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교사는 어쩌다가 ‘빨갱이’가 되었나
학습지도안 검열 폐지, 자율학습비 지출 내역 공개 관행 개선 등에 앞장섰던 강성호 교사는 교장의 눈엣가시가 되어 공안몰이의 희생양이 되었다. 경찰은 제자에게 거짓 진술까지 강요했다.
‘6·25 북침설’을 가르쳤다는 혐의로 실형을 살았던 강성호씨가 9월2일 재심 무죄판결을 받았다. ©시사IN 조남진
“무죄판결이 기쁘지만은 않다. 사건 조작에 동원된 제자들은 그 죄책감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너무 괴로워 자살을 시도한 제자마저 있었다. 내가 ‘6·25 북침설’을 가르쳤다고 조작해 지난 32년간 사제지간을 짓밟고 진실을 감추기 급급했던 공안기관과 사법기관, 당시 교육감·장학사·교장 등은 반드시 제자들에게 사죄해야 한다.”
9월2일 오후, 충북 청주시 상당고등학교 강성호 교사(59)는 청주지방법원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전교조 결성 초기 노태우 정권의 안기부가 주도하고 검경 등 수사기관과 교육 당국이 총동원돼 짜맞춘 ‘6·25 북침설 교육 사건’의 주인공이다. 당시 그는 이 사건으로 교단에서 쫓겨나고 구속돼 8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엔 대법원마저 이 사건을 유죄로 인정했다. 강 교사는 이후 30여 년 동안 ‘빨갱이 교사’라는 주홍글씨를 단 채 살아야 했다.
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19년 재심을 신청했다. 재심을 맡은 청주지법은 9월2일, 강 교사의 ‘북침설 교육’ 혐의가 근거 없다고 판시하고 이를 빌미로 그를 처벌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고 진실이 승리하기까지, 28세의 꿈 많았던 청년 교사는 어느새 머리 희끗한 초로의 나이로 접어들었다.
강 교사에 대한 용공 조작 사건은 국가권력이 사제지간의 도까지 짓밟으며 무자비하게 한 개인을 파멸시킨 잔혹한 국가폭력의 상징이다. 그의 재심 승소는 오랜 세월 고통 속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워온 한 자연인의 승리에 머물지 않는다. 이 사건 이후 역대 정권의 정보기관과 보수언론, 그리고 일부 정치세력은 걸핏하면 강성호 교사 사건을 ‘전교조 용공화’의 상징처럼 이용했다. 따라서 32년 만에 법정에서 드러난 이 사건의 진실은 전교조로서도 오랜 기간 덧씌워진 용공 단체라는 누명을 공식적으로 벗어던지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강성호 교사 ‘6·25 북침설 교육 사건’은 1989년 5월 전교조 결성을 앞두고 안기부가 주도한 치밀한 공안 조작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안기부와 검찰, 교육부는 전교조에 대한 비난 여론 조성을 위해 용공 조작을 통해 희생양 삼을 교사들을 물색했다.
전국적으로 3명을 타깃으로 삼았다. 5월22일 서울 인덕공고 조태훈 교사(당시 33세), 이틀 뒤인 5월24일에는 충북 제원고 강성호 교사(28세), 그리고 전교조 결성식을 하루 앞둔 5월26일엔 경북 영주 동산여중 이수찬 교사(33세)를 각각 좌경 용공 교사로 지목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 교사가 수업 시간에 가르친 ‘북한 바로알기’ 교육은 대개 국가보안법 위반죄(고무찬양)로 둔갑했다.
안기부와 검찰은 이 과정에서 세 교사의 구속 시기를 치밀하게 조율했다. 언론 공작을 통해 각 사건마다 대대적으로 보도해 거부감을 극대화하려는 대국민 심리전을 전개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사IN〉(제721호 ‘촌지 안 받고 열심히 가르치면 전교조 교사라고?’ 기사 참조)은, ‘전교조 결성을 전후해서 교사들의 국보법 위반 사건을 조작해 대국민 홍보심리전을 전개하면서 언론 공작으로 이를 극대화한다’는 내용의 안기부 내부 ‘존안 문건’을 발굴·보도한 바 있다.
강성호 교사는 노태우 정권 공안기관의 이런 거창한 기획 과정을 거쳐 전국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구속됐다. 보수 진영에서 전교조에 대해 덮어놓고 ‘6·25 북침설을 가르치는 단체’라는 거짓 프레임을 씌운 계기도 바로 이 사건이었다.
강성호 교사는 대체 무엇을 가르쳤기에 대표적인 좌경 용공 교사로 지목된 것일까. 1989년 초 강씨는 충북 제천시 제원고등학교에 갓 부임한 28세의 초임 교사였다.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가 낯선 충북 산골 벽지학교를 선택한 데는 교육자로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거창고등학교 재학 시절 배운 직업 선택 십계명에 ‘내가 필요한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는 구절이 있다. 왕관이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단두대, 근데 정말 내가 그렇게 됐다.”
8월11일 청주지방법원 정문에서 강성호씨가 아내 서유나씨와 함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무엇을 가르쳤기에 ‘6·25 북침설’이 되었나
낯선 제천 땅에 부임해 일본어를 가르치던 강성호 교사는 신참답게 매사에 열성적이었다. 때마침 노태우 정부에서도 남북 화해를 기치로 내걸고 겉으로는 민족 동질성 회복을 강조하는 때였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 발맞춰 그는 틈틈이 북한 바로알기 수업도 했다. 주로 일본인 기자가 발간한 사진첩 속 평양 시가지와 금강산, 백두산의 모습을 보여줬다. 강 교사는 수업만이 아니라 민주적 학교 운영에 관해서도 열정적이었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학습지도안 검열 폐지라든지 자율학습비 지출 내역 공개 따위의 잘못된 관행 개선에 앞장섰다. 이런 강 교사를 교장과 교감은 대놓고 못마땅해했다.
때마침 그해 봄 전국적으로 전교조 가입 교사가 늘어나자 안기부와 검찰, 문교부와 교육청 등에서는 연일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열고 공안몰이를 통해 교원노조를 분쇄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용공 조작이었다. 문교부는 4월 들어 전국의 각급학교에 공문을 잇따라 내려보내 일선 교사의 의식화 수업 내용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고 필요하면 고소 고발 등 징계 조치를 적극적으로 단행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충북 제원고 교장은 각 학급 반장에게 눈엣가시인 강성호 교사 수업에 대한 보고를 지시했다.
그해 5월24일 강 교사는 3학년 2반 수업 도중 호출을 받고 교장실로 갔다. 기다리고 있던 제천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이 다짜고짜 분필가루가 채 가시지 않은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강 교사를 대공분실로 연행한 경찰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6·25 북침설을 가르치고 북한을 미화 찬양한 혐의’를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맞서며 자술서 작성을 거부했다. 그러자 경찰은 몇몇 학생들을 불러 대질시켰다. “자정이 지나 학생 3명이 조사실로 들어왔다. 그 학생들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잦은 결석과 사고 등으로 학교 당국에 약점이 잡힌 아이들이었다.” 학생들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경찰이 시키는 대로 ‘북침설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양손에 수갑을 찬 채 세 명의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강 교사는 가슴이 허물어졌다.
민족의 동질성을 심어주고자 북한 바로알기 수업을 한 것이 어마어마한 간첩 사건으로 비화하다니. 더구나 교육자라는 학교장과 장학사 등 교육 관료가 정확한 사실 규명이나 교육적 해결 노력도 없이 약점이 있는 제자들을 이용해서 교사에게 거짓 혐의를 들씌운 것이다. 경찰은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수업 중이던 그를 불러내 인신을 감금한 뒤 포승줄과 수갑을 채워 제자와 대면시키는 등 교육 현장에서 가장 소중한 덕목인 인륜까지 저버린 행태를 보였다.
당시 제원고등학교 학생 600여 명은 “강성호 선생님은 6·25가 북침이라고 가르친 일이 없다”라는 탄원서를 써서 법원에 제출했다. 강 교사 석방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까지 벌이는 등 경찰과 학교 측에 적극 반발했다. 하지만 법원은 진실을 말하는 제자 600여 명의 탄원서를 배척하고 학교 당국에 약점이 잡혀 거짓증언을 한 6명의 진술만을 채택했다.
더욱이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증인으로 세운 학생 중 2명은 북침설 수업을 들었다는 4월11일과 북한 미화 수업을 들었다는 4월25일에 결석한 사실이 밝혀져 검찰 기소 내용은 조작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당시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각본에 따라 전교조 용공몰이 희생양으로 ‘점지된’ 강 교사는 어떻게 해도 누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강 교사 구속 후 문교부는 이 사건을 ‘참교육의 실상’이라는 자료집으로 만들어 전국 초·중·고교와 학부모에게 배포하는 등 전교조 용공 매도에 적극 활용했다. 이렇듯 권력과 언론을 총동원한 전교조의 와해 공작 앞에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강 교사는 전 국민에게 ‘빨갱이 교사’로 낙인찍혔다.
강 교사가 구속되자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났다. 노점상을 하며 뒷바라지한 장남이 조작된 빨갱이 교사가 되어 교직에서 쫓겨나고 구속되자 아버지는 쓰러졌다. 대학 3학년이던 동생은 충격을 못 이기고 세상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깊이 새긴 강성호 교사는 제자의 입으로 스승을 간첩이라고 손가락질시키는 비교육적이고 반인륜적인 국가폭력에 언젠가 정면으로 맞서리라 다짐했다. 8개월의 옥살이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10년 동안 교단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전교조는 1998년 9월1일자로 합법화됐다. 당시 남아 있던 전교조 소속 교사 26명의 복직 대상자에 강성호씨 역시 포함됐지만 막판에 누락되고 말았다. “공안기관에서 전교조 위원장에게 ‘딱 한 사람만 내년에 복직하는 걸로 협상하자’고 제안했단다. 그 한 사람이 나였다. 나는 10년 기다렸는데 6개월 더 못 기다리겠느냐고 물러섰다.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복직하고 나만 1년 뒤인 1999년 3월1일에 복직하는 것으로 약속받았다. 그러나 약속 시일이 다가와도 아무 소식이 없더라. 그때 다시 한 달 동안 교육청 앞에서 항의 단식농성을 했다. 결국 1999년 9월1일에야 겨우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꿈에 그리던 교단에 신규 채용 형식으로 다시 선 뒤부터 강성호 교사는 부끄럽지 않은 스승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빨갱이 교사’라는 억울한 누명을 완전히 벗겨내지 못했지만 그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교육활동은 교단에서도 단연 주목 대상이었다.
2011년 한·일 청소년교류사업 유공자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고, 2017년엔 충북도교육청에서 한·일 교류와 평화 연대교육 등 ‘충북형 미래학력’ 구현에 앞장선 공로로 평교사 최초로 단재교육상 사도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앞서 2006년 7월에는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강 교사의 행위를 “북한 바로알기운동의 일환으로 북한 실상을 수업 시간에 보여준 것은 북한을 찬양 고무한 것이 아니다”라는 평가와 함께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 공안기관이 조작한 ‘북침설을 가르친 교사’라는 낙인은 법원 판결을 바로잡지 않는 이상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천형과도 같은 굴레였다.
1989년 7월 법정에 들어서는 강성호 교사. 손바닥에 ‘진실·승리’ 글자가 적혀 있다. ©강성호씨 제공
가해자들은 반성 없이 잘 살고 있다
그는 전교조 결성 30년째인 2019년 5월25일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재심을 신청했다. “교사로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결국 거짓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진실이 승리한다는 것을 제 삶을 통해 제자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었다.” 법원은 강 교사가 신청한 재심을 받아들였다. 당시 충북 제천경찰서 대공과 소속 경찰관들이 강 교사를 강제 연행해 31시간 동안 구금한 것에 대해 직권남용 및 불법체포 감금죄 위반으로 봤다. 이는 형사소송법이 정한 재심 사유에 해당된다.
강 교사는 까다로운 재심을 법원이 수용한 것에 대해 ‘개인이 싸워서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남과 북의 분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념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했나. 그분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 그 희생, 나아가 촛불 덕분에 재심이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면서 힘든 재심 과정을 감사하게 통과했다.”
9월2일 드디어 재심 무죄판결이 나오면서 강 교사는 지난 32년 동안 억울하게 뒤집어쓴 빨갱이 교사라는 누명을 벗었다. 그는 오랜 세월 거짓으로 스승을 고발한 제자들과 상처를 보듬고 화해하는 만남을 늘 꿈에 그렸다. “북침설을 가르쳤다고 거짓증언을 했던 일부 제자들이 재심 법정에서 학교 당국과 경찰의 강요와 유도로 그런 진술을 했다고 고백했다. 평생 몹쓸 죄를 짓게 만든 그들(교장·담임·경찰)을 죽는 날까지 원망하며 살 거라는 문자를 보냈더라.”
강 교사는 무죄를 받아 억울한 누명을 벗었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책임자들, 즉 당시 안기부 및 검경 관계자, 교육감과 학교장 등 가해자들은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는 듯 반성 없이 살아가고 있다. 강성호 교사는 이들에게 꼭 전할 말이 있다. “가해자들에게 내가 사과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교육 현장에서 소중하게 지켜져야 할 사제지간을 악용하고 짓밟은 게 가장 가슴 아프다. 교육자로서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이 부분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제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입력 2021.09.14