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살생은 셰프의 숙명… 식재료 대한 존경 잊지 말아야"
해암도
2025. 10. 29. 09:38
12년째 한국 사찰 음식 공부하는
美 미슐랭 셰프 에릭 리퍼트 방한

“생선이나 고기를 식재료로 쓰는 것도 엄연한 살생(殺生)입니다.”
27일 인천 영종도의 한 호텔에서 만난 유명 셰프 에릭 리퍼트(60)는 왼쪽 손목에 찬 갈색 묵주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프랑스 출신 요리 거장인 그는 불교 신자다. 미국 뉴욕에서 미쉐린(미슐랭) 3스타 식당인 ‘르 베르나르댕’을 운영하고 있다. 지중해풍 해산물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프렌치 레스토랑인데, 김치와 사찰 음식에서 영감을 받은 메뉴를 개발해 뉴요커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틈만 나면 한국 사찰을 찾아 사찰 요리를 맛본 뒤 미국으로 돌아가 새 메뉴를 개발한다. 에릭은 이날 세계 최고 레스토랑을 선정하는 프랑스 미식(美食) 가이드 ‘라 리스트’(La Liste)와 한국·유럽 싱크탱크 키(KEY) 등이 주최한 글로벌 미식 포럼 ‘넥스트 가스트로노미 2025 코리아’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가 한국의 사찰 음식에 빠진 건 12년 전이다. 2013년 서울 은평구 진관사를 찾아 사찰 음식의 정수를 맛봤다. 승려들이 발우(옻칠한 나무 그릇)라는 ‘공양’ 그릇에 먹는 식사를 말하는 불교의 전통 식사 의례인 ‘발우공양(鉢盂供養)’을 경험하면서 ‘내 레시피에도 적용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리퍼트는 “하얀 밥을 긁어 먹으면서 보약을 먹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을 살려 내 요리를 먹는 사람에게도 지혜와 행복을 가져다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작년 5월에도 사찰 음식을 다시 맛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전남 장성 백양사를 찾아 사찰 음식 ‘명장’인 정관 스님과 만났다. 정관 스님 공양간을 찾아 사찰 음식 만찬을 먹은 뒤 템플스테이도 했다.

그는 재료의 본질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조리도 최소화한다. 그런 점에서 사찰 음식과 닮았다. 에릭은 “현대인들은 음식이 겉으로 얼마나 아름다운지만 신경 쓰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나 사찰 음식을 보라. 인내와 겸손,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듬뿍 담겼다”고 했다. 이어 “식재료를 손수 키우고 음식을 먹을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 음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이런 정성과 배려를 담아 손님에게 내놓는 게 목표”라고 했다.
에릭은 요리를 하기 전 항상 ‘윤회(輪廻)’를 떠올린다고 한다. 짧게 명상과 기도도 한다. 해산물 셰프인 그는 요리 재료를 고를 때도 멸종 위기종은 제외하고 있다. 에릭은 “다음 생으로 향하기 전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모두의 의무”라며 “자식 세대에게 온갖 잡동사니만 남기고 가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했다. 그는 뉴욕 최대 식량 지원 단체인 ‘시티 하베스트(City Harvest)’의 부회장으로도 있다. 시티 하베스트는 연간 8600톤의 음식을 취약 계층에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