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수박 농사 짓다 우주 공학…'만학도 전설' 공근식 박사
해암도
2024. 11. 9. 08:23
농부처럼 공부하라, 결과는 정직하리니
러시아도 놀라게 한 열정
'만학도 전설' 공근식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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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발행된 농업 잡지 ‘농진종묘’에는 직접 수확한 수박 한 통을 든 채 활짝 웃는 농부 공근식(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씨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수박! 이제 상품성으로 선택하십시오”라는 다소 투박한 광고 문구와 함께. 스물두 살 때였다. “아, 이때 저희 밭에서 수박 품평회를 했어요. 비닐하우스도 아니고 노지(露地) 농사였는데 무늬도 선명하고 크기도 컸거든요. 고등학교 중간에 그만 두고 5년 지났을 때네요.”
이로부터 24년 뒤, 러시아 최고 명문 모스크바 물리기술원(MIPT) 학술 잡지 ‘자유로운 비행’에 이 사진이 다시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한국에서 수박 농사 짓던 남성이 러시아에서 우주 항공을 배우고 있다”는 소개 기사였다. 마흔여섯 살 때였다. 변변한 경력은커녕 외국어도 서툴렀던 시골 농부는 이후 학부 과 수석, 석사 전체 수석을 차지했고, 2022년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참고로 밝히자면 ‘러시아의 MIT’로 불리는, 노벨상 수상자만 10명을 배출한 학교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격언,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만학도의 전설’ 공근식(54) 박사가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일부 지역 매체에 소개된 그의 인생 역정이 수능 시즌을 앞두고 소셜미디어에 급속히 확산됐다. TV 예능에도 출연했다. ‘하면 된다’ 정신의 표본. “이런 사람이 있으니 변명도 못 하겠다”는 뭇 수험생의 뜨거운 감탄. 근황이 궁금해 지난달 아침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야 답신이 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핸드폰을 지금 봤다”고 했다.
◇열일곱, 공부가 너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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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구 분야는 극(極)초음속이다. 마하1은 음속, 그러니까 시속 1224㎞다. 마하5 직전까지 초음속, 마하5부터 극초음속이다. 시속 6120㎞ 이상. 그는 마하20 너머를 시뮬레이션한다. 주로 미사일 같은 우주 발사체 설계와 관련된 초고속 세계. 그러나, 곧 서술하겠지만, 그의 시작은 무척 늦었다.
–요새 뭐 하세요?
“MIPT 박사후연구원 확정이 났는데, 작년에 귀국했어요. 전쟁 때문에요. 연구실 자금이 끊겼거든요. 외교 관계도 불안해졌고요. 지금은 혼자 논문 쓰고 있어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발표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화제의 인물이 됐습니다.
“병원 간호사들이 알아보시고, 아까 지하철에서도 유튜버라는 사람이 말을 걸더라고요. 제가 걸어온 경로가 독특하긴 하죠….”
–학업을 일찍 접으셨는데요.
“철이 없었죠. 수학은 좋아했어요. 골똘히 풀면 되니까요. 나머지는 관심 밖이었어요. 외우는 게 너무 싫었어요. 성적은 형편없고, 대학 가기는 글렀고…. 고2 때 그냥 ‘집안이 어렵다’ 둘러대고는 그만뒀어요.”
–뭘 하셨나요.
“부모님 일손을 도왔습니다. 수박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는요, 아무리 잘돼도 돈을 못 벌 때가 있어요. 오르내림이 심해요. 그만둘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뇌경색을 앓으셨어요.”
가방 대신 비료 포대를 멨다. 삼형제 중 장남, 뒷바라지한 두 동생이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하는 동안 그의 학력은 줄곧 ‘옥천고 중퇴’였다. 불편한 건 없었다. 야망도 없었다. 다만 갈증이 생겼다. “가끔 수박 팔러 대전 시내에 나가면 서점에 들러 책을 뒤적이곤 했다”고 말했다.
–무슨 책이었나요.
“수학책이나 과학책 같은 거요. 저희 수박 밭 앞에 금강이 흘렀어요. 쉴 때마다 강을 바라봤어요. 저 물살은 얼마나 빠를까, 여울은 왜 생기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범상치는 않았네요.
“증세가 점점 심해졌어요. 농사 10년쯤 하니 흥미도 줄고…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대전 공판장에 수박을 출하하는데, 제가 차가 없었어요. 배달 업체 용달차 타고 같이 갔다가, 집에는 혼자 기차로 왔죠. 그러다 대전역 입구 게시판에서 눈이 딱 멈췄어요.”
◇夜學에서 카이스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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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이었다. ‘성은야학’ 개강 안내문. “그날 집에 안 들어갔어요. 홀린 듯이 야학까지 걸어갔습니다. 역에서 가까웠어요.” 스물여덟 살, 야학에서는 막내였다. “많을 때는 학생이 열댓 명 됐는데요, 주로 어르신이었죠.” 당시 대전 카이스트(KAIST) 박사과정 학생들이 자원봉사 교사로 있었다. 이수석·박현철·신건철…. “내 인생을 바꿔준 평생의 은인”이라고 했다.
–수업이 재밌었나요?
“1년 6개월 과정이었는데요, 저는 5년 다녔어요. 너무 좋아서요. 주로 검정고시 준비 돕는 강의였죠. 평일 저녁 6시에 시작하니까 낮에 기차 타고 가서 수업 듣고, 야학에서 쪽잠 자고, 새벽 첫차 타고 집에 왔어요. 매일.”
모터에 발동이 걸리니 멈출 수 없었다. “집중하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좀 더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수학과 과학. 주말에도 야학에 갔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반물리·고전역학 등을 카이스트 박사들에게 배웠다. 최고 두뇌들에게 공짜 일대일 과외를 받은 셈이다. 다만 이쯤에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이해가 잘 되던가요?
“선생님들이 설명을 쉽게 잘 해주셨어요.”
–천재, 그런 거 아닙니까?
“어휴 절대로 아닙니다.” 그는 무척 겸손하고 진중했지만 가끔 말을 버벅거렸고 “대화 도중 상대방 질문을 곧잘 까먹기도 한다”고 말했다. “IQ 검사 같은 건 받아본 적도 없어요.”
세 선생님이 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도 검정고시를 치렀다. 내친김에 수능도 봤다. 집에서 가까운 배재대 전산전자물리학과에 붙었다. 수박 농사를 병행해야 했다. 배재대 박종대 교수는 당시 서른네 살의 공근식을 이렇게 기억했다. “질문이 많았어요. 수업 끝나면 꼭 찾아왔어요. 순수물리학 쪽에 관심이 깊더라고요. 물리학은 근본을 따지다 보니 답이 없는 것도 있거든요.”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박 교수가 카이스트 측에 연락했다. “공부에 의지가 강한 학생이 있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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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부터 그는 카이스트 물리학과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청강생 자격이었다. 새벽에 밭으로, 낮에는 학교로 갔다. “좀처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수업 범위가 훨씬 넓고 빨랐거든요.” 보충 수업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옆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부탁에 능했다. 배움에 거침이 없었다. 이틀 뒤 카이스트 옆 충남대로 무작정 향했다. 물리학과 교수실로 갔다. 마침 박병윤 교수가 있었다. 당연히 일면식도 없는 사이. “처음 뵙겠습니다. 이 대학 학생은 아니지만 강의를 청강하고 싶습니다.” 박 교수가 대답했다. “아, 그럼 그러세요.” 몇 번의 퇴짜, 몇 번의 허락. “제가 인복(人福)이 있나봐요.” 2년 동안 매일 카이스트와 충남대를 오가며 공부했다.
–힘들지는 않았나요?
“그저 시간이 아쉬웠죠.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시간을 너무 뺏겨서 작물을 바꿨어요. 수박 대신 알타리무. 아무래도 손이 덜 가거든요.”
이 무렵 MIPT 소속 연구원 두 명이 한국에 왔다. “배재대에서 진행하던 연구 프로젝트 초청자였어요.” 그는 또 달라붙었다. “혹시 가르침을 더 받을 수 있을까요?” 일주일에 한 번, 4시간씩 빈 강의실에서 물리학 수업을 받았다. “제 영어가 서툴긴 해도 칠판에 쓴 수식(數式)을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었어요.” 그가 당시 배운, 지금도 인상 깊게 기억하는 물리학 개념은 포텐셜 에너지(Potential Energy)다. 위치와 관련된 에너지, 그러나 경로와는 무관한 잠재력. 그는 이 단어를 좋아했다. 2010년, 태풍이 몰아쳤다.
–큰 태풍이었나요?
“비닐하우스가 전부 물에 잠겼어요. 철골은 다 우그러지고…. 그때 결심했죠.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
◇처절한 실패… 공항에서 혼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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