연 재배 농장이기 때문이다. 닭과 돼지는 넓은 공간에서 자유로이 뛰어다니고, 축사에서는 신기하게도 동물의 분뇨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밭을 갈지 않고, 비료를 주지 않고, 농약을 뿌리지 않고, 잡초도 뽑지 않으니 얼핏 생각하기에 농사꾼은 하는 일이 거의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자연 농법은 게으른 농법, 무심 농법, 태평 농법이라고도 불립니다. 하지만 씨만 뿌려놓고 손놓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모든 과정에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으니까요.”
- ▲부추꽃 위에 내려앉은 잠자리. 혜림원에는 각종 생물들이 조화롭게 살고 있다.
자연 농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농사법이 아니라 생태계의 순환을 존중하는 농법이다. 김 박사가 잡초를 뽑지 않는 이유는 그 순환고리 안에서 잡초도 제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잡초가 작물의 양분을 뺏을까 걱정하며 제거하기에 바쁘지만 잡초를 뽑으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이 김 박사의 주장이다. 잡초가 나눠 먹는 양분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반면 잡초의 뿌리는 땅속 깊은 곳까지 뻗어 공기를 소통시키고 배수를 돕는다. 그 속에서 미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작물 대신 해충의 서식처가 되기도 하고, 죽으면 유기물이 된다. 김박사는 농장에 나란히 서 있는 나무 두 그루를 보여주며 실례를 들었다. 하나는 붉나무, 하나는 사과나무였다.
“붉나무는 농업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는 나무로 취급받습니다. 하지만 이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벌레들이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보이죠? 이것은 주황날개꽃매미라 하여 과수 농가에서는 아주 골칫거리인 해충입니다. 그런데 이 붉나무 덕에 바로 옆에 있는 사과나무에는 꽃매미가 한마리도 없지요.”
- ▲부엽토가 습도와 온도를 조절해 비닐이 없어도 땅속이 촉촉하다.
김 박사는 농장의 모든 나무나 작물에 비료를 주지 않는다. 비료에는 식물과 해충이 모두 좋아하는 양분인 질소가 가득하므로 이를 먹기 위해 해충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 그 규모가 어찌나 방대한지 제초제나 농약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라고. 혜림원에도 초기에는 해충이 많았고, 숱한 나무와 작물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일일이 사람 손으로 벌레를 잡으며 버텼다. 그러자 해를 거듭할수록 벌레 개체 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농작물도 면역력이 강해져 스스로 해충을 이겨냈다. 농약으로 해충을 잡으려 하면 진딧물과 개미가 범벅이 되어 나무 전체에 번지게 되고 이는 해마다 고스란히 반복된다. 하지만 자연 재배로 키운 혜림원의 사과나무는 올해부터는 새로 자라난 순에만 벌레가 조금 꼬일 뿐 이파리도, 열매도 건강한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썩지 않는 사과가 열리기까지
-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오미자 열매.
일본 아오모리 현에는 ‘기적의 사과’라 불리는 독특한 사과가 있다. 기무라 아키노리라는 농부가 생산하는 이 사과는 2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갈변되지도 않는다. 스위스에는 300년째 자생하는 우트빌러 스페트라우버 종의 사과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에서 열리는 사과 역시 썩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그 사과에서 뽑은 줄기세포 성분이 함유된 화장품까지 출시되어 할리우드 스타들이 앞다투어 구입한다고 한다.
모든 것은 바로 그 사과나무에서 시작되었다. 김주진 박사는 원래 공대를 졸업하고 20년간 섬유 무역업에 종사하던 사업가였다. 그는 은퇴 시기가 가까워오자 여생 동안 보람된 일을 하기 위해 두 번째 천직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에서 《기적의 사과》라는 책의 광고를 보고, 뇌리에 섬광이 스쳤다. 한국에서도 썩지 않는 사과를 만들 수 있다면 사회에 기여도 하고 스스로도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그길로 김 박사는 사업을 직원에게 물려주고 제대로 농사를 짓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농과정으로 시작했던 것이 나중에는 석·박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공부를 하게 됐다. 한편으로는 양평에 임야를 구입해 농사지을 땅을 구하고 연구와 임상시험을 병행했다. 처음부터 20만4960㎡(약 6만2000평) 부지의 농장을 구입하는 등 판을 크게 벌였다.
- ▲스스로 과실을 맺은 사과나무. 알이 굵고 달다.
그러나 정작 시작하고 몇 년 동안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한다. 토지와 농작물이 자연 치유력을 회복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일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가을부터 성과가 나타났다. 병들어가던 사과나무가 병충해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 재배한 사과나무가 결실을 맺자 김 박사는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일반 농법 사과와 비교 실험을 했다. 상처 면역력을 보기 위해 인위적으로 구멍을 뚫었는데, 일반농 사과는 상처가 번졌지만 혜림원의 사과는 상처 부위가 더 이상 퍼지지 않았다.
- ▲김주진 박사가 직접 실험한 사과의 상처 치유력. 일반농은 괴사된 부분이 과실 전체로 퍼진 반면 자연농 사과는 멍든 부분이 번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위스에 20그루밖에 없다는 우트빌러 스페트라우버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썩지 않는 사과가 열리는 나무가 우리 농장에는 2000그루나 있으니까요. 이는 사과에만 한정된 게 아닙니다. 혜림원에는 복숭아, 블루베리, 매실, 오미자, 산양삼 등 다양한 농작물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자연 치유력을 갖도록 재배됩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비료를 주거나 농약을 치는 등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보살피며 과보호를 하면 식물은 스스로 치유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똑같지요. 익충과 해충이 공존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생태계가 스스로 밸런스를 맞추도록 해야 합니다.”
김주진 박사는 동물 복지뿐 아니라 식물 복지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농작물이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료며, 약이며 이것저것 더하는 것은 식물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일 뿐이다.
- ▲농장에서 방목하는 흑돼지와 닭. 사료 대신 전통 방식으로 사람이 먹고 남은 것이나 농장에서 기르다 웃자란 채소들을 사료로 준다. 해마다 여름이면 높은 기온으로 가축들의 집단 폐사 뉴스가 보도되지만 혜림원의 닭과 돼지는 모두 건강했다.
- ▲농장에서 방목하는 흑돼지와 닭. 사료 대신 전통 방식으로 사람이 먹고 남은 것이나 농장에서 기르다 웃자란 채소들을 사료로 준다. 해마다 여름이면 높은 기온으로 가축들의 집단 폐사 뉴스가 보도되지만 혜림원의 닭과 돼지는 모두 건강했다.
“인간이 유익한 것을 더하면 자연은 균형을 잡기 위해 해로운 것을 더합니다. 벌레가 더 많아지는 것이 바로 대표적인 현상이지요.”
김주진 박사는 자신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으니 다음 세대가 좀 더 쉽게 자연 재배를 할 수 있도록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실험을 계속할 것임을 다짐했다. 자연 농법이라고 해서 수확량이 적거나 작물의 크기가 작거나 오래 걸린다면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농법을 개발하는 것이 그의 소명이라 믿는다. 3년 후에는 교육관을 마련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를 위한 교육을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향후 바이오 산업의 규모가 더욱 커질 것으로 확신하고 이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일반농으로도 제대로 키우기 힘들다는 열매채소의 최고봉, 파프리카를 농약 한 방울 없이 실하게 키워냈다.
- ▲비료를 주지 않아도 엄청나게 자란 트레비소치커리.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지만 병상에서 아픈 채로 오래 산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이제는 수명보다 삶의 질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먹거리에서 비롯됩니다. 자연 농법은 가장 쉬우면서도 경제적이고, 제대로 된 농사법입니다. 알맞은 장소에 적절한 작물을 심는 적재·적소·적작의 원리만 잘 지키면 수확량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주면 일정 시간 이후부터는 자연이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현재 그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자연 농법의 효능을 전파하기 위해 자연 재배 농작물을 재료로 하는 음식점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일수토 삼계탕과 샤브샤브 레스토랑이다. ‘100세 시대 건강한 먹거리’를 향한 김주진 박사의 꿈과 노력이 기적의 결실을 맺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