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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 그런 거 없더라” 한마디에 ‘대장동 죄수들’의 딜레마가 시작됐다
해암도
2022. 10. 30. 07:18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와
대장동 서스펙트의 진범
다섯 명의 용의자가 한 경찰서에 모였다. 기관단총 같은 중화기를 실은 트럭이 탈취당했고, 뉴욕 경찰은 범인을 잡겠다는 일념에 불타는 중이다. 호크니(케빈 폴락), 맥매너스(스티븐 볼드윈), 펜스터(베니치오 델 토로), 키튼(가브리엘 번), 그리고 ‘버벌’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킨트(케빈 스페이시). 다섯 명의 용의자를 불러놓고 머그샷을 찍은 후 한 사람씩 신문을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변호사를 불러 줘요. 댁들 모가지를 날려 버리겠어. 댁들은 혼자선 꼼짝도 못 해.”

경찰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모아놓고 이간질을 하려 해도 다들 초면인지라 통하지 않는다. 펜스터와 맥매너스 정도가 서로 아는 사이인데, 그들은 또 워낙 절친해서 난공불락이다. “네 단짝 펜스터가 뭐라고 불었게?” “누구라고?” “맥매너스가 한 이야기랑 달라.” “이질 걸린 창녀랑 잔 얘기?” 결국 다섯 명의 용의자는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오게 된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도입부에 담겨 있는 이야기다.
‘○○○○가 범인이다!’라는 충격적인 반전이 워낙 유명한 나머지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지만, 이 도입부는 ‘죄수의 딜레마’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키튼의 설명을 들어보자. “몇 번이나 용의자로 서 봤지? 보통 진짜 한 명에 아르바이트 비용 받는 부랑자 넷을 세우지. 전과자를 한번에 5명이나 세우는 법은 없어.” 누가 진범인지 확신이 없는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답을 찾으려고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닳고 닳은 범죄자. 죄수의 딜레마를 피하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일제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경찰은 결국 이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해보자. 두 명의 용의자가 경찰에 붙잡혀 있는 상황이다. 경찰은 두 용의자가 공범이라 보고 있다. 상대방을 밀고할 경우 석방해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범죄자들은 갈등에 빠진다. 둘 다 입을 꾹 닫으면 증거가 부족해 징역 2년형으로 끝나는 반면, 만약 상대가 나보다 먼저 범죄를 자백하면 나 혼자 10년형이다. 반면 둘 다 자백해버리면 범죄 사실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둘 다 각각 6년형을 살아야 한다.
여러분 같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는가? 개인적으로 보자면 나 혼자 자백하고 상대는 침묵해야 이익이다. 하지만 두 사람을 하나의 단위로 놓고 본다면 그 선택은 좋지 않다. 징역 1년을 -1점으로 계산할 경우 두 사람의 점수가 -10점이 되기 때문이다. 대신 둘 다 입을 다물면 -2점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고, 이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범죄자들은 상대가 자신보다 먼저 자백할까 두려워 둘 다 자백해버리고 만다. 두 사람 모두가 -6점, 합해서 -12점의 손해를 보는 최악의 결과를 거두고 마는 것이다.
헝가리 출신의 천재 존 폰 노이만이 게임 이론의 수학적 기초를 확립한 후 죄수의 딜레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왔다. 그래도 기본적인 형식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두 행위자가 협력하면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이를 배신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놓고 보자면 최선의 선택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신함으로써 결국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 소탐대실이며 자승자박이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모든 죄수들이 합리적 판단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죄수의 딜레마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바탕 위에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 두 조건을 동시에 갖추는 일은 쉽지 않다. 범죄자들은 모래알처럼 자기 잇속만 챙기려 든다. 죄수의 딜레마에 스스로 걸려들어 다 불어버린다. 반면 세상에는 법, 도덕, 윤리 같은 것이 있고 평범한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신뢰 위에서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대장동 사건의 수사가 본격화되고 있는 2022년 10월,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생생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대장동 민간 개발업자인 남욱 변호사가 일당 중 한 명에게 했다는 말. “우리가 타깃이 아니니 사실대로 얘기하자.” 그는 지난 대선을 앞두고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에게 뇌물 8억원을 건넸다는 진술을 했고,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김 부원장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스스로도 인정하는 자타공인 측근이며 심복이다. 과연 그가 그 돈을 본인만을 위해 사용했을까?
부동산 개발과 관련된 커다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서로 앞다투어 자백하고 있다. 지난 20일 구속기한 만료로 석방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이 한 말을 되짚어 보자. 함께 골프 여행을 다닐 정도로 이재명 대표와 가까웠던 그는, “측근 아니다”, “부정한 일 하는 줄 알았으면 내쳤을 것”이라는 이 대표의 말을 옥중에서 전해 들어야 했다. 그는 석방된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의리? 그런데 이 세계는 그런 게 없더라.” 대장동을 둘러싼 죄수의 딜레마는 이 대표가 유 전 본부장을 요즘 말로 ‘손절’해버릴 때 이미 시작된 셈이다.
<유주얼 서스펙트>로 돌아가 보자. 영악한 다섯 명의 용의자는 일제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죄수의 딜레마를 능숙하게 피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뢰를 바탕으로 ‘큰 건’을 하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아뿔싸,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카이저 소제라는 거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카이저 소제는 그들 모두를 농락한 후 자신의 이익만 챙겨 달아날 뿐이다.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버젓이 수사망을 빠져나간 그 자, 카이저 소제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