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찰 음식에 빠진 프랑스 요리 장인 “채식 발효는 세계적 화두”
해암도
2023. 5. 28. 07:11
‘르 코르동 블루’ 파리 본교 에릭 브리파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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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긴 버섯은 처음 봐요. 프랑스 세페 버섯과 비슷한 풍미가 나네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색색의 연등이 달린 서울 은평구 진관사. 세계 3대 요리 명문학교 ‘르 코르동 블루’의 에릭 브리파 셰프(학과장)는 대웅전 건너편 채마밭에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과 표고버섯을 따고 있었다. 그의 바구니가 어느새 표고 향으로 가득 찼다. 조리실이 마련된 보문원으로 가던 그의 발길이 맷돌 앞에서 잠시 멈췄다.
“이걸로 두부를 만든다고요?”
동그래진 그의 눈을 본 계호 스님은 불려놓은 콩을 맷돌에 넣고 돌렸다. 뽀얀 콩물이 스며 나오자 브리파 셰프는 손가락을 뻗어 맛을 봤다. “35년 넘게 두부를 먹었는데, 손으로 만드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에요. 정말 자연을 따르는 음식이군요.”
그는 프랑스 셰프로 가질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누린 사람이다. 1895년 설립돼 줄리아 차일드 등 전설적인 요리사를 배출한 르 코르동 블루의 학과장이자, 프랑스 최고 장인에게 주는 ‘메이유르 우브리에 드 프랑스(MOF)’ 수상자, 세계적인 식당 안내서 ‘미쉐린 가이드’ 스타를 모두 갖고 있다.
브리파 셰프가 최근 6박 7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유는 단 하나, ‘사찰 음식’을 배우기 위해서다. 전남 백양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고, 서울 진관사에서 요리 시연을 한 그를 르 코르동 블루 한국 캠퍼스에서 만났다.
◇사찰 음식에 빠진 프랑스 셰프
-어떻게 사찰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됐나?
“2016년 조계종과 협약을 맺고 파리와 런던 캠퍼스에 ‘채식주의 수업’ 교과 과정으로 사찰 음식을 가르치게 되면서부터다. 조계종 스님들이 해마다 두 번 파리와 런던을 방문해 시연 수업을 한다.”
-학생들 반응은 어떤가.
“인기가 많다. 선재 스님이 ‘한국 사찰의 발효 음식’을 주제로 요리 시연을 할 때는 교실이 꽉 찼다. 현재 유럽 셰프들의 화두는 ‘발효’다. 사찰 음식은 역사와 전통을 가진 발효 방법을 갖고 있다. 파리 캠퍼스에서는 발효 음식을 연구하고자 김치, 된장, 간장도 만들고 있다.”
-왜 발효가 화두인가.
“지금 세계 음식 문화에는 자연주의로 회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동물성 단백질 양은 줄이고 식물성, 즉 채식을 늘리는 것이 추세다. 적색육 섭취를 줄이는 건 건강뿐 아니라 목축업으로 인한 물 부족 현상 등 환경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세대의 관심이 더 커지는 것 같다.”
-채식 트렌드는 언제부터 시작됐나.
“15년 전, 내가 플라자 아테네 호텔에서 총주방장으로 일할 당시 미국 뉴욕 출장을 갔을 때도 이미 채식이 트렌드였다. 마이클 잭슨, 내털리 포트먼 등 셀럽들이 채식을 즐겼다. 지금은 더 보편화됐다. 미술사에도 사조가 있듯, 요리사(史)에서는 지금 채식이 그렇다. 특히, 미쉐린 2·3스타 셰프들을 중심으로 파인다이닝에서도 유행이다.”
-당신도 채식을 즐기나?
“물론이다. 과거에 나는 스테이크를 좋아해 일주일에 5~6회 육식을 즐겼다. 그러나 이젠 의식적으로 2주에 1회만 먹고 있다. 적색육을 많이 섭취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소화기관에 무리가 간다. 고기를 먹을 때도 동물복지로 도축된 것을 찾는다. 그런 고기가 영양분도 더 많다. 현대인의 암 발생 중 40%가 식생활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사찰 음식의 장점은?
“사찰 음식에는 불교의 철학이 담겨 있다. 현재 트렌드와 맞닿는다. 선재 스님을 통해 5·7·10·30년씩 발효한 간장을 맛봤다. 시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장맛이 인상 깊었다. 장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넷플릭스 ‘셰프의 테이블’에 출연한 정관 스님처럼 인플루언서가 나오는 것도 좋은 현상이다. 12년 전 나는 알랭 뒤카스, 피에르 가니에르, 알랭 파사르 등 세계적인 셰프 14명과 ‘콜레주 퀼리네르 드 프랑스’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자연 존중, 농상공인 보호, 제철 식재료 전파다. 이는 사찰 음식과도 상통한다. 건강에도 너무 좋다. 한국에 머물며 사찰 음식을 먹는 동안 내 몸에 있던 불순물이 2㎏은 빠진 것 같다.”
-방한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템플스테이가 재미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 공양을 드리고,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었다. 한국의 불교는 놀랍고 따뜻했다. 이 작은 나라에 2000곳이 넘는 사찰이 있고 이 중 150곳 이상이 템플스테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1700년 전 시작된 불교가 현재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스님들과 불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절에서 만난 모든 이가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나를 진심으로 맞아줬다. ‘걱정 근심은 진관사에 두고 가라’는 스님들 말씀에 감동했다. 머물다 가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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