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상식

“당신의 건강, 변기가 먼저 안다”

해암도 2025. 5. 23. 08:06

박승민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
“변이 떨어지는 시간으로 설사·변비 진단
정밀 의료를 넘어 ‘정밀 건강’으로 발전"

 
 
 
 
박승민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가 2023년 스탠퍼드대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앞에서 변기에 앉아 있는 모습. 그는 대소변 상태를 파악해 질병을 진단하는 스마트 변기를 개발한 공로로 그해 이그 노벨상을 받았다. 이그 노벨상의 마스코트가 생각하는 사람인 점을 패러디해 이런 모습을 연출했다./미 스탠퍼드대
 

“잠에서 깨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이 화장실이잖아요. 매일 반복해 간다는 건 그곳에서 일관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스마트 변기로 수집한 데이터에서 건강을 읽어내는 거죠.”

 

지난 13일 줌(zoom) 화상 인터뷰에서 박승민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는 이같이 말했다. 박 교수는 이미 변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023년 미국 하버드대가 발간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연구 연보’에서 스마트 변기 연구로 공중보건 부문 이그 노벨상을 받았다.

 

이그 노벨상은 과학계 최고 권위의 상인 노벨상을 패러디한 상이다. 그렇다고 장난스럽게 수상자를 선정하지는 않는다. 변기를 연구하는 것이 웃음을 줬지만, 동시에 일상에서 질병을 조기 진단할 수단이라는 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했다. 박 교수의 생각은 현실이 되고 있다.

 

박 교수 연구진은 2020년 개발한 스마트 변기로 실제 사용자의 건강 정보를 확인했다고 지난 11일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Advanced science)’에 발표했다. 스마트 변기는 내장 센서로 사용자의 배변 정보를 자동으로 수집하고, 이를 실시간으로 클라우드(가상 서버)에 저장·분석하는 시스템이다.

 

스마트 변기의 아이디어는 영화에서 비롯됐다. 2005년 개봉한 영화 ‘아일랜드’에서 주인공은 아침에 소변 분석 결과로 건강 상태를 확인한다. 소변에 나트륨 농도가 높다는 이유로 짭짤한 베이컨이 식단에서 제외되는 장면도 나온다. 박 교수는 “영화 속 상상을 현실에 구현해 보고 싶었다”며 “번거로운 혈액 검사 대신 매일 자연스럽게 배출되는 대소변을 건강 정보로 바꾸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이 이번에 활용한 스마트 변기./어드밴스드 사이언스

박 교수는 11명이 12일간 스마트 변기를 사용한 데이터로 다양한 바이오마커(생체지표)를 얻었다. 변기에 앉고 첫 배출까지 걸린 시간부터 배변 횟수와 간격, 대변의 굵기·질감·색상, 최종 배출 시점과 화장지 사용으로 마무리한 시간까지 포함됐다. 연구진은 최종 배출 시점부터 화장지 사용까지 시간은 잔변감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봤다.

 

박 교수는 “기존에는 환자가 2~3주간 배변 일지를 직접 작성하거나, 의사가 문진을 통해 정보를 파악해야 했지만, 이번 연구에선 자동화된 방식으로 정확한 실시간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가장 눈에 띄는 지표는 변이 떨어지는 시간이었다. 변의 낙하 속도는 점성과 직결된다. 변비일수록 느리고 설사일수록 빠르다는 가설이 실제 데이터에서 입증됐다. 박 교수는 “변의 속도를 시간 단위로 측정함으로써, 장 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 변비, 과민성 대장증후군, 만성 설사 등 질환의 조기 진단과 예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 참가자는 첫 주에는 정상 수치를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며 배변 시간이 늦어지고 변이 굵어지는 변비 증상이 나타났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변기가 수집한 데이터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박 교수는 “사용자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기에 개입해 식단을 조정하거나 약물 처방으로 상태를 관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같이 사는 두 사람이 유사한 설사 패턴을 보인 경우도 있었다. 박 교수는 “같이 살면서 식습관이 비슷해지기 때문일 수 있다”며 “설사 패턴이 반복해서 나타난다면 장내 환경이나 특정 음식에 대한 반응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줌을 통해 만난 박승민 난양공대 교수./줌 화면 캡처
 

연구진은 다음 달 시제품을 공개하고, 한국 병원 두 곳에 설치해 환자 데이터를 수집할 계획이다. 내년 상반기 상용화를 목표로 잡았다. 의료기기 허가를 받으려면 절차가 까다로운 만큼, 초기에는 건강 관리 제품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박 교수는 “비데 보급률이 높은 한국은 스마트 변기의 테스트베드로 최적인 환경”이라며 국내 시장을 우선 공략할 뜻을 밝혔다. 한국과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미국, 유럽 시장 진출도 계획 중이다.

 

스마트 변기 연구는 병의 징후를 의사보다 먼저 포착하고, 사용자가 의식하지 못해도 건강 상태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박 교수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정밀 의료’를 넘어선 ‘정밀 건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질병으로 넘어가기 전의 건강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유전자와 생활 습관 같은 다양한 데이터와 통합해 조기 예측과 예방 중심의 건강 관리를 실현하는 것”이라며 “그 시작점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바로 그곳, 변기일 수 있다”고 했다.

참고 자료

Advanced Science(2025), DOI: https://doi.org/10.1002/advs.202503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