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궁통1
고려의 국교는
불교였습니다.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이 세워졌습니다.
조선의 국교는
유교였습니다.
지난 왕조의 불교는
배척 대상이었습니다.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는 조선이 건국되자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사진은 인도의 석굴. 경주 석굴암과 무척 닮았다. 신라 불교가 인도와 교류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백성호 기자
조선의 승려는
천민 신분이었습니다.
한양 도성의
사대문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양반인 유생들이
사찰을 찾을 때면
산 아래에서부터
가마를 메고
그들을 태워야
했습니다.
사찰에서
술판이 벌어지면
술 시중도 들어야
했습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를
지탱했던
국가 이념인 불교는
조선에 들어
겨우 맥만 이어가는
처지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는
더했습니다.
왜색 불교의 침범으로
결혼을 하는 대처승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그런 위기의 시대에
나타난 인물이
경허 선사입니다.
꺼져가던
한국 불교의 선맥을
다시 되지핀
인물입니다.
#궁궁통2
경허에게는
세 제자가
있었습니다.
경허 선사의 진영(왼쪽)과 최근에 발굴된 경허 선사의 사진. 중앙포토
수월(水月)과 혜월(慧月),
그리고 만공(滿空)입니다.
이들을
‘경허의 세 달’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월(水月)은
강에 비친 달입니다.
진리를 상징하는
하늘의 달이
땅으로 내려와
강물 위에 뜹니다.
‘월인천강지곡’의 월인(月印)도
천 개의 강에 비친
달을 뜻합니다.
하늘의 달이,
땅으로 내려와
‘꽝!’ 하고 도장을
찍는 겁니다.
강물 위에
도장을 찍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에
도장을 찍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월인’입니다.
‘수월(水月)’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수월은
멀리 북간도에서,
혜월은
남녘땅에서,
만공은
수덕사를 중심으로
법을 펼쳤습니다.
그중에서도
경허의 맏상좌였던
수월은
달 중에서도
꽉 찬 달로
절집에서는 통합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수월 선사의 자취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수월의
오도송도 없고,
수월의
열반송도 없습니다.
그가 했던 설법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궁궁통3
수월 선사는
일제 강점기 때
깨달음을 이루고
북간도로 건너와
8년 넘게 살다가
입적했습니다.
중국 연길을 찾아가
수월 선사의 자취를
좇았던 적이 있습니다.
경허 선사의 맏상좌였던 수월 선사의 진영이다. 중국 연길에는 수월 선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백성호 기자
당시 연길에는
수월 선사에 대한 일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월은
땅에 떨어진 벼 이삭과
김장하다 버린 배춧잎을
주워서 말린 뒤
겨우내 먹이가 없는
산속 동물들이 찾아오면
던져주었다고 합니다.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렸습니다.
수월 선사가
머물렀다는
도문시 일광산의
화엄사 터를 찾아갔습니다.
수월 선사는
그곳에
작은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초막 바로 뒤는
천길 낭떠러지였습니다.
낭떠러지 아래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 땅을 떠나
북간로로 오는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험한 고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수월은
바로 그 고개의 정상에
손수 만든
주먹밥과 짚신을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누가 두었다는
흔적도 없이 말입니다.
#궁궁통4
굳이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수월의 행보와
동포에 대한
수월의 자비가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수월 선사가 남긴
법문은
딱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부상을 입은
독립군 연설단원이
수월 선사의 초막에
머물 때,
수월 선사가 들려준
법담입니다.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 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겨.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겨.”
이 법문을 기억한
독립단원은
훗날 몽골에서 출가해
스님이 되었습니다.
북간도 용정촌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수월 역시 이 일대에 자취가 남아 있다. 중앙포토
경허 선사는
수월에게
천수경을 주었다고 합니다.
수월은
자나 깨나 천수경을
외었다고 합니다.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것이라
했으니,
수월은
천수경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모았겠지요.
그렇게
모으고,
모으고,
또 모으다가
몰록
몸과 마음의
정체를 뚫었겠지요.
수월이 남긴
법문에서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대목은
‘끝까지’입니다.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겨.”
수월 선사는
몸소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뚫렸겠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거듭
당부합니다.
끝까지 공부하라고,
한 가지만 들고서
끝까지 공부하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에서
수월이 내미는
나침반을 봅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다가
작심하고 출가한
수월 선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큰 사랑을 봅니다.
저 아래 두만강을 건너온 동포를 위해 수월 선사는 고개 위에 손수 만든 짚신과 주먹밥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중앙포토
당시
비적들에 맞서기 위해
북간도의 집집마다
키우던 도사견들도
수월 선사 앞에서는
엎드렸다고 합니다.
수월 선사는
1928년
중국 흑룡강성에서
입적했습니다.
수월은
한국 불교사에 남는
큰 달이었습니다.
에디터백성호 조선일보 발행 일시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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