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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윤석열 시대’-슬리퍼 신고 나타난 김건희…폴란드 호텔, 충격의 훈시

해암도 2025. 9. 16. 07:29

 

         1회 프롤로그  

장관님, 대통령님께서 부르십니다.  

소파에 몸을 내던지며 넥타이를 잡아 풀던 A가 동작을 멈췄다. 짧디짧은 동구(東歐)의 여름밤, 부지런한 새벽 해와 시차의 방해를 피해 몇 시간이라도 숙면을 취하려던 계획은 수포가 됐다.

‘공군 1호기’가 폴란드 쇼팽 국제공항에 도착한 건 몇 시간 전, 보다 구체적으로는 2023년 7월 12일 오후 6시(현지시간)였다. A는 그가 모시던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그로부터 이틀 전인 7월 10일 리투아니아에 도착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참석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상태였다.


2023년 7월 10일 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리투아니아 빌뉴스 국제공항에 도착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사진 대통령실 홈페이지



대통령은 대규모 순방단을 이끌고 있었다. A를 포함한 국무위원과 대통령실 참모들은 물론이고 89개 기업과 단체로 구성된 경제 사절단까지 동행했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부쩍 관심을 보이던 한국의 방위산업과 원전 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예정에 없던 대통령의 호출은 A를 불안하게 했다.

‘대규모 순방인데도 성과가 적다고 질책하시려는 건가?’

A는 내려놓은 긴장감을 다시 장착하고 풀어헤친 넥타이를 다시 올려맨 뒤 대통령의 이동 집무실 겸 숙소인 그 호텔의 최고급 객실로 향했다. 검문검색 후 그 공간에 들어선 A는 일단 안도했다. 불려온 건 그만이 아니었다. 장관, 참모들이 이미 빼곡하게 자리해 있었다.

대통령은 테이블 한가운데에서 그들을 맞았다. 다행히도 표정이 밝았다. 자리가 어느 정도 찼다고 판단한 대통령이 목을 풀기 시작했다. ‘지방 방송’이 일제히 소거되면서 그 공간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바로 그때 그 진공의 침묵을 깨고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옷감이나 가죽이 딱딱한 물체를 스칠 때 나는 듯한 그 마찰음은 규칙적이었다. 소리는 점점 커졌고, 점점 가까워졌다. 그건 슬리퍼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걸 꿰찬 채 모습을 드러낸 건 김건희 여사였다. (이하 경칭 생략). 그 직후 모두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지난 8월 12일 영잘실질심사를 마치고 서울중앙지법을 나서는 김건희 여사. 구속수감되기 몇 시간 전, 그가 고개를 들다가 우연히 국민과 눈높이를 맞췄다. 우연한 순간 포착이었을까, 아니면 잠시 방심한 걸까. 기자에게는 내내 반성하는 모습을 연출했던 그가 한순간 채 사그라지지 않은 최고 권력자의 면모를 끄집어내 만인을 쏘아본 것처럼 보였다. 연합뉴스



들어가며

윤석열 정권 1060일 동안 용산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특검팀 수사와 재판이 끝날 몇 년 뒤에나 궁금증을 풀 수 있을까요? 법적 판단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소장과 판결문에 담기지 않을 내용들은 그냥 묻히는 걸까요?
이런 의문에 천착한 더중앙플러스는 지난 정권 당시 용산·여의도 및 그 주변에서 활약 또는 암약했던 핵심 공선(公線)·비선(秘線) 인사 수십 명을 직접 만나 생생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대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채집물 보따리 속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씨줄과 날줄로 꿴 뒤 몇 개의 계절 동안 굽이굽이 펴보겠습니다. ‘윤석열 vs 한동훈’ ‘윤석열의 1060일’에 이은 세 번째 윤석열 전 대통령 시리즈인 동시에 ‘박근혜 회고록’ ‘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 ‘전두환 비사’ 등에 이은 최신 대통령 시리즈인 이번 연재물에 오랜 동행 부탁드립니다.

“이 사람은요!”… 경악할 ‘여사’의 한마디 
대통령은 준비했던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영부인이 선수를 쳤기 때문이다. ‘여사’가 입을 열고 말을 시작한 순간 A를 포함해 그 자리에 모인 대한민국의 최고위 공직자들은 일제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사의 입에서 나온 건 덕담이 아니었다. 훈시였다.

윤석열 정권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의, 흡사 대통령 훈시를 방불케 할 정도의 발언이 이어졌다. 말이 길어지고 화자(話者)가 말에 취해 흥분하기 시작하면서 표현은 거침없어졌다. 그리고 위험 수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요, 나 때문에 대통령 된 거예요! 이 사람은 저 아니었으면 힘들었어요! 

모두가 뜨악했지만 아무도 그걸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누가 감히? 대통령조차 아무 말 없이 부인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마당에 말이다.

그렇게 여사의 연설은 10분 이상 이어진 뒤에야 겨우 멎었다. 대통령이 바통을 넘겨받았지만, 참석자들의 뇌리는 이미 그들이 목격한 충격적 장면과 발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김건희 주재 국무회의’가 끝난 뒤 국무위원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자신들의 방으로 이동했다. 그 짧은 이동의 순간, 모든 무리의 대화는 동일한 질문에서 시작했다.

 저래도 되는 거예요? 

물론 저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연히, 버젓이 벌어진 일이었다.

‘윤석열 정권’ 몰락의 수많은 원인 중 특히 도드라진 하나를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다. 그 정권의 외양은 ‘윤석열 정권’이었지만, 실질은 ‘윤석열·김건희 공동 정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건희의 의식 속에서나, 현실화한 양태에서나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남편이 대통령이 될 무렵, 이미 주변에 그걸 공언했다.

승리의 그날, ‘비선’이 ‘커밍아웃’했다
 

선생님, 우리 5대5하기로 했어요. 인사권, 공천권!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을 제기한 명태균씨가 2024년 11월 8일 창원지검에서 조사받고 나오면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나를 구속할 경우) 한 달이면 윤 대통령이 하야하고 탄핵일 텐데 감당이 되겠나”라고 큰소리쳤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단행해 스스로 몰락하기까지는 명씨의 장담으로부터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연합뉴스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는 지난 8월 MBC와의 인터뷰에서 김건희가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게 허언이 아니었다는 정황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는 그걸 저지할 의사와 능력이 없었다.

‘영부인’은 대통령 배우자에게 국민이 부여하는 ‘당연직’이자 ‘명예직’의 호칭일 뿐이다. 국정에 관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당연하게도 없다. 그런데도 직전 영부인은 인사 등 국정에 관여했다는, 짙은 의혹을 받고 있다. 이른바 ‘김건희 특별검사팀’은 아예 공소장에 김건희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배우자로서 대통령의 직무에 해당하는 각종 국정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람’이라고 적시했다.

모든 비극과 사달, 동티의 근원이었다.

떳떳하지 못한 국정 개입에는 자연스레 어둠의 비선(秘線)이 동행한다. 은밀한 행위를 공식 라인을 통해 백주에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위법 행위에의 관여 여부를 떠나 윤석열 정권의 비선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한 영역에 포진해 있었다.


윤석열 정권 비선의 상징적 존재였던 건진법사 전성배씨가 지난 8월 21일 김건희 특검팀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뉴스1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무속인과 역술인, 절친한 친구의 아들, 정체불명의 무용가, 이웃사촌인 학자 등 최순실 등의 기존 유명 비선과도 양과 질 모두에서 차원을 달리했다. 그 비선은 대선 기간 서울 양재동 서희타워, 신사동 예화랑, 서초동 정명빌딩 등 음지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다가 ‘주군’의 당선이 확정된 순간 일제히 양지로 올라왔다. 의원 보좌진 출신으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일했던 B는 취재팀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건희 특검팀이 8월 11일 압수수색한 서울 서초동 서희건설 본사. 지난 대선 기간 윤석열 캠프의 비선 사무실 중 한 곳인 이른바 양재동팀의 근거지로 사용된 곳이다. 뉴스1



 경선, 본선 캠프는 물론이고 기존에 여의도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인수위를 활보하고 있었어요. 인수위 행정실의 경우 절반 이상은 모르는 사람들로 채워졌죠. 김건희 여사 등을 통한 ‘비선 라인’이 존재를 드러낸 것 아닌가 짐작했었죠.  

그들은 그렇게 인수위를 통해 ‘커밍아웃’한 뒤 용산에 진입하거나 그 주변부에서 암약하면서 정권 내내 윤석열·김건희 부부의 수족이 됐다.

비선이 아닌 이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드렁칡처럼 비선 세력과 얽혀 부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거나, 비선과 맞서다 적으로 규정돼 잘려나가거나. 하긴 ‘눈·귀·입을 가린 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척하면서 연명한다’는 제3의 선택지도 있긴 했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실력자 중 그 비선과 이해관계 및 행동을 함께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 결과 대통령실과 여당, 내각에는 공식 직함과 무관하게 그들 부부의 사적 이익과 명예를 위해 복무한 이들이 넘쳐났다. 반면에 정권과 나라에 대한 충심에 기반한 결기를 참지 못하고 충언했던 이들은 적으로 규정돼 순차적으로 잘려나갔다.

그렇게 잠재적 견제 세력이 뽑혀나간 용산과 여의도에는 부부에게 충성하거나 부부의 행위를 방조하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리하여 꼬리가 몸통을 흔들기 시작했다. 비선이 공선(公線)을 압도한 것이다.

세 불리해진 공식 라인, 특히 정치적 주변머리가 부족한 ‘늘공’(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한 직업 공무원)이나 학자 출신 참모들은 감히 비선을 건드리지 못했다. 레드팀 구성이나 제2부속실 설치, 특별감찰관 임명 등 견제책 도입을 모의한 적도 있었지만 커트당하기 일쑤였다. 어찌어찌 공론화에 성공하더라도 비선의 ‘끝판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즉 대통령을 넘을 수는 없었다.

‘여사 라인’의 ’끝판왕’은 대통령이었다.  
“가스라이팅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심리학적 연구 대상이 될법한 ‘대통령의 여사 사랑’은 모든 비이성적 행위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윤석열은 김건희에 대한 비판을 단 한 줌도 참아내지 못했고, 영부인을 ‘올바르게’ 보좌하려는 최소한의 제도 도입 시도에도 ‘격노’로 답했다.


2024년 10월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파인그라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를 면담하고 있다. 한 대표는 당시 대통령과의 독대를 요청했지만 대통령은 비서실장 배석과 권위적인 자리 배치 등을 통해 철저히 자신이 윗사람임을 주지시켰다. 한 대표 등의 김건희 여사 견제책 마련 등 요구를 거부한 대통령은 불과 한 달여 뒤 비상계엄을 단행했다. 사진 대통령실



여사를 견제하고 비판하던 이들은 모두가 대통령의 적이었다. 그건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을 포함한 정치권 전체, 몇 안 되던 직언 참모, 기성 언론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최후의 회생 수단이던 총선까지 걷어찬 뒤 극우 유튜버가 키운 과대망상 속에서 입 안의 혀처럼 굴던 일부 총신(寵臣)의 감언이설에 빠져 허우적댔다. 그러고는 비상계엄이라는 대형 사고를 치면서 스스로 대형 부조리극의 종지부를 찍었다.


2024년 12월 4일 새벽 계엄군이 국회 본청에 진입해 야당 당직자들과 대치하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이 무모한 요령 부득의 비상계엄으로 몰락을 자초했다. 연합뉴스



특별검사팀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윤석열 정권의 백태와 비상계엄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여사의 국정 개입’과 ‘여사 보호를 위한 비상계엄의 단행’ 역시 추정과 의심의 영역에서 법적 판단의 영역으로 옮아가고 있다. 수사가 마무리되고 재판이 종결되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제기된 많은 의혹이 ‘실체적 진실’의 형태로 판결문에 담겨 후세에 전해질 거다.


지난 1월 15일 밤 서울구치소로 이동하고 있는 윤석열 당시 대통령. 파란만장한 체포 작전 끝에 겨우 공수처에 체포돼 첫 조사를 받고 난 이후의 모습이다. 연합뉴스



‘실록 윤석열 시대’를 시작하며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한 걸까. 범법, 위법의 영역에 해당하지 않거나 입증이 부족해 공소장과 판결문에 담기지 못할 그 수많은 의혹과 의문들은 그냥 묻어두고 지나가도 되는 걸까.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게 기자라는 업(業)의 본질이다. 더중앙플러스가 지난 정권의 핵심부와 그 주변부에서 일했던 수십 명의 인사를 만나 그동안 용산에서 은밀하게 공연됐던 무대 위의 비극과 막후의 희극을 광범위하게 채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그 채집물 보따리를 조금씩 풀어볼 생각이다.

그 시작과 서두의 몇 회분은 김건희에게 할애된다. 물론 모든 책임을 ‘여사’에게 지우는 건 부당한 일이다. 정권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은 결국 대통령 본인의 아집·맹목·독선·주탐(酒貪)·미숙·불통·막말·분노조절장애·표리부동·과대망상이다. 앞으로 ‘실록 윤석열 시대’가 풀어나갈 이야기의 대부분도 윤석열과 관련된 내용이다.

그런데도 김건희로 이 시리즈를 시작하는 건 앞서 언급한 대로 영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전직 대통령의 그 모든 요령부득의 언행을 해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록 윤석열 시대’는 다음 회에서 윤석열이 김건희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막을 올릴 예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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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현일훈     김기정     중앙일보    발행 일시2025.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